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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22/89)
  • 다른 남자와 결혼해

    22화

    - 당장 나를 만나 주지 않으면 민서후 집에 찾아가서 꼬장 부릴 거임.

    “네가 여길 어디라고 와?”

    - 못 할 것 같음?

    나는 한숨을 훅 몰아쉬며 통화를 마쳤다.

    씩씩거리는 나를 보고 민서후는 여전히 근사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평생 갈 화도 풀리게 할 만큼 근사한 미소를 마주한 나는 힘없이 웃었다.

    “그 동생?”

    나는 입술을 가늘게 맞물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주 전쟁 영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소파 위에서의 진하디진했던 키스도 아직 끝나지 않았어야 했다고!

    키스 뒤에, 어? 이렇게, 어? 저렇게, 어?

    그런 것들이 있어야 하는데, 문선준이 온갖 공갈 협박을 해 대며 당장 만나자고 했다.

    “애가 고3을 좀 힘겹게 보내네요.”

    “오빠가 혼내 줄까?”

    응? 지금 뭐라고?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서 미간을 살짝 구기며 그를 응시했다.

    그는 시치미를 뚝 뗀 표정이었지만, 귓불이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붉게 익어 있었다.

    “뭐라고 했어요?”

    “혼내 준다고.”

    그는 목을 큼, 가다듬으며 딴청을 피웠다.

    낯간지러운 호칭을 제 입으로 뱉어 놓고 민망해하는 모습은 심장에 해로울 정도로 귀여웠다!

    “누가요?”

    아, 나에게도 이렇게 집요한 면이 있었던가!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계속 물었다.

    “누가요? 누가? 응? 누가 혼내 준다고 했을까? 으응?”

    장난을 치다 보니 급기야 다리를 벌린 채 그의 허벅지를 타고 오르는 자세가 되어 버렸다.

    두꺼운 팔뚝이 허리를 휘감았다.

    “오빠가 우리 담은이 괴롭히는 동생 혼내 줄까?”

    그가 내 가슴 사이에 턱을 기댄 채, 은밀한 시선으로 올려다보며 물었다.

    숨이 멎고, 심장은 폭발해 버렸다.

    그렇게 야한 얼굴로, 저렇게 짜릿한 말을 해 버리다니!

    나는 그의 머리통을 꽉 당겨 안았다. 그의 턱과 콧날이 니트 위로 차오른 가슴에 닿을락 말락 했다.

    갑작스럽게 분위기는 또 한껏 달아오르고 있었다.

    하긴 요즘 우리의 분위기는 늘 에로틱 모드이기는 했다.

    “수능 끝나면 밥 한번 먹자고 해.”

    “알겠어요.”

    내 사촌 동생인 줄 알고 선준을 걱정하는 그에게서 자상한 어른스러움이 느껴졌다.

    “키스 한 번만 더 하고 가면……. 큰일 나?”

    그가 아이처럼 순한 목소리로 야한 질문을 던졌다.

    “큰일 안 나요.”

    나는 고개를 숙여 그의 벌어진 입술을 가르고 들어갔다.

    농밀하게 차올랐다가, 정신이 아찔하도록 빨아당기기를 여러 번.

    한참 동안 키스를 나눈 우리는 겨우 서로에게서 벗어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멀리 나오지 마요. 근처에 주차했어요.”

    “운전도 해?”

    “우리 서로 모르는 게 많네요. 운전은 아주 가끔 해요. 내 차는 아니고, 집 차.”

    “서로 알아 갈 게 많아 보이네, 우리.”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동안, 나는 작은 핸드백에 휴대전화를 욱여넣으려고 했다.

    “왜 이렇게 안 들어가.”

    혼잣말하며 핸드백 안에 있는 물건을 꺼내 들었다.

    “잠시만 이것 좀 들고 있어 줄래요?”

    나는 무심결에 꺼낸 물건을 그에게 건넸다.

    “너어는…….”

    물건을 받아 든 그가 약간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핸드백에 휴대전화를 집어넣은 뒤, 고개를 들어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을 확인한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아침나절에 구 실장이 내 손에 쥐여 준 피임 도구였다.

    “아니이.”

    나는 말끝을 길게 늘이며 변명을 시작했다.

    “혹시나 그게 필요한 순간이 있을지도 모르고요. 유비무환이라고 하잖아요? 원치 않는 임신으로…….”

    내가 지금 무슨 개소리를 떠들고 있는 걸까?

    그가 실소를 터뜨렸다.

    “내가 이런 것도 준비 안 하는 한심한 놈일까 봐?”

    “준비성이 없는 한심한 사람으로 본 건 아니지만.”

    나는 눈동자를 한 바퀴 굴리고는 덧붙였다.

    “너무 늦게 준비할까 봐?”

    그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

    “아니이. 내가 입사한 지가 언젠데, 좋아했다면서 먼저 고백도 안 하구.”

    틀린 말은 아니니까! 이왕 입 밖으로 꺼낸 말, 끝을 보도록 하자!

    “내가 먼저 고백하구, 키스도 내가 먼저 하구.”

    “그건 네가 성격이 급해서 그런 거 아닐까?”

    그가 가슴 앞에 팔짱을 끼며 물었다.

    “제가요? 그럴 리가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쉰하나에 죽었다. 그리고 지금 스물여섯!

    그러니 두 삶을 합친 세월은 무려 77년!

    나는 첫사랑과 간질거리는 연애를 하기 위해 무려 77년을 기다린 것이다!

    그런데 내가 성격이 급하다니?

    77년 만에 처음 연애하는 할미가 이 정도면 많이 느긋한 거지?

    “아무튼, 이건 압수.”

    그는 정사각형 모양의 상자를 트레이닝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엄혹한 표정을 지었다.

    “왜, 압수?”

    “애먼 데 가서 쓰면 안 되니까.”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쪼르르 다가가 그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가슴에 턱을 기댄 채 올려다보자, 웃음을 참는 그의 입꼬리가 깜찍하게 실룩거렸다.

    “그럴 리가 있나? 나는 민서후밖에 없는데. 그러니까 약속!”

    새끼손가락을 그의 왼쪽 가슴 위에 올렸다.

    “뭘 약속?”

    “일단 약속.”

    어서 새끼손가락부터 걸라며 그를 채근했다.

    “그래, 약속.”

    “다음 주말 소풍에는 꼭 사용하기!”

    그래, 77년 동안 참은 거나 마찬가지다.

    처참하게 죽었다가, 스물여섯 꽃다운 나이로 돌아왔느니 성욕이 무성해질 만도 하지 않은가?

    이전 삶에서도 나는 경험이 없었다.

    강재만과 결혼 직전, 나는 부인과 검진에서 불임 판정을 받았다.

    조건 맞춰서 한 결혼,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여자를 안는 것은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며 강재만은 부부관계를 거부했었다.

    그런 새끼가 날 죽였냐?

    사랑 없는 부부관계는 죄스럽고, 살인은 당당해?

    “표정이 왜 갑자기 비장해지셨을까?”

    그가 일그러진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은 표정인데? 이게 살해 도구가 되는 건가?”

    그가 피임 도구 상자를 꺼내 보이며 물었다.

    “아니거든요!”

    새침하게 대꾸하며 치밀어오른 화를 갈무리했다.

    역시 민서후 앞에서는 원수를 향한 들끓는 분노도 금세 희석된다.

    “누구 하나 죽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가 조용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 남자 또 야해지려고 시동 건다.

    나는 그와 맞닿은 몸을 살랑살랑 흔들며 물었다. 뻔히 눈치챘으면서 던진 질문이다.

    “누구요?”

    단단한 몸 위로 말랑말랑한 몸이 자극적으로 뭉개졌다.

    “담은아.”

    “으응?”

    그의 고개가 천천히 기울었다.

    귓가에 간지러운 숨결이 닿았다.

    “너 이러다 나 죽이기 전에 집에 못 갈 수도 있어.”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버렸다.

    그가 붉어진 내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는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우리 담은이, 예쁜 머리에 또 더러운 걸로 가득 찼나?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갛지?”

    그에게 ‘나는 쓰레기다! 야한 생각을 시도 때도 없이 한다!’ 고 고백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내 머릿속이 얼마나 더러운지, 궁금하지 않아요?”

    절대 지지 않는 정담은!

    그가 유쾌하게 웃으며 졌다는 듯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아쉬워서 죽을 맛이다.

    “첫 키스도 탕비실에서 했는데, 이걸 여기서 처음 쓸 수는 없지. 나중에 좋은 데 가자.”

    그 나중이 언제냐고 묻고 싶어서 입이 간지러운 순간, 할머니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방에서 나오셨다.

    “일어났네?”

    나는 아이 대하듯 할머니를 알은체했다.

    “여보, 그 여자 누구야?”

    그런데 할머니는 손자를 남편으로 착각한 듯 울상을 지었다.

    “아, 잠시 수도 점검 나왔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나는 대단한 장비라도 되는 것처럼 라탄 햄퍼와 소형 아이스박스를 양손에 들었다.

    “여보, 무거우실 텐데 대문 밖까지 들어다 드리세요.”

    “알겠어요. 금방 돌아올 테니까, 소파에 얌전히 앉아 있어요.”

    그는 나를 대할 때와는 또 다른 자상한 음색으로 할머니를 대했다.

    새삼 그의 인품에 반하고 마는 순간이었다.

    아주 먼 훗날, 호호할머니가 된 나와 파파할아버지가 된 그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서로를 깊은 애정으로 대하며 손을 꼭 맞잡고 공원을 산책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

    감히 민서후를 강재만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기는 했지만, 민서후는 절대로 나를 아프게 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가 할머니를 대하는 모습만 보았을 뿐인데도 말이다.

    그는 내 차가 있는 곳까지 짐을 들어다 주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잘생긴 내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자, 마치 꿈을 꾼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함께 있을 때는 행복한 감정이 몽글몽글 차올라서 충만했다면, 그와 떨어져 있는 시간은 마치 세상에 홀로 버려진 듯 외로웠다.

    나는 외로운 기분을 간신히 털어내며 선준과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비교적 빨리 왔네?”

    교복을 입지 않은 선준은 또 처음이다.

    헐렁한 청바지에 후드 티를 입은 선준에게서 그 나이 특유의 맑고 명랑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내가 뭘 찾았는지 알아?”

    카페 구석, 우리는 후미진 곳에 자리한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었다.

    “뭘 찾았는데?”

    얼마나 대단한 걸 찾았기에 야단법석을 떤 건지 궁금해졌다.

    “이거.”

    선준이 가방에서 낡은 책 하나를 꺼내 들었다.

    《괴상한 이야기 속으로》

    나는 멍해진 눈으로 선준과 괴상하게 낡은 책을 번갈아 보았다.

    고3 문선준은 분위기만 맑고 명랑한 것이 아니라 뇌도 맑고 명랑하게 세척했나 보다.

    겨우 괴담 모음집 때문에 나를 불러냈어?

    “너 두 번 죽고 싶냐?”

    서늘한 목소리로 물은 말에 선준의 눈동자가 의미심장하게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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