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남자와 결혼해
21화
OTT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적당한 영화를 하나 골랐다.
우주 영웅이 헤어졌던 첫사랑과 다시 만나서 사랑을 이룬다는 블록버스터 영화였다.
손에 미끄러운 게 묻은 것도 아는데, 감자칩 봉지가 뜯어지지 않고 자꾸 헛돌았다.
리모컨을 소파 테이블에 내려놓은 그가 내 감자칩 봉투를 가져가서는 단숨에 열어서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웃으며 감자칩 하나를 집어서 입에 넣었다.
“으음. 맛있어.”
별스럽게 감동하는 나를 그는 특이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꼭 과자 처음 먹어 보는 사람 같네?”
내 손으로 과자를 사 먹은 기억이 없었다. 집에 이런 과자를 사다 놓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니 처음 먹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짭조름하고 바삭바삭한 감자칩이 쉴 새 없이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거라도 마시면서 먹어.”
그는 캔 콜라를 따서 건네주며 웃었다.
“으음!”
콜라 한 모금을 머금자, 입안에서 폭죽이 터지는 듯했다.
감자칩과 캔 콜라의 조화가 이렇게 아름다운 맛을 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겨우 콜라랑 감자칩이 그렇게 맛있어?”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웃으며 내 입가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아주 평범한 주말의 어느 날 같았지만,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남들은 모든 날을 이렇게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살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지난 삶이 더더욱 억울해졌다.
나는 다 먹고 빈 감자칩 봉투를 소파 테이블 위에 올리고는 그의 두꺼운 팔뚝에 팔짱을 꼈다.
판판한 가슴 언저리에 머리를 기대며 물었다.
“내가 왜 좋아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그가 되물었다.
“글쎄. 왜 좋을까.”
나는 고개를 바짝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어 보았다.
웃음기 어린 입술이 샐쭉한 입술에 다시금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럼 나 언제부터 좋아했어요?”
“처음 봤을 때부터?”
“첫눈에 사람이 좋아지는 게 어딨어요?”
그는 잠시 아무 말도 없다가 잔잔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처음엔 너무 예뻐서 눈이 갔어. 하얀 피부에.”
그가 내 손등을 보드랍게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동그랗고 까만 눈이 사람을 꼭 끌어당기는 것 같더라고. 부모님 사랑 듬뿍 받고 자랐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아. 나는 부모님 사랑을 모르고 자랐으니까, 내가 모르는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그냥 막연히 끌렸던 것 같기도 해.”
사실 부모님의 평범한 사랑을 모르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그의 그런 점에 끌렸었다.
저 남자는 평범하고 화목한 집에서 자랐을 거라는 생각 말이다.
“그다음엔 너무 순하고 착해서 눈을 뗄 수 없었고, 나중에는…….”
그가 뜸을 들여서 채근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기다렸다.
“너처럼 착하고 순한 사람이면 나를 이해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
마주한 그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한 빛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욕심은 났지만, 함부로 다가갈 수는 없었어. 오늘과 같은 일이 생길 걸 알았으니까.”
“그러다 내가 같은 사업 본부에 배정된 거구나! 그쵸? 운명이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마치 동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꿈꾸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업본부 신설되고, 명단에서 이름 발견했을 때……. 좀 떨리더라. 같은 부서에서 얼굴 볼 생각하니까. 첫날 저녁에 괜히 내가 전화도 했었지?”
개인적인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던 사이에 갑자기 전화한 게 좀 의아하기는 했다.
“충동적으로 전화를 걸기는 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잘 들어갔냐고 묻고 끊었었지. 그땐…….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그리고…….”
그가 고개를 살짝 내젓고는 말을 이었다.
“착하고 순한 줄만 알았는데…….”
그런데?
“갑자기 좋아한다고 고백을 하질 않나, 입술을 덮치질 않나. 사람 혼을 쏙 빼놓더라.”
가슴이 간질거렸다.
“계속 듣고 싶어요. 내 어떤 점이 좋은지,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는지, 그때 나는 뭘 하고 있었는지도요.”
그가 내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게 왜 계속 듣고 싶어?”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요. 내가 정말 귀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되게 사랑받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자존감이 막 수직 상승하는 것 같달까?”
할머니의 말씀처럼 내 주위에는 나를 방편으로 써먹으려는 인간들만 득시글거렸다.
나의 본질을 들여다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며,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게 다 내가 가진 배경 탓이다. 민서후 앞에서는 그걸 지우고 났더니, 오롯이 나만 보이는 듯했다.
“너는 내가 언제부터 좋았는데?”
“본부장님도 듣고 싶어요?”
나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물었다.
또 저런다. 그의 눈동자에 하트가 동동 떠올라 있었다.
왜 자꾸 나한테 반하실까.
“응. 듣고 싶어.”
“처음 같이 점심 먹을 때요. 수저통 못 찾는 거 무안하지 않게 신경 써 주셨을 때, 세심한 배려에 감동했어요. 마주칠 때마다 인사도 꼬박꼬박 잘 받아줬잖아요. 웃으면서……. 그리고 그 전에 제가 감동한 게 또 있는데요.”
이후의 감동 포인트는 예전의 삶에서만 있었던 일이다. 여기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 언급할 수가 없었다.
“그전에?”
그전 일은 기억나는 게 없다는 듯이 그가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잘생겼잖아요. 본부장님은 얼굴이 제일 감동적인 거 아세요?”
진지한 물음이었는데, 그는 장난으로 받아들였는지 유쾌하게 웃는다.
“그리고 나도 본부장님이 훌륭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반듯하게 자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 생각이 맞았던 것 같아요.”
그는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할머니가 훌륭하게 키워 주셨잖아요. 사랑 담뿍 받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할머니를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돌볼 수 있는 거 아녜요?”
내 질문에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가족이 나랑 할머니 둘뿐이니까.”
곤란한 듯 모호한 말로 대답을 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그에게 할머니가 가진 팔찌는 어떤 물건인지, 할머니가 어떤 분이셨는지 물을 수는 없었다.
“나는 우리 부모님이 어떻게 연애했는지도 몰라요. 근데 본부장님은 큰할아버지 연애사까지 알고 있잖아요.”
그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사정이 좀……. 복잡해.”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가 안타까워서 손바닥으로 뺨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이마가 서로 맞닿았다. 숨결이 살그머니 뒤섞이기 시작했다.
“지금 굳이 그걸 나한테 다 말하려고 할 필요는 없어요. 차차 알아 가면 되죠.”
누가 할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를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착하고 순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고민하며 사랑을 꿈꿨던 남자를 나는 꼭 안아 주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민서후처럼 바른 사람이라면 나를 이용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자연스럽게 입술이 맞닿았다. 입안이 조금 더 벌어지고, 혀가 부드럽게 얽혔다. 그가 입안 쪽 예민한 살점을 혀끝으로 건드릴 때마다, 나는 몸을 조금씩 떨었다.
“흐음.”
단단한 목덜미를 끌어안은 순간, 그가 내 허리를 바짝 안아 들었다.
엉덩이에 단단한 허벅지가 닿았다.
TV에서는 우주 전쟁이라도 일어난 건지, 레이저를 쏘아 대느라 시끄러웠다.
하지만 그 소음조차도 관능적으로 달아오르는 숨소리를 숨기지는 못했다.
“하아.”
입술이 잠시 떨어진 틈을 타 달뜬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의 입술이 턱선을 타고 내려가서는 목 안쪽에 닿았다.
분명 부드러운 입술인데 따끔따끔한 열기가 전해지는 것 같아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흐으.”
그의 커다란 손아귀에 가슴께가 붙들렸다.
보드랍게 살덩어리를 움켜쥐는 악력에 취한 나는 저절로 목을 젖혔다.
상체가 자연스럽게 뒤로 넘어갔다.
그가 몰아붙이는 아찔함에 압도당한 나는 단단한 목을 끌어안은 채로 연신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그의 입술이 목선을 타고 내려가 쇄골 언저리에 닿았다. 가슴은 여전히 그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
“후우.”
뜨거워진 살갗 위로 그보다 더 뜨거운 그의 숨결이 흘렀다.
“담은아.”
그가 내 이름을 조용히 읊조렸다.
“으응.”
농밀한 신음과도 같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는 계속해서 내 이름을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언어라도 되는 것처럼 읊조렸다.
담은아, 담은아…….
듣기 좋은 목소리로 이름이 불릴 때마다 가슴속에서 충만함이 차올랐다.
단단한 그의 품은 세상 어느 곳보다 아늑했다.
꿈결인 줄 알고 건넸던 고백이 꿈결 같은 사랑을 선사해 준 것이다.
“흐흐. 서후 씨.”
여태 본부장님이라고 부르던 나는 처음으로 용기 내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목 안쪽에 입을 맞추던 그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리고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소파에 등을 눕힌 채였고, 그는 나를 품에 가두듯 팔을 뻗어서 소파를 짚고 있었다.
“뭐라고?”
그가 가라앉다 못해서 약간은 쉰 것처럼 느껴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서후 씨.”
나는 입가에 연한 미소를 매단 채로 대답했다.
“다시 불러 봐.”
“서후 씨.”
그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그의 커다란 손이 뒤통수를 받치듯 머리 아래를 파고들었다.
“다시.”
“서후 씨.”
보드라운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흐응. 서후 씨.”
단지 이마에 입술이 닿았을 뿐인데, 쌓아 올린 열기가 대단한 탓인지 신음이 함께 흘러나왔다.
“뭐라고?”
“서후 씨.”
“아니, 그 전에.”
그가 짓궂게 내 신음을 지적하며 귓불에 입을 맞췄다.
“흐으응.”
달뜬 소리를 냄과 동시에 입술이 쭉 빨려 들어갔다.
입안으로 말랑말랑하고 뜨거운 혀가 침범해 오는 감각은 황홀하다 못해서 가슴이 저릴 정도였다.
연애 기간이 길어서 신뢰가 깊어진 것도 아닌데, 그가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이해해 줄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주소를 잘못 써서 도달하지 못했던 편지가 이제야 주인을 만난 듯한 기분.
나는 더 이상 수취인불명으로 세상을 떠돌며, 누군가 제발 날 열어 봐 주기를 바라는 불쌍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옆구리를 훑고 내려가 니트 밑단을 들췄다. 매끈한 살결을 쓸고 올라온 손이 속옷 안으로 들어오려는 순간이었다.
핸드백에 넣어 둔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가 입술을 떼려고 해서 나는 그의 몸을 더욱 꽉 조여 안았다.
감동을 파괴하는 인간이 대체 누군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조져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 벨소리가 끊겼다.
그런데 끈질긴 인간이 또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그가 한숨을 훅 몰아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급한 전화 같은데, 받아 봐.”
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발신인은 잠시 잊고 있던 고3 문선준이었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받을 때까지 할 근성을 가진 인물이기도 했다.
“누나 바빠. 왜 자꾸 전화야?”
일부러 민서후와 함께 있다는 티를 내며 전화를 받았다.
- 내가 뭘 알아냈는지 알면, 기절할 거임.
별거 아니면, 내가 널 죽일 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