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남자와 결혼해
20화
소담한 마당에는 여기 사는 가족의 역사가 흔적처럼 남아 있었다.
마당 구석에는 개가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작은 원목 집이 자리했다.
세월의 더께가 역력한 것으로 보아, 오래된 물건처럼 보였다.
“개를 키웠었나 봐요?”
마당 한쪽에 방치되어 있던 나무 테이블과 의자를 닦던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어릴 때.”
“개집은 왜 그대로 갖고 있어요?”
“돌아가신 아버지가 만드신 거거든.”
세월이 꽤 흐른 탓에 옅어졌다고는 하지만 사무치는 그리움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중에 이 남자랑 결혼하면, 저 집을 쓸 수 있도록 예쁜 강아지를 한 마리 키워야지.
나는 개집 하나를 마주하고도 신혼살림을 차릴 망상을 하며 콧노래를 불러댔다.
“뭐가 그렇게 신나?”
그가 나를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이 바라보며 물었다.
“소풍이니까요. 소풍은 원래 신나잖아요.”
“겨우 집 마당에서 하는 건데도?”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거리며 웃었다.
장소가 중요하겠는가, 우리 잘생긴 민서후가 함께하는데?
테이블 위에 빨간 체크무늬 테이블보를 깔고, 그 위에 도시락을 펼치자 제법 근사한 피크닉 테이블이 완성되었다.
내가 어설프게나마 상을 차리는 사이, 그는 집 안에 계시던 할머니를 모시고 나왔다.
“우와! 공주님 밥상이다!”
할머니는 어린아이처럼 손뼉을 짝짝 치며 좋아하셨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지, 할머니는 치매 어르신 중에서도 점잖은 증상을 보이는 축에 속한다고 했다.
“언니가 다 만든 거야?”
이번에도 나의 역할은 할머니의 새언니인 것 같았다.
“응. 언니가 다 만든 거야.”
“이거 진짜 먹어도 되는 거야? 너무 귀해 보인다우.”
할머니는 마치 마법이라도 부린 사람을 보는 것처럼 나를 우러러보았다.
“얼른 드세…… 먹어!”
포크로 갈비찜을 하나 콕 찍어서 손에 쥐여 드리자, 할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맛있다! 이거 진짜 언니가 다 만든 거야?”
“응.”
“어떻게 만드는 거야? 나도 우리 서방님한테 만들어 줘야지.”
“아, 그게…….”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섬세하게 만드는 과정을 설명할 정도는 아니었다.
“언니, 거짓말했구나? 이거 언니가 만든 거 아니지?”
나는 할머니의 옆에 앉아 있는 그를 흘끗 보았다.
그는 김밥을 하나 입에 집어넣으며 미소 짓고 있었다.
“응, 언니 이모가 도와주셨어.”
“언니 이모가 요리를 엄청 잘하는구나? 좋겠다. 요리 잘하는 이모 있어서.”
할머니는 도시락으로 싸 온 요리들을 골고루 맛보며, 그런 이모가 있어서 좋겠다고 부러워했다.
워낙 일찍 일어나시는 분이라, 아침 9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할머니께는 점심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인지 마당에서 식사를 마친 할머니는 나무 의자에 기대어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는 할머니를 방에 모셔다드리고는 뿌듯한 얼굴로 나와 마주 앉았다.
“고마워. 할머니가 기분이 무척 좋으신 것 같아.”
테이블 위에 놓인 내 손을 끌어다가 잡으며 더욱 진하게 웃는 그는 빈틈없이 멋있었다.
“그럼 본부장님은요?”
오늘의 소풍 도시락은 그와 나를 위한 것이었다. 물론 효심 지극한 그에게는 할머니의 기분이 좋은 것만으로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나?”
그가 잠시 생각에 빠진 듯 테이블을 응시했다.
“아쉽지. 둘만 있으려고 했는데.”
내리깔았던 눈을 들어 올리며 건넨 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금은 둘이 있잖아요.”
“더 좋은 데로 가려고 했지.”
“거긴 다음에 가면 되죠.”
그가 손을 뻗어 내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아쉬워도……. 오늘 얼굴 못 보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도시락은 몇 시에 일어나서 싼 거야?”
“새벽 4시쯤?”
“일찍도 일어났네. 그 시간부터 이모님이 일어나셔서 도와주신 거야? 이모님이랑 같이 살아?”
그에게 배경을 숨긴 나에게는 허를 찌르는 질문이었다.
“아, 친이모는 아니고요. 집안일 도와주시는 이모님이요.”
그가 연하게 웃었다.
“우리 공주, 집에서 정말 공주님처럼 자랐나 보네.”
어쩌면 지금이 자연스럽게 집안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집에 계시던 분인데요, 부모님보다 더 친해요.”
자연스럽게 부모님 이야기를 꺼냈을 때였다.
집 안에서 무언가 와장창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황급히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할머니께서 부엌에 서 계셨다.
할머니 발아래에는 온갖 주방용품들이 떨어져 있었다.
“괜찮으세요?”
얼결에 물은 말에 할머니가 울음을 터뜨렸다.
“언니가 맛있는 거 해 줘서……. 나도 언니 맛있는 거 해 주고 싶어서…….”
도시락에 대해 보답하고 싶었다는 할머니의 말씀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안 다쳤어? 아픈 데 없고?”
나는 할머니 곁으로 다가가 작고 마른 몸을 끌어안으며 물었다.
“응, 안 다쳤어.”
할머니는 주름진 손으로 내 등허리를 꼭 끌어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깨진 건 없네요.”
“할머니 아프시고 나서 깨질 만한 물건은 다 치웠어.”
그는 주방 집기를 싱크대에 도로 집어넣으며 대답했다.
그사이 나는 할머니 손을 꼭 붙든 채로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안정이 필요한 것처럼 보여서, 다시 침대에 눕혀 드릴 생각이었다.
침실로 들어온 할머니는 두 눈을 어린아이처럼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언니, 내가 보물 보여 줄까?”
“무슨 보물?”
할머니는 금세 신이 난 듯 침대 아래서 작은 나무 상자를 하나 끄집어냈다.
“너무 예뻐서 놀라면 안 돼! 큰오빠는 이거 별로 안 좋아해. 내가 이걸 숨겨 놓고 있는 줄 알면, 빼앗아갈 거라우.”
그러고는 닫힌 문을 조심스럽게 흘끗거린 뒤 상자 뚜껑을 열었다.
초콜릿이나 사탕 같은 주전부리가 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곳에는 뜻밖의 물건이 들어 있었다.
“이게 뭐야?”
“내 보물! 예쁘지? 귀한 거야. 언니니까 보여 주는 거라우. 아무한테도 안 보여 줬어.”
빨간 천 위에는 가죽 팔찌가 놓여 있었는데, 팔찌 주변을 손톱만 한 칠보 방울 수십 개가 둘러싼 모양새였다.
칠보 방울에는 호랑이, 돼지, 원숭이, 양 등의 동물이 오색찬란한 빛깔로 그려져 있었고, 각 방울은 영롱한 빛을 내며 반짝거렸다.
할머니는 주름진 손으로 방울을 한번 쓱 쓸어 보였다.
“자네는 먼 길을 돌아 여기까지 왔구먼.”
어린아이처럼 굴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사뭇 달라져 있었다.
흠칫 놀란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할머니를 응시했다.
“저승에 가지 못하고, 이승에 붙들린 연유가 무엇일꼬.”
소름이 확 끼쳤다.
마주한 할머니의 눈은 나를 꿰뚫고 지나가, 멀고 먼 어딘가를 가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 고생을 많이 하고도, 선하게 살았거늘. 극락왕생을 빌어 주는 이는 없고, 제 욕심 채우려 붙드는 이들만 득실득실하니.”
당황한 나는 마른침조차 삼키지 못했다.
“이 땅에 발을 제대로 붙이지 못하고 촛불이 바람에 흔들리듯, 저들 욕심에 시달려서 깜빡깜빡하는구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아가. 아직 화평하길 바라는 이보다 너를 사사로운 방편으로 쓰려는 자들이 더 많은 탓이니라. 사랑을 많이 받아야겠구나.”
나는 할머니가 나에게 보여 준 방울 팔찌를 다시 한 번 내려다보았다.
어딘가 범상치 않은 모양새이기는 했다.
그리고 치매 어르신이 헛소리하는 것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명확하게 나의 존재를 알아보고 있었다.
“……하, 할머니.”
겨우 입술을 뗐을 때였다.
“응?”
할머니가 금세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팔찌는, 뭐야?”
“쉿!”
할머니가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며 아무도 없는 방을 두리번거렸다.
“조용히 해! 큰오빠한테 들키면 빼앗긴단 말이야! 내 마지막 보물이라우.”
나무 뚜껑을 잽싸게 닫은 할머니가 침대 아래 깊숙한 곳으로 그것을 밀어 넣었다.
안에 담긴 물건이 어떤 것인지, 할머니가 나에게 한 말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는 알 재간이 없었다.
할머니는 절대 큰오빠에게 알은체하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하고는 피곤하다며 침대 위에 몸을 누였다.
나는 할머니께서 잠드신 것을 확인하고는 침실을 빠져나왔다.
그는 부엌 정리를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미안. 정신이 좀 없지?”
그가 연애를 거부했던 이유를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괜찮아요.”
나는 아일랜드 식탁 앞에 앉아서 부엌 싱크대를 행주로 깨끗이 닦는 남자는 바라보았다.
“근데요.”
“응.”
그가 마른행주에 젖은 손을 비비며 나를 돌아보았다.
할머니가 치매를 앓기 전에는 어떤 분이셨는지 궁금해졌다.
“아니에요.”
하지만 섣불리 물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에게 배경을 쉽사리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에게도 쉽지 않은 이야기일 수도 있다.
“주말 데이트가 형편없네.”
게다가 데이트를 망친 것 같다며 미안해하는 남자에게 심각한 이야기를 꺼내서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할머니의 보물을 지켜 드리고,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게 우선인 것 같았다.
“영화 볼까?”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는 감자칩을 각자 한 봉지씩 집어 들고는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