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19화

늦은 밤, 수아가 잠든 것을 확인한 나는 숙소를 살금살금 빠져나왔다.

[수아가 막 잠들었어요. 오래 기다렸죠? 이제 방에서 나가요. 금방 갈게요.]

진작 숙소에서 나왔다는 그는 리조트 산책로에서 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는 혹시나 보는 눈이 있을까 걱정하며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다행히 레크리에이션으로 체력을 몽땅 소진한 뒤, 저녁 식사까지 하고 이뤄진 술자리 때문에 다들 곯아떨어진 모양이다. 숙소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숙소로 사용하는 콘도 별관을 빠져나와서 산책로로 들어섰을 때였다.

저 멀리 호숫가 정자 앞을 서성이고 있는 사람의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거리가 멀고 어두웠지만, 나는 그 사람이 민서후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오래 기다렸어요?”

강원도의 늦가을 밤은 입김이 하얗게 불거질 만큼 서늘했다.

“천천히 오지. 뛰어온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꾸했다.

“빨리 보고 싶어서요.”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손이 너무 차가워요.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나는 그의 커다란 손을 모아 잡고는 입김을 호호 불어 주었다.

“네 손이 따뜻한 거야.”

그는 한 손으로 내 두 손을 모아쥐었다.

그러고는 다른 팔로 내 허리를 당겨 안았다.

나는 자연스레 그의 단단한 가슴에 옆얼굴을 기댔다.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인 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서, 그의 가슴 한가운데 턱을 댔다.

날렵한 턱선과 붉고 탐스러운 입술, 우뚝한 콧날을 이런 각도에서 올려다볼 수 있는 여자는 영원히 나 하나뿐이면 좋겠다.

“무슨 생각해?”

그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아래에서 보니까 참 잘생겼다는 생각.”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조차도 근사하다.

“어?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죠.”

“그래, 너는 참. 위에서 보니까.”

그윽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 연한 미소가 고였다.

“되게 작다.”

그러면서 내 상체가 커다란 품에 완전히 잠기도록 끌어안는다.

“작기만 해요?”

다소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나는 잘생겼다고 해 줬는데, 작다고?

그가 소리 없이 크게 웃으며 나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작고 소중해.”

심장이 간질거렸다.

이제껏 누구도 나를 품에 안고 작고 소중하다고 말해줬던 사람은 없었다.

하물며 어릴 적에도 들어 보지 못한 소리였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기는 했지만, 나는 소중하다는 말 한 번 들어보지 못한 보잘것없는 삶을 산 것이다.

그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였다.

“고마워요.”

“뭐가?”

“소중하다고 해 줘서요.”

괜히 왈칵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잠시 숨을 멈췄다.

“별 게 다 고맙네.”

턱을 내 정수리에 올려놓고 그가 중얼거렸다.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안고 있었다.

나는 그의 가슴팍에서 들려오는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에 다시금 귀를 기울였다.

마음이 평온해졌다.

저절로 미소가 흘러나올 만큼 기분이 좋았다.

분명 땅을 딛고 서 있는데도, 발아래가 동동 떠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앞으로 약 잘 챙겨 먹어.”

“잘 챙겨 먹을게요. 그런데요. 이상하게 본부장님 옆에 있으면 원기가 충전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머리가 맑아져요.”

그의 웃음소리가 동굴에서 듣는 것처럼 웅웅거렸다.

“평소였으면 같이 점심도 먹고, 커피도 한잔했을 텐데……. 오늘은 내내 워크숍 행사에 참여하느라 한 마디도 못 했잖아요.”

1박 2일 행사에 동참하기는 했지만, 평소만큼 얼굴을 마주할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약보다 본부장님이 한 번 안아 주는 게 더 효과가 좋은 것 같아요. 포옹이 건강에 좋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고 하잖아요?”

어리광이 아니라, 정말이지 그의 곁에 있으면 없던 힘도 솟아나는 것 같았다.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입술이 뺨에 닿았다.

“알았어. 많이 안아 줄게.”

달아오른 볼 위로 그의 달콤한 숨결과 밀어가 쏟아졌다.

“나도 꼭 안아 줄게요.”

그의 허리를 둘러 안은 팔에 힘을 꽉 주었다.

말랑말랑한 몸이 그의 단단한 몸 위에서 뭉개지는 느낌이 선명했다.

“흐음.”

그가 신음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나는 아랫배에서 익숙하지 않은 딱딱함을 느끼고는 얼굴이 확 붉어지고 말았다.

“괜찮으신 거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진짜……. 순진한 건지, 발칙한 건지.”

커다란 손이 내 턱을 움키듯 감쌌다.

고개가 천천히 위로 들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를 그가 파고들었다.

차가운 늦가을 밤, 따뜻하게 얽히는 감각에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낙엽 내음과 어우러진 그의 향수 냄새는 헤아릴 수 없는 그리움이 되어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와 입술을 맞대고 있는데도, 그가 그리웠다.

꼭 맞물려 있던 입술이 조심스럽게 떨어졌다.

“다음 주말엔 우리 둘이 가을 소풍 갈까?”

그의 낭만적인 제안에 나는 목덜미를 와락 끌어안으며 웃었다.

별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만 같은 아름다운 밤이었다.

***

[미안. 오늘 아무래도 못 만날 것 같아. 요양 보호사님이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겼다고 하시네. 일어나서 메시지 보면 꼭 전화 줘.]

토요일 꼭두새벽, 그는 요양 보호사님의 부재로 둘만의 가을 소풍을 취소해야겠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아마도 그는 내가 자는 줄 알고, 문자메시지를 미리 보낸 듯했다.

“그럼, 저걸 다 어쩌지?”

나는 부엌의 거대한 아일랜드 식탁 위를 차지하고 있는 소풍 준비물을 바라보았다.

라탄 햄퍼에 담긴 3단 도시락이며, 소형 아이스박스에 준비한 과일과 각종 주전부리까지.

함께 도시락을 준비한 구 실장이 심각해진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 중이에요.”

구 실장과 집안 요리사들이 거의 다 준비하기는 했지만, 나도 새벽 4시부터 일어나서 부산을 떤 결과물이었다.

아까워서 죽겠는데?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흠, 할머니 때문에 그가 집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거라면……. 민서후 집 마당을 가을 소풍 장소로 바꾸면 되는 거 아닌가?

“실장님! 이거 제 차로 몽땅 다 옮겨 주세요!”

“그분이 데리러 오시는 거 아니고요?”

“제가 아직 정 회장님 딸인 거 모르거든요.”

나는 소풍 장소를 그의 집으로 바꿀 거라고 말하는 대신, 그럴싸한 핑계를 댔다.

사실 거짓말도 아니었다.

아직 민서후는 내가 정웅그룹 회장의 맏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아직 말씀 안 하셨어요?”

“평범한 조건은 아니잖아요. 마음이 확실해진 후에 말하고 싶어서요.”

구 실장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꼭 담은 양이 먼저 말해야 해요. 다른 사람 통해서 듣게 하면 안 되고. 알죠?”

나는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에게 잘 보이려고 안달인 강재만은 흠이라도 잡힐까 싶어서, 나의 정체에 관해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부모님은 나를 교회에 데리고 갔을 때, 내가 당신들보다 한 술 더 뜨는 것을 보았기에 당분간은 조용할 것이다.

또 나는 이전 생에서 조건만을 내세운 결혼을 했다가 불행해졌다.

그렇기에 내가 가진 평범하지 않은 배경은 마음이 공고해진 후에 말하고 싶다.

차 트렁크에 짐을 다 싣고 나자, 구 실장이 내 손에 조그만 상자를 하나 쥐여 주었다.

“이게 뭔데요?”

내 물음에 구 실장이 의미심장하게 미간을 구기며 대꾸했다.

“혹시나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지난번에 외박하신 일도 신경이 쓰이고……. 피임은 꼭 하셔야 합니다!”

구 실장이 내 손에 쥐여 준 것은 다름 아닌 피임 도구였다.

아, 진짜 저 이모 발라당 까져서 안 되겠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나는 핸드백 안에 얼른 정사각형의 상자를 집어넣었다.

“다녀올게요!”

“운전 조심해요! 임신도 조심하세요!”

구 실장의 배웅이 오늘처럼 기이했던 적은 없었지, 싶다.

그의 집 앞에 도착한 나는 주택가 지상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소풍 꾸러미를 그의 대문 앞까지 옮겼다.

[진짜요? 아쉽다.]

나는 대문 앞에 서서 그에게 답 메시지를 보냈다.

[나도 아쉽다. 지금 일어났어?]

[아쉬우면 우리 그냥 소풍 가요! 네?]

조르는 말을 건네자마자,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 오늘은 좀 어려울 것 같은데.

그의 목소리에는 곤란한 기색이 역력했다.

“할머니랑 같이 소풍 가면 되죠.”

- 할머니 모시고? 어디로?

“마당으로요. 대문 좀 열어 줄래요? 날씨가 꽤 쌀쌀하네.”

휴대전화 너머에서 무언가 우당탕 넘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그가 현관 밖으로 분주하게 다가오는 기척이 났다.

대문이 벌컥 열리고, 무방비 상태의 민서후가 잘생긴 자태를 드러냈다.

다시 말하지만, 키스 시 흡입력이 뛰어난 우리 왕자는 무방비 상태일 때 제일 섹시하다.

“어떻게 된 거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도시락까지 쌌는데, 집에서 혼자 먹을 수는 없잖아요. 처량하게.”

그가 빙그레 웃으며 라탄 햄퍼와 소형 아이스박스를 내려다보았다.

“마당에서 할머니랑 같이 가을 소풍 분위기 내면 되죠!”

민서후의 얼굴이 보기 좋게 허물어졌다.

이제 알겠다,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나한테 새삼 반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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