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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18/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18화

나는 또다시 빙글빙글 도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깨어났다.

주변이 어수선했다.

누군가 구급차가 준비되었는지 물었고, 확인 중이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으음.”

앓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담은 대리 깨어났어요! 담은아, 괜찮아? 나 누군지 알겠어?”

울먹거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수아였다.

“으응.”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요양원에서 쓰러졌을 때, 그리고 택시 안에서 정신을 잃었을 때와 비슷했다.

상체를 일으키려 할 때였다.

“리조트 구급차 준비될 때까지 누워 있어요.”

민서후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쓰러져서 진짜 깜짝 놀랐어. 너 진짜 괜찮은 거지?”

수아가 내 얼굴을 세심하게 살피며 물었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의사가 올 때까지 누워 있어야 한다며 저지당했다.

“나랑 부딪친 사람은?”

“부딪친 사람이라니. 너 그냥 갑자기 혼자 쓰러졌어.”

그럴 리가 없다.

분명 벽처럼 단단한 사람과 거세게 충돌한 뒤에 쓰러졌었다.

그런데 혼자 쓰러졌다고?

“꼭 온몸에 힘이 빠진 사람처럼 무너져 내려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내 손을 꼭 붙든 수아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너 지난번 봉사활동 때도 이렇게 쓰러졌던 거 아냐?”

수아는 요양원 봉사활동을 떠올리며 울상을 지었다.

그 역시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어…….”

리조트 의무팀 소속 의사는 깨어난 나를 진찰하며 여러 질문을 던졌다.

지병이 있지는 않은지, 좌우 움직임이 자연스러운지, 손가락으로 신체 특정 부위를 정확히 가리키는 데 문제는 없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지금 심전도나 혈압, 체온은 모두 정상입니다. 정밀 검사는 큰 병원으로 이송해서 받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금세 구급차가 준비되었다며, 주변에서 부산을 떨어 댔다.

“괜찮아요. 지난번에 봉사 활동하다가 쓰러졌을 때 정밀 검사받았는데……. 빈혈이 좀 있다고 했었어요. 제가 오늘 약 먹는 걸 깜빡했네요. 다른 데는 이상 없어요.”

사실 지난번 정밀 검사에서도 나는 건강체로 확인되었다.

빈혈은커녕 매우 건강한 축에 속했다. 죽었다가 살아났더니 기이한 기절을 경험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으니, 그럴싸한 병명으로 빈혈이 적합했다.

“수아 대리, 정 대리 데리고 숙소로 갈래요?”

민서후의 말에 수아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꾸했다.

“네! 제가 같이 있을게요.”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소란 일으켜 죄송합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들 놀란 얼굴로 걱정스럽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란은 무슨. 어서 가서 쉬어. 열심히 하려다가 그런 건데, 뭐.”

회식 때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과장이 분위기를 다독이듯 말했다.

쓰러질 때는 마치 방전이라도 된 것처럼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지금은 도로 전기가 도는 것처럼 멀쩡해졌다.

그냥 행사에 참여해도 될 것 같았지만, 분위기상 내가 빠지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진짜 괜찮아? 병원 안 가도 되겠어?”

다만 나 때문에 행사에서 함께 빠져야 하는 수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 진짜 괜찮아.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아니야.”

수아가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는 덧붙였다.

“사실 나도 시답잖은 게임 그만하고 싶었어. 나는 되게 설렁설렁했는데, 너 진짜 열심히 하더라. 워크숍 와서 게임에 몰입하다가 쓰러지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다.”

미안해하는 나를 달래 주기 위해 말치레를 하는 착한 수아에게 어색한 미소를 머금으며 강당을 빠져나오고 있을 때였다.

“정담은 대리.”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민서후의 것이었다.

돌아서자 근심이 가득 고인 미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얼굴을 찡그리고 있음에도 잘생겨서 돌아가시겠다.

“네, 본부장님.”

“정 힘들면 지금 바로 서울로 가요.”

“괜찮습니다. 방에서 좀 쉬고 나면 금방 회복할 거예요.”

수아가 내 등허리를 슬쩍 찌르는 게 느껴졌다.

얜 또 왜 이래?

나는 순간 간지러워서 상체를 조금 비틀었다.

그 모습을 마주한 그의 잘생긴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핏기가 싹 가셨다.

“괜찮습니까?”

성큼 다가온 그가 금방이라도 나를 안아 들 것처럼 팔을 뻗었다.

“괜찮아요! 완전 괜찮습니다!”

나는 저지하듯 두 손을 올려 보이고는 수아에게 뭐 하는 짓이냐고 눈치를 주었다.

“수아 대리, 혹시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 줘요.”

그가 심각한 업무 지시라도 하는 것처럼 엄혹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담은 대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꼭 본부장님께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수아가 빙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얘 진짜 왜 이래?

민서후는 어서 가 보라며 손짓했고, 나와 수아가 먼저 돌아섰다.

걷는 동안 수아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차마 돌아보지 못하고 모른 척 정면만 응시했다.

숙소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수아가 음흉하게 웃었다.

나는 이제 숙소에서 뭘 해야 하나 싶어서 고민을 시작한 참이었다.

“으흐흐흐흐흐.”

유수아가 능글거리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침대에 걸터앉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아, 왜?”

나는 옆으로 몸을 물리며 하이에나처럼 눈을 희번덕거리는 수아를 향해 미간을 구겼다.

“정담은, 너어!”

“나, 뭐.”

“민서후 본부장이라앙.”

시치미를 뚝 뗐어야 했는데, 나는 입을 떡 벌린 채 놀라고 말았다.

“맞나 보네! 세상에! 진짜로? 민서후랑 정담은이? 왕자랑 공주가?”

나는 손을 뻗어서 무엄하게 나불거리는 수아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들 강당에 있어서 옆방에 들을 사람은 없겠지만, 수아의 목소리가 커도 너무 커서 민망해졌다.

“조용히 해! 나랑 민서후 본부장님이랑 뭐?”

입막음을 시도한 것인데, 수아가 더럽게 내 손바닥 위로 혀를 날름거렸다.

“으, 더럽게!”

경악스럽다는 듯이 손을 떼자, 입이 자유로워진 유수아가 마음껏 떠들기 시작했다.

“그래, 생각해 보면 둘 다 요즘 들어서 분위기가 좀 바뀌긴 했어? 그치? 막 좋은 일 있는 것처럼.”

“각자 좋은 일이 있었던 거지, 뭐.”

나는 수아의 시선을 피하며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그랬구나. 정담은이랑 민서후랑 각자 좋은 일이 있는 거구나. 근데 민서후는 왜 쓰러진 너를 보고 사색이 되는 걸까?”

“그거야 부서원이 쓰러졌으니까.”

수아는 음흉한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로 대꾸했다.

“그랬구나. 우리 민서후 본부장은 그냥 부서원이 걱정돼서 그런 거구나. 현욱 씨도 내 걱정 되게 많이 해. 그냥 동기로서.”

동성 친구와 이성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청춘 드라마 속에서나 가능한 거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민서후 본부장 찬성이야.”

“뭐가 찬성이라는 거야?”

“완전 찬성이라고! 민서후 본부장!”

수아와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묘하게 들떴다.

민서후를 대할 때 연애 감정 때문에 심장이 뛰는 것과는 다른 떨림이었다.

“언제는 사내 연애는 함부로 하는 거 아니라며?”

“그거야, 네가 강재만 같은 양아치랑 사귈까 봐 그랬던 거지. 민서후 본부장은 진짜 완전 찬성이라구.”

수아가 내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는 음흉하게 물었다.

“민서후 본부장님이 잘해 줘? 어때? 우리 순진한 담은이 눈에 눈물 나게 하면, 일개 대리인 내가 본부장을 혼낼 수도 없고. 어떡하지?”

“너는 그럼 현욱 씨가 잘해 줘? 나는 동기니까 현욱 씨 혼낼 수 있겠다! 그치?”

되물은 말에 수아가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껌뻑 죽어. 지금 내가 한껏 튕기는 중이라. 아주 죽으려고 해.”

아무래도 수아에게서 밀당의 기술을 배워야 할 것 같다.

저녁이 다 될 때까지 우리는 시시콜콜한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냈다.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상대와 태어나서 처음으로 허물없는 대화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정말 지난 인생을 헛살았던 거다!

두서없고 주제 없는 수다는 비효율적이라고 치부했던 삶을 살았었으니, 내 삶은 얼마나 퍽퍽했던 것일까?

우리는 저녁 식사를 하고 온 이후에도 며칠 지나면 생각도 나지 않을 화젯거리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눴다.

“어? 나 현욱 씨한테 전화 온다. 잠깐만!”

수아가 현욱과 통화해야 한다며 숙소 밖으로 나가 버렸고, 그 틈을 타 무료해진 나는 민서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 역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는 중일 것이다.

[뭐 해요?]

메시지를 보내기가 무섭게 전화가 걸려왔다.

- 괜찮아?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 빈혈이 있는 줄은 몰랐네. 약은 먹었어?

거짓말한 게 찔리기는 했지만, 이보다 더 적당히 얼버무릴 말이 없었다.

“먹었어요. 이제 정말 괜찮아요. 뭐 하고 있었어요?”

- 저녁 먹고 쉬고 있었지.

“보고 싶다.”

속으로만 생각하려고 했는데, 수다로 예열된 탓인지 솔직한 마음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 뭐라고?

신호가 불안정해서 못 들었는지 그가 되물었다.

“보고 싶다고요.”

- 이따 밤에 잠깐 볼까?

심장이 쿵쿵 울렸다.

“좋아요.”

휴대전화 너머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누가 내 귀에 또 카푸치노를 쏟은 기분이다.

짧은 통화를 마치자마자, 수아가 방으로 돌아왔다.

“어휴. 기지국 문젠가? 전화가 자꾸 끊기네. 신호도 잘 안 잡히고.”

현욱과의 통화가 원활치 않았는지 수아가 불평을 해댔다.

신호가 끊긴다……?

갑작스러운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죽었다가 깨어난 나의 삶에도 신호가 끊기는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자꾸 아무 이유 없이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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