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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17/89)
  • 다른 남자와 결혼해

    17화

    연적이 생길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민서후는 스스로 밝혔듯이 연애와는 담을 쌓고 살았던 남자다.

    5년 후 죽을 때까지 홀로 지냈다는 게 그 증거다.

    잠깐만?

    결혼을 안 했다는 게 연애를 하지 않았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닐 텐데?

    갑자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본부장실에 들어가 있는 여자에 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이럴 땐 쓸데없이 모든 것을 기억하는 선준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혹시 손은지라고 알아?]

    [손은지? 들어 본 이름인데.]

    선준은 연달아 메시지를 보내왔다.

    [아! 민서후 전 여친?]

    나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되어서 멍하니 휴대전화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연구소 폭발 사고 있고 나서, 아마 장례식 때 뒷수습했던 사람이었을 거임. 전 여친인지는 확실치 않음.]

    만약 그에게 연인이 있었다면 나는 그녀의 남자를 빼앗는 꼴이 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나쁜 짓은 하고 싶지 않은데.

    [그딴 거 신경 쓰지 말고 본인 일에 최선을 다하길 바람.]

    선준이 내 속을 꿰뚫듯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는 본부장실을 나서는 여자를 응시했다.

    선이 가느다란 미인이었다. 속쌍꺼풀 진 눈과 우뚝한 콧날이 어쩐지 그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것도 같았다.

    인연이 있는 사람은 서로를 닮는다고들 한다.

    “둘이 참 그림체가 비슷해.”

    수아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야?”

    나는 수아에게 고개를 돌리며 시큰둥한 목소리로 물었다.

    “반 고흐가 그린 그림이랑, 피카소가 그린 그림은 느낌이 다르잖아? 그렇게 따지면 저 둘은 그림체가 같아. 같은 화가가 그린 것처럼 잘 어울려.”

    애석하게도 나 역시 수아와 생각이 같았다.

    길쭉길쭉한 팔다리와 선이 가느다란 생김새가 묘하게 비슷했다.

    “퇴근합시다. 저는 먼저 들어갑니다.”

    그가 본부장실에서 나와 유유히 사무실을 나가는 모습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뜻 모를 불안감이 자꾸만 엄습했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정 앞에서 심장은 무겁게 두근거렸다.

    지하 주차장, 그가 알려 준 구역으로 향하자 어느새 익숙해진 그의 차가 눈에 들어왔다.

    시무룩한 기분을 감추기 위해 애쓰며 조수석에 오르자, 익숙한 숲 향기에 마음이 조금 평온해졌다.

    “얼굴이 왜 그래?”

    그가 차를 출발시키며 조수석을 흘끗거렸다.

    “내 얼굴이 왜요?”

    아무렇지 않게 되물었다.

    “나 나오고 나서, 사무실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니요.”

    일은 그쪽이 나가기 전에 있었죠.

    숨기지 못한 한숨이 불거져 나왔다.

    “왜 그래. 어디 아파?”

    그가 손을 뻗어서 내 이마를 짚었다.

    “누가 봐요.”

    나는 그의 손길을 피하려 상체를 차창에 바싹 붙였다.

    조용히 손을 거두는 그에게서 무안한 기색이 느껴졌다.

    분위기는 한껏 어색해지고 있었다.

    차는 금세 사옥 지하 주차장을 벗어나 양재대로를 천천히 달렸다.

    “저녁으로 먹고 싶은 건?”

    “매일 저랑 데이트해도 돼요? 할머님은요?”

    나는 그의 다정한 물음에 엉뚱한 질문으로 답하며 시선을 창밖에 두었다.

    그는 대꾸 없이 차를 몰았다.

    얼마간 달린 차가 멈춰 선 곳은 낯선 주택가의 노상 주차장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차를 세운 모양이었다.

    “정담은.”

    그가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렀다.

    가슴이 찡, 아파 왔다.

    “말해 봐. 무슨 일이야?”

    이런 식의 연애뿐만 아니라, 마음을 터놓은 인간관계조차 처음인 나는 밀당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이전의 삶과 상관없이 싸가지 없는 고3으로 돌아온 선준처럼, 나는 인생 경험 부족한 얼뜨기일 뿐이었다.

    “아까 그 여자분이요. 누구예요?”

    나는 그에게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묻고 있었다.

    “그 여자분이라니? 누구?”

    “손은지 씨요.”

    고개를 드니 그가 잠시 멍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매혹적인 입가에는 웃음기가 고일락 말락 했다.

    “은지.”

    그가 여자의 이름은 친근하게 불렀다.

    “은지는 입사 동기야. 대학 후배이기도 하고.”

    이제껏 단 한 번도 그는 나를 ‘담은아’라고 불렀던 적이 없었다.

    비교 질을 시작하니, 밑도 끝도 없는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그건 알아요.”

    “그럼?”

    그의 물음에서 웃음기가 묻어났다.

    “그런 공식적인 관계 말고요. 비공식적인 거요.”

    “비공식적인 거?”

    못 알아듣는 게 아니면서 되묻는 모양새가 얄미웠다.

    “둘이 전에 사귀었었다고 그러던데요?”

    “허.”

    그가 실소했다. 내 심장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했고.

    “우리 공주 질투해?”

    웃음기 섞인 질문에 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니거든요! 나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입술이 맞닿았다. 벌어진 입안으로 두꺼운 혀가 밀려들었다.

    목덜미를 커다란 손이 덮었다.

    긴장감이 몰려 있던 목과 어깨를 그가 손으로 천천히 주무르며, 키스를 이어 갔다.

    “으음.”

    야속하게도 본능을 이기지 못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맞닿은 그의 입술에서 웃음기가 느껴졌다.

    고개를 비틀어 입술을 떼려고 했지만, 목덜미를 붙잡힌 탓에 그럴 수도 없었다.

    그가 입술을 맞붙인 채로 속삭였다.

    “너 정말 큰일이다. 이렇게 예뻐서 어떡할래?”

    그는 내 입술에 자잘하게 입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너는 강재만 그놈이랑 정말 아무 사이도 아냐?”

    그놈이랑 이번 삶에서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다.

    “아닌데요.”

    “그럼 왜 자꾸 나타나, 그놈은? 짜증 나게.”

    웃음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으르렁거리며 내뱉은 말에는 질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 왕자, 질투해요?”

    나는 그가 했던 말을 똑같이 따라 하며 물었다.

    “어, 해. 그것도 아주 많이. 그리고 손은지는 그냥 후배고 동기야. 연애 같은 거 한 적 없어.”

    목덜미를 주무르던 그의 손이 등허리를 타고 내려갔다.

    입술이 아까보다 더 깊게 맞물렸다. 그는 내 입안을 벗겨 낼 듯이 핥고 빨았다. 혀가 닿지 않은 곳이 없었고, 쉴 새 없이 달콤한 타액을 나눠 마셨다.

    목이 뻐근하고, 숨을 내뱉기가 힘들 만큼 진한 키스가 오래도록 이어졌다.

    ***

    “자, 이제 10분 후면 리조트 담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다들 두고 내리는 물건 없도록 주의 바랍니다.”

    45인승 버스 안에 민서후의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리조트 담이라는 말에 나는 잠시 평상심을 잃을 뻔했다.

    내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내 이름을 따서 지은 리조트의 이름이었다.

    연꽃 봉우리 담(萏)에 은혜 은(㤙), 내 이름은 연꽃이 피는 계절에 찾아온 은혜로운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으짜짜.”

    요란하게 기지개를 켠 수아가 졸음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정담은이 워크숍을 다 오고?”

    “왜 그게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너 사무실 붙박이였잖아. 워크숍, 체육대회, 창립기념일 행사, 전부 사무실 지킴이였잖아.”

    그동안 나는 부서 안에서 이리저리 떠밀리는 자잘한 업무를 도맡는 조건으로 모든 행사에서 빠졌었다.

    “예전에 기획 1팀에 있을 때는 그랬잖아. 근데 여기 사업본부로 와서는 밥도 같이 먹고, 회식도 오고, 워크숍도 오고.”

    수아가 이전과 달라진 나의 특이점을 손으로 꼽아 댔다.

    “그래서 싫어?”

    “아니, 좋다고.”

    딸 셋 중에 막내로 자랐다는 수아는 애교가 많은 편이었다.

    내 팔에 팔짱을 끼며 수아가 배시시 웃었다.

    어느새 버스는 리조트 주차장에 도착해 있었다.

    “배정된 숙소에 들어가서 짐 풀고, 식사는 별관 2층 식당에서 하시면 됩니다. 식사 마치고, 오후 1시 반까지 별관 7층 강당으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사업본부가 생기고 처음 이루어지는 워크숍이었다.

    친한 직원들은 방 배정에서 떨어뜨려 놓는다고 했지만, 본부장인 그의 배려였는지 수아와 나는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와! 우리 같은 방이다!”

    수아는 마치 수학여행 온 고등학생처럼 좋아했다.

    “그렇게 좋아? 워크숍인데? 우리 계속 일 얘기 해야 하잖아.”

    “얘가 또 워크숍 처음이라 뭘 모르네. 일 얘기는 잠깐이고, 팀웍 도모가 주목적이란다.”

    수아의 말마따나 업무 효율성을 높이는 교육이 잠시 진행되었을 뿐, 나머지 시간은 전부 팀웍을 다지는 데 활용되었다.

    SNS에서 꽤 인기를 끌고 있다는 레크레이션 강사까지 동원되어서 온갖 게임이 진행되었다.

    안타깝게도 나와 그는 다른 조에 속했고, 서로 말을 섞어 볼 기회조차 없었다.

    1박 2일을 한 공간에서 보내는데, 평상시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기분이 들었다.

    “자, 이번 순서는 바닥에 깔린 카드를 뒤집는 게임입니다. 1, 2조는 청팀! 3, 4조는 백팀으로 하겠습니다. 바닥에는 지금 청색 카드 50장과 백색 카드 50장이 깔려 있습니다. 뒤집으면 색이 바뀌는 카드고요. 앞으로 2분! 더 많은 팀 색을 확보하는 팀이 승리합니다!”

    게임 막바지, 전세를 역전할 수도 있을 만큼 큰 점수가 걸린 게임에 다들 혈안이 되었다.

    “자! 시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업본부 인원 전체가 강당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청팀인 나는 백색 카드를 청색으로 뒤집는 데 여념이 없었다.

    내가 이렇게 승부욕이 엄청난 인간이었나, 싶을 정도로 게임에 몰입해 버리고 말았다.

    저 앞에 보이는 카드를 뒤집으려고 달려간 순간이었다.

    누군가와 세게 부딪쳤고 몸이 옆으로 휙 고꾸라졌다.

    이러다 여기서 죽겠는데? 싶은 생각이 들 만큼 거센 충돌이었다.

    “담은 대리!”

    수아의 비명이 들려왔다.

    “어떡해! 쓰러졌나 봐!”

    “누구? 정담은 대리?”

    웅성거리는 소음이 어지럽게 뒤섞이는 가운데, 숲 향기가 물씬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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