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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16/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16화

“우리 공주님은 뭘 좋아합니까?”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물었다.

미간을 슬쩍 구기고 있는 그를 멀리서 본다면, 심각한 업무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다 좋아요.”

거짓말이다. 입도 짧고 음식도 가리는 게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죽었다가 살아나서 나에게 생긴 것은 무모한 도전 정신이었다.

무엇이든 시도해 보고 싶은 의지가 내 안에서 용솟음쳤다.

“정말?”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공주님답지 않게 소탈하십니다.”

“제발 그 호칭은 좀!”

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멀리서 본다면 아마 나도 심각한 업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왜, 잘 어울리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불만스럽다는 듯이 물은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쁘고, 착하고, 순수한 동화 속 공주처럼 생겼어.”

이걸 고백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고민할 새도 없이 입꼬리가 실룩거리기 시작했다.

예쁘고, 착하고, 순수한 동화 속 공주처럼 생겼다고, 흡입력 좋은 왕자님이 말하고 있었다.

“본부장님도 왕자님 같아요.”

그 역시 간지러운 기분을 느껴 보라고 되받아쳤다.

그런데 민서후가 서늘한 얼굴로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익숙해. 그런 호칭.”

뻔뻔하게 내뱉고는, 본인도 못 참겠는지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계속 왕자님이라고 불러 드릴게요.”

“죽겠네, 진짜.”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왜 죽겠다는 거냐고, 의문을 표하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동화 속 왕자 특기가 뭔지 알아?”

모르겠다며 시치미를 뚝 잡아뗐다.

그러자 그가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는 메시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손에 쥔 휴대전화가 내 심장처럼 바르르 떨렸다.

[키스……. 하고 싶어.]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메시지를 입력했다.

[이따 퇴근하고요.]

나의 답변을 확인한 그가 목을 흠, 가다듬고는 웃음을 참는 듯 입술 끝에 힘을 주었다.

이런 게 연애구나!

나는 정말이지, 이전의 인생을 헛살았던 거였다!

회사 근처 식당에 관해 아는 게 없던 나는 그가 이끄는 곳으로 말없이 따라갔다.

평범한 백반이 나오는 한식당이었다.

성게 알을 넣고 끓인 미역국과 흑미밥, 아삭한 배추겉절이와 달콤한 불고기, 된장에 버무린 오이고추와 양파 장아찌가 오늘의 상차림이라고 종업원이 설명해 주고 갔다.

“나도 집밥 생각날 때 가끔 오는 곳이야. 간이 세지 않고, 맛있어. 바깥 음식 먹으면 속이 부대낀다며?”

점심 제안을 거절하기 위해 해 왔던 변명을 그도 알고 있었다.

“항상 집에서 싸 온 도시락으로 점심 먹던데…….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

내가 도시락을 싸 와서 먹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내가 도시락 먹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그는 대꾸 없이 웃기만 했다.

나는 심장 떨리는 그의 미소를 바라보며, 테이블 옆을 더듬거렸다.

수저가 들어 있는 서랍을 찾기 위해서였다.

“여긴 식사 나올 때 수저가 같이 나와. 거기 없어.”

두근거리던 심장이 바닥에 쿵 떨어졌다가 다시금 높이 치솟았다.

“기억하세요? 제가 수저 안 놔서 한소리 들었던 거?”

두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는 연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거 되게 오래된 일인데…….”

“오래됐어도, 다 기억하지. 공주님이 내 앞에 앉아 있었는데…….”

묻고 싶은 말이 머릿속에서 봇물 터지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럼 언제부터…….”

말을 채 잇기도 전에 그가 대답했다.

“처음 사업부 설명회에서 봤을 때부터?”

그가 검고 맑은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대꾸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날뛰어 댔다.

우리는 아마도 멀리서 서로를 짝사랑하고 있었나 보다.

하지만 워낙 조심성이 많았던 소심쟁이 정담은은 그동안 티를 내지 않았고, 연애와는 담을 쌓고 살았던 그는 나를 무심히 대했었다.

서로서로 신경 쓰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전혀 몰랐어요. 저 혼자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나 혼자 그러는 줄 알았지.”

그의 진중한 눈이 그리움으로 넘실거렸다.

마주 앉아 있는데도, 나를 그리워하는 사람처럼 애틋한 눈빛이었다.

그의 따스한 눈빛은 나에게 보상과도 같았다.

외롭고 고단했던 삶에 대한 보상.

누군가 나를 그리워한다는 사실 자체로 가슴이 따뜻해졌다.

눈물이 핑 돌았다.

“울라고 한 이야기 아냐.”

나는 눈물을 머금은 채로 웃었다.

이번 생에 바라는 것이 단 한 가지로 축약되었다.

이 남자의 애틋한 눈빛은 언제나 나를 향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

[지하 1층 주차장에 차 있는데, 거기로 내려와.]

[누가 보면 어떡해요?]

요 며칠 나는 사내 비밀 연애를 즐기는 데 여념이 없었다.

출퇴근길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했다던 그는 며칠 전부터 차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의 차를 타고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며 데이트를 즐겼다.

[앞에서 대놓고 하는 게 오히려 티 안 나.]

몰랐는데, 민서후는 제법 뻔뻔한 성격이었다.

“야, 우리 본부장님 요즘 좀 이상하지 않아?”

수아가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불쑥 내밀며 물었다.

“뭐가 이상해?”

그리고 나는 포커페이스가 제법 잘 되는 편이었다.

“아니, 웃는 얼굴 보는 게 힘들었던 사람이잖아! 그런데 종일 웃는 낯이야. 혹시 연애하나?”

떠보는 건지,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건지 모르겠다.

“모르겠네, 나는.”

관심 없는 척 휴대전화를 살폈다.

“너는?”

수아가 이번에는 화살을 내게로 돌렸다.

“나, 뭐?”

“너 핸드폰 되게 자주 보잖아. 거기 뭐 보물이라도 숨겨놨어?”

수아가 나와 민서후를 연관 짓지는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와 민서후 각자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감지하고는 있었다.

“너는 현욱 씨랑 무슨 사이야?”

이번에는 내가 수아에게 화살을 날렸다.

“썸 타는 사이?”

수아가 너무도 쉽게 대답했다.

장난스럽게 눈동자를 한 바퀴 굴린 수아가 목소리를 낮추고 키득거렸다.

“언제부터?”

“꽤 됐어. 한 6개월?”

“유욱개워얼?”

무려 지난 6개월 동안 가장 친한 동기인 수아가 썸을 타고 있었다는 데도 정담은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긴 점심도 같이 안 먹고, 카페도 같이 안 가고, 회식 자리에는 늘 빠졌으니 알 턱이 있나.

“왜 그렇게 질질 끌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자 수아가 의자를 돌돌 끌어와서는 내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 공주가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것 같구나. 사내 연애,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끝이 안 좋으면 X 되거든.”

수아는 거침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 나이 겨우 스물여섯이잖아? 결혼을 생각하기엔 너무 이르지. 근데 연애하다가 회사에서 누군가에게 들켰어. 그러다 헤어지면? 연애했다는 소문은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닐 텐데, 굳이 그런 역사를 만들 필요가 없지.”

“아아.”

나는 알아들었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는 누구야?”

“나, 뭐?”

맹한 척하기로 하자.

“시치미는? 너 거짓말 더럽게 못하거든? 누구야? 너 연애하지?”

“그냥…… 좋은 사람.”

눈앞에서 휴대전화가 바르르 떨렸다.

찰나 휴대전화 위에 ‘민서후 본부장’ 여섯 글자가 뜰까 봐 심장이 곤두박질쳤다.

그런데 뜻밖에도 메시지를 보내온 사람은 선준이었다.

“문선준?”

수아가 흥미롭다는 듯이 이름을 읊조렸다.

“사촌 동생.”

“아, 그 일곱 살 연하남?”

하찮다는 듯이 되물은 수아는 금세 자리로 돌아갔다.

며칠 잠잠하다 싶었던 선준이 연달아 메시지를 보내왔다.

[잘 지냄?]

[어떻게 연락 한 번 없음?]

나는 짧은 답을 보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하길 바람.]

그러자 선준이 경고의 메시지를 날렸다.

[그때 그 민서후랑은 잘돼 가는 거 맞음? 강재만 기사 터뜨리고 잠잠한 거 보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 조심하길 바람. 빨리빨리! 퀵하게! 얼른 민서후랑 뭐라도 하란 말이야!]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누나 연애한다. 민서후랑.]

[연애를 왜 함? 결혼을 하라니까!]

정말이지, 이전 삶에서 딱 하나 그리운 것이 있다면, 건실하고 예의 바른 비서실장 문선준이었다.

[일에도 순서가 있지. 공부해라, 고3. 수능이 코앞이다. 누나 혼사에는 인제 그만 신경 끄고. 알아서 할 테니까.]

휴대전화를 책상 위에 내려놨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정담은 대리님.”

강재만이 낮은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인사를 건넸다. 나는 대놓고 미간을 구기며 고개만 까딱했다.

“오후 업무 힘들죠? 이거 먹고 힘내요.”

강재만이 책상 위에 망고 주스 한 잔을 내려놓았다.

“죄송해요. 제가 망고 알레르기가 있어서요.”

나는 차갑게 선을 긋듯이 읊조리고는 PC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아니, 그때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망고라고…….”

“제가요? 설마요. 다른 여자랑 헷갈리시는 거 아니고요?”

내가 망고를 좋아하기는 한다.

강재만은 당황스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이년 봐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새끼가? 나도 욕할 줄 알거든!

눈을 부릅뜨며 썩 꺼지라는 표정을 머금는 사이, 김 과장이 다가와 망고 주스를 냉큼 집어 들었다.

“이야. 맛있네. 근데 날씨도 쌀쌀한데 이렇게 차가운 주스를 사 들고 왔어? 센스 없이! 따뜻한 걸 사 오지. 우리 정 대리는 단 거 좋아해. 핫초코, 그런 거. 그리고 이런 거 사 들고 올 거면 여러 개 들고 와라. 치사하게 하나를 사 오냐. 아닌가? 여러 잔 사서 여직원들 자리 순회하는 건가?”

김 과장이 뼈 있는 말을 내뱉고는 능글맞게 웃었다.

“강 과장, 나랑 담배나 한 대 피우자.”

오늘따라 여기저기 참견하기 좋아하는 김 과장이 고맙기까지 하다.

무안을 당하면 자존심이 상해서 죽으려고 하는 강재만이었다.

지랄맞은 심기가 상했으니, 당분간 이 사무실에는 얼씬거리지 않을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강재만이 사라지고 나서 두어 시간쯤 지났을 때, 수아가 또다시 의자를 돌돌 끌고 다가왔다.

“맞네. 저 사람이네! 그래서 본부장님 표정이 밝아졌나 보다.”

나는 수아의 시선을 따라 본부장실로 시선을 옮겼다.

본부장실 안에는 회색 오피스 슈트를 입은 시크한 분위기의 웬 여자가 들어가 있었다.

“누군데?”

궁금해 죽겠지만, 무심한 척 물었다.

“아마 본부장님 입사 동기일걸? 이름이 뭐였더라? 어! 손은지! 나이는 본부장님보다 두 살 어린데, 대학 후배일 거야. 예전에 둘이 사귀었었다고 소문났던 거 같기도 하고. 둘이 다시 만나나.”

수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는 자리로 홀연히 돌아갔다.

연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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