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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15/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15화

올 것이 왔다.

26년 평생 부모가 하는 말이라면 하늘처럼 주워섬겼던 내가 당당히 외박이란 것을 하고 귀가한 것이다!

아침 일찍 집으로 귀가하는 불량한 26세, 정담은.

철없이 멋지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우쭐해지려고 했다.

좋아, 이 기분 그대로 밀고 나가자!

휴대전화에 불이 날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집에서는 단 한 통의 전화도 걸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집 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매우 평화로웠다.

저승사자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린 구 실장이 씩씩거리며 침실로 따라 들어왔을 뿐이다.

“집 안이 왜 이렇게 조용해요?”

“대체 어디 있다가 지금 들어오시는 거예요? 걱정돼서 한숨도 못 잤잖아요!”

“아버지는요?”

구 실장은 어깨가 축 늘어지도록 한숨을 몰아쉬며 대꾸했다.

“남해로 2박 3일 라운딩 가셨어요. 어제 오후에 출발하셨고, 사모님도 동행하셨어요. 회장님은 지금쯤 새벽 라운딩 마치고 식사 중이실 거고, 사모님은 리조트 스파에 계실 겁니다.”

그러니까 이 집에서 내가 외박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는 거였다.

보람 없는 반항이었나?

나는 약간은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구 실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내가 외박한 거 아무도 몰라요?”

“당연하죠! 회장님이 아셨으면 아마 난리가 났을 겁니다! 대체 어디 계시다가 이렇게 늦게 오신 거예요!”

“늦게 오다뇨. 일찍 왔잖아요? 아침 일찍. 이것보다 어떻게 일찍 들어와요?”

구 실장이 내 등을 찰싹 소리가 나도록 내리쳤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등짝 스매싱’을 당한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살아 있음을 느꼈다!

“무슨 사고라도 당했을까 봐 한숨도 못 잤다고요! 대체 어디서 주무신 거예요?”

구 실장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애정 어린 걱정에 나도 덩달아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나는 팔을 뻗어서 구 실장의 푸근한 몸을 꼭 끌어안았다.

“구 실장님은 언제나 내 편이죠?”

등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구 실장이 대꾸했다.

“이제 편 안 들어 드립니다. 이러다 속이 새까맣게 타겠어요.”

앞으로 안 그러겠다는 약속은 할 수 없었다.

변화를 위해 갈등은 불가피한 것이니까.

“회장님이 모른 척하셔도 다 보고받으셨을 수도 있어요. 제발 조심하세요. 회장님 성격 아시잖아요. 조용하면 더 무서운 거.”

“알겠어요. 명심할게요.”

아버지가 어떻게 움직일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리고 이거, 강재만 씨가 보낸 것 같아요.”

침실 테이블 위에 붉은 장미꽃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버려 주세요.”

구 실장은 군말 없이 꽃바구니를 들고 나갔다.

장미꽃이 이렇게 역겨울 수 있는 꽃이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

“같이 가!”

점심을 먹으러 간다는 수아의 뒤를 얼른 따라붙었다.

“웬일이야? 점심은 꼭 따로 먹더니?”

“혼자 먹기 심심해서.”

“밖에서 점심 먹으면 속 부대껴서 싫다며? 꼭 집에서 싸 온 도시락만 먹었으면서.”

사실 속이 부대낀다는 말은 핑계였다.

착하게 살았다고는 했지만, 나는 있는 집에서 귀하게 자란 티를 숨기지 못했었다.

그릇된 우월의식이었고, 그로 인해 주변에 친한 친구 하나 두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특별한 혜택을 받고 태어났다고 착각하는 재벌가가 가지는 우월감 속에서 동맹과 우정은 거래를 통해 맺어졌다.

또 이윤이 맞닿지 않으면 배반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맹도 없었다.

단지 자본주의적 원칙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근데 너 뭐 좋은 일 있어?”

“응?”

수아의 질문에 나는 아무 일도 없다며 시치미를 뚝 뗐다.

“너 오늘 종일 기분 좋아 보여. 분위기도 좀 달라진 것 같고.”

“내가?”

나는 미소를 머금으며 되물었다.

“어. 너 이렇게 잘 웃지도 않았었어. 뭐야, 무슨 일인데? 우리 담은 공주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으실까?”

“담은 공주?”

미간을 팍 찡그리며 호칭을 지적했다.

“너 별명이 공주인 거 몰랐구나?”

표정 관리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아니, 기분 나쁘라고 한 소리 아니야. 워낙 예쁘게 생겼는데, 하는 짓도 막 조심스럽고 그러니까. 그래서 동기들끼리 잠깐 그렇게 불렀었어.”

수아는 대수롭지 않은 별명이라는 듯이 말했지만.

“내가 그렇게 재수 없었어?”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렇지가 못했다.

“재수 없기는. 너는 백설공주가 재수 없어?”

변명거리가 마땅치 않아서 불쌍한 백설공주를 끌어오는 것처럼 들렸다.

“아무튼, 기분 좋아 보여서 좋다고. 공주처럼 예쁘고 고급스러워 보여서 붙인 별명이라고. 기분 풀어. 응?”

수아가 나의 양 볼을 손가락으로 살짝 꼬집어서 옆으로 찍 늘리며 흔들어 댔다.

“아아.”

하나도 아프지 않은데, 아픈 시늉을 하고 있을 때였다.

“공주? 누가 공줍니까?”

목구멍에 걸린 사과가 톡 튀어나올 만큼 놀라운 키스 실력을 갖춘 왕자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릴 때는 왕자님의 키스로 백설공주가 사과를 뱉어 낸 스토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알 것 같았다.

해답은 흡입력이었다!

백설공주에 등장하는 왕자님은 분명 막강한 흡입력을 자랑하는 키스 실력을 갖춘 놈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목구멍에 걸린 사과도 뽑아냈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꾸하고는 엘리베이터를 응시했다.

수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쿡쿡 웃고 있었다.

“점심 먹으러 가요?”

민서후의 이어진 질문에 수아가 냉큼 대꾸했다.

“네, 본부장님은 운동 가세요?”

그가 점심시간에 몸 관리를 한다는 것은 본부 전체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아니요. 점심 먹으려고.”

“그래요? 같이 가실래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을 수아가 대신해 주었다.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안 될 게 뭐 있어요?”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세 사람이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근데 저희 동기 한 명 더 올 거거든요. 괜찮으시죠?”

수아의 질문에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 층 아래에서 멈춰 선 엘리베이터에 직원들이 우르르 올라탔다.

내 왼쪽에는 수아가, 오른쪽에는 민서후가 자리했다.

그리고 우리 셋은 밀려들어 온 인파 때문에 엘리베이터 뒷벽에 붙어 서야만 했다.

“웬일이야? 오늘 너도 그렇고, 본부장님도 그렇고?”

수아가 귓속말을 건네 옴과 동시에 오른손에서 은밀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가 새끼와 약지를 조심스럽게 얽고 있었다.

나는 수아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목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손가락이 하나씩 빈틈없이 맞물렸다.

엘리베이터에는 정웅그룹 소속 직원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게다가 왼쪽에서는 수아가 쉴 새 없이 어떤 메뉴를 먹으면 좋을지 떠들어 댔다.

두 뺨이 시시각각 달아올랐다.

시선을 살짝 옮겨서 그를 흘끗 올려다보았다.

그는 정면을 응시한 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관능적으로 손바닥을 마주 비비고 있으면서도 흔들림 없이 평온한 얼굴이었다.

단지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람들 몰래 손깍지를 끼고 있을 뿐이라서?

그런데 나는 대단히도 불순한 일을 저지른 것처럼 심장이 날뛰었다.

엘리베이터는 느리게 움직였지만, 호흡은 점점 가빠지고 있었다.

“정담은 대리.”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어디 불편합니까?”

아무렇지 않은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그가 얄미웠다.

얄미운데, 멋있어서 죽을 맛이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시치미를 뚝 뗀 그의 물음을 되받아치듯 물었다.

“제가 불편해 보였나요?”

대답은 수아에게서 흘러나왔다.

“어? 담은 대리. 열나?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갛지?”

수아의 손이 내 이마에 닿았다.

“이마는 미지근한데, 숨도 가쁘게 쉬고.”

“아니야. 나 아무렇지도 않은데?”

동기를 향해 대답을 내뱉은 순간, 그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숨을 멈췄다.

하마터면 신음을 흘릴 뻔했다.

“진짜 괜찮은 거야?”

수아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응, 괜찮아.”

나는 어금니를 꾹 문 채로 읊조리며 그에게서 손을 빼내려고 애썼다.

그런데 그는 쉽게 놔줄 생각이 없다는 듯이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엘리베이터가 빨리 로비 층에 닿기를 바랐다.

아니, 커다란 손은 놓지 않고도 싶고…….

공공장소에서 느끼는 낯설고 불온한 감각은 지나치게 매혹적이었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만원 엘리베이터가 로비 층에서 멈춘 순간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아쉬워서 죽을 것 같았다.

“어, 수아 대리! 여기!”

수아를 알은체하는 사람은 동기 중에서도 꽤 훈남 축에 속하는 인물, 현욱이었다.

현욱은 뒤따르는 나와 민서후를 발견하고는 어색하게 표정을 바꿨다. 혹을 달고 나와서 달갑지 않은 눈치였다.

“안녕하십니까, 본부장님.”

“아, 선약이 있었나 보네요. 수아 대리?”

그가 현욱에게 시선을 둔 채로 수아에게 물었다.

“선약까지는 아니고요. 제가 현욱 대리한테 밥을 한번 사기로 해서요.”

“그럼, 용건 있는 사람끼리 식사해요. 우리는 따로 할 테니까.”

사회생활 만랩 민서후가 세련된 어조로 편을 갈랐다.

“그러시죠, 본부장님! 식사 맛있게 하세요.”

어느새 표정이 확 밝아진 현욱이 수아를 데리고 총총 걸음을 옮겼다.

“우리도 용건 있는 사람끼리 밥 먹을까요, 공주님?”

시치미를 뚝 떼고 묻는 그의 미소는 찬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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