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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14/89)
  • 다른 남자와 결혼해

    14화

    여전히 이 모든 게 꿈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면, 짓궂은 저승사자가 할머니의 모습을 빌려서 장난을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했을 것이다.

    격렬했던 키스와 함께 그의 단단한 가슴근육에서 느껴지던 자제력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머릿속은 붉게 물들고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뛰는 가운데, 나는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침실로 내몰렸다.

    “언니 도망 못 가게! 꼭 붙들고 있어! 등신같이 마누라 뺏기지 말고!”

    쾅 소리가 나도록 침실 문이 닫혔다.

    당황한 그가 먼저 팔을 풀었고, 나는 어정쩡하게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그러니까.”

    그가 흐트러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할머니한테 큰 오빠가 있었는데, 새언니가 어린 나이에 할머니 댁으로 시집을 왔대. 딸처럼 키우다가, 나이가 차고 나서야 혼례를 치렀다고 했어. 근데 그사이 그분이 잠깐 한눈을 팔았었나 봐.”

    “그래서요?”

    지금 여기서 할머니의 큰오빠 부부 결혼 이야기에 호기심이 동하는 나도 참 대단한 인간이다.

    “근데 뭐 결국은 3남 3녀를 낳으시고 잘 사셨어. 첫째가 아버지를 안 닮았다는 소문이 파다하기는 했지만.”

    저런 이야기를 덤덤하게 하는 민서후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할머니가 그때 기억이 나셨나 봐.”

    “아, 네.”

    멀뚱히 서서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덧붙였다.

    “할머니에 관해 잘 아시네요.”

    나는 부모님의 연애사조차 몰랐다. 그런데 그는 할머니의 큰오빠 결혼사까지 알고 있었다.

    “어릴 때 할머니가 옛날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거든.”

    다정한 할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서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간식을 먹으며 옛날이야기에 귀 기울였을 어린 민서후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좀 이따 나가자. 할머니 금방 잊으실 거야.”

    애써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이 어쩐지 슬퍼 보였다.

    “언제부터, 그러셨어요?”

    보통의 가족을 부양하는 것도 힘든 일일 텐데, 그가 언제부터 홀로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모셨는지 궁금해졌다.

    아니, 나는 그에 관한 모든 것이 궁금했다.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건 3년 전쯤……. 총기가 남다른 분이셨는데, 자꾸 깜빡깜빡하시더라고.”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 손에 자란 그에게 할머니는 무척 소중한 존재일 것이다.

    “그러다 나를 자꾸 할아버지로 착각하시기 시작했고.”

    엘리베이터에서의 통화가 생각났다.

    “아, 그때 그 엘리베이터에서…….”

    “응, 맞아. 가끔 그렇게 나를 할아버지로 착각하고 전화하셔.”

    나는 안타까운 미소를 머금으며 대꾸했다.

    “저는 본부장님이 도둑 결혼이라도 하신 줄 알았어요.”

    무거워진 분위기를 다독이고자 한 말이었는데, 소용이 없었다.

    묵직한 공기가 주변을 에워쌌다.

    솔직한 질문을 건네기에 알맞은 타이밍이었다.

    “그래서 연애 같은 거 안 하신다고 하신 거죠?”

    그는 나를 진중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기만 했다.

    “만약, 제가 다 감당할 수 있다면요?”

    그가 내 앞에 마주 섰다.

    처음엔 한풀이에서 시작한 충동적인 고백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끔찍한 미래를 바꾸는 일과 상관없이 그가 좋다.

    그의 손이 또다시 내 머리카락에 닿았다.

    기다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는 그는 또다시 머뭇거리는 중이었다.

    “귀한 집 딸, 고생시키고 싶지 않은데.”

    “되게 멀리 가시네요.”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간절한 것을 눈앞에 두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이다.

    “연애하자는 건데, 고생은 무슨.”

    당장 결혼하자는 것도 아니고.

    뒷말을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가 부드러운 웃음소리를 냈다.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던 손이 달아오른 뺨으로 옮겨붙었다.

    “너는 내가 왜 좋을까.”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본부장님은, 좋은 사람이니까요.”

    미간을 살짝 찡그린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면…… 너 같은 여자를 욕심내면 안 돼.”

    “제가 욕심나세요?”

    그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욱 가까이 있었다.

    “저 같은 여자가 어떤 여자인데요?”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한 곳에서 그가 대꾸했다.

    “너무 순수해서 내가 더럽히는 느낌이 드는 여자.”

    “저 안 순수해요! 머릿속이 얼마나 더러운데요! 완전 쓰레기야! 시도 때도 없이 야한 생각을 한다니까요?”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고, 나는 두서없이 지껄인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어서 잠시 넋이 나갔다.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러니까…….”

    그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기울었다. 그러고는 매혹적인 입술이 내 입술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입술을 쭉 빨아 문 그가 치아를 세워서 살근살근 깨물었다.

    “으음.”

    그의 두꺼운 팔뚝을 움켜잡느라 핸드백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커다란 손이 얼굴을 완전히 감쌌다. 손바닥이 귀를 덮었고, 기다란 손가락은 뒤통수까지 닿았다.

    굵직한 엄지로 뺨을 애틋하게 어루만질 때마다 숨이 벅차올랐다.

    나는 그의 팔뚝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뻗어서 단단한 상체를 당겨 안았다.

    거대한 몸이 이끌리듯 다가왔고, 나는 포근한 숲에 갇힌 듯 몸을 묻었다.

    미래를 향한 불안한 행적을 바꾸기 위해 골머리를 썩이는 일은 잠시 내팽개칠 수도 있을 만큼 매혹적인 관능이었다.

    단단한 품을 꿰뚫을 수도 있을 것처럼 파고들었다.

    두근두근 뛰는 심장 위에 손바닥을 대 보았다.

    열정을 발산하는 그의 가슴은 몸이 바르르 떨릴 정도의 만족감을 선사했다.

    부둥켜안고 입술만을 부대끼고 있는데도, 온몸을 바친 듯 충만함이 차올랐다.

    “흐으음.”

    열망을 가누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여린 소음에 자극이 된 듯 그가 내 몸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자제력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지 커다란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하아.”

    내가 먼저 고개를 비틀어 입술을 뗐다.

    야하게 눈을 가라뜬 그가 내 입술을 응시한 채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벌어진 공간을 입술로 더듬듯 그가 성마르게 다가왔다.

    입술은 다시금 맞물렸다.

    너무 순수해서 자신이 더럽히는 것 같다고 말했던 그는 그 목적에 충실한 사람처럼 굴기 시작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등허리를 타고 내려가 잘록한 허리춤을 급하게 어루만졌다.

    뜨겁게 달아오른 손아귀에 의해 블라우스가 스커트 밖으로 끌려 나왔다.

    “흐으음.”

    그의 입술이 턱선을 타고 내려가 목 안쪽에 닿았다.

    달아오른 손길은 옆구리 맨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하아.”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고개를 젖혔다. 드러난 목 안쪽에 그의 입술이 닿았을 때마다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이제껏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짜릿함이었다.

    “할머니! 식사하셨어요?”

    침실 밖에서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우리는 서로에게서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열기에 흐트러진 서로를 바라보다 조용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낮 동안 할머니를 돌봐주시는 요양 보호사였다.

    침실 밖으로 나가자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는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본부장님. 다음 주에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나는 그가 곤란하지 않도록 깍듯이 인사하고는 홀로 유유히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요양 보호사와 할머니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 여자 친구 좀 데려다주고 올게요.”

    뒤따르는 그의 말에 나는 하마터면 현관에 다다르기도 전에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저 남자가 내 심장을 터뜨려 죽이려고?

    “아유, 그래요. 주말 아침 일찍부터 얼굴 보러 온 걸 보니, 많이도 보고 싶었나 보다.”

    말은 저렇게 해도 아주머니의 어조에는 흥미로운 기색이 역력했다.

    ‘너 여기서 잤니?’라고 묻는 말이 어디선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아닐세. 우리 서후 친구는 어젯밤에 왔어. 둘이 잠옷 파티 한다고 안 자고 시끄럽게 굴어서, 내가 나란히 침대 위에 눕혀서 재워 줬지.”

    할머니께서 쐐기를 박으셨다.

    “어머, 그러셨어요? 나란히 눕혀 놓고 재우셨어요? 다정하기도 하셔라. 우리 서후는 좋겠어요. 이렇게 다정한 할머니가 계셔서.”

    “암, 그럼! 둘이 손을 꼭 붙잡고 자던걸?”

    “어머머! 두 친구가 아아아아무 짓도 안 하고 손만 꼬옥 붙잡고 잤구나!”

    아주머니가 호호호 웃으셨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나는 어색하게 작별 인사를 또 내뱉고는 그의 집을 빠져나왔다.

    그제야 그의 집이 아파트가 아니라 단독주택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래된 양식의 2층 주택이었지만, 관리를 잘했는지 깔끔하고 멋스러웠다.

    트레이닝복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나온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저, 그만 가 볼게요.”

    “인사는 그만해도 되는데?”

    어울리지 않게 놀리는 투였다.

    “나오지 마세요. 택시 타고 가면 돼요.”

    단둘이 밀폐된 공간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투명한 햇살이 내리쬐는 마당에 나와 보니 새삼 부끄러워졌다.

    “택시 타고 가는 것만 볼게.”

    나는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집 앞에서 택시에 오를 때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할머니께서 침대 위에 나란히 눕혀 놓고 자장가를 불러 주셨을 때처럼, 서로 손가락을 얽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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