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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13/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13화

희붐하게 피어오르는 새벽빛 속에서도 그의 눈동자는 검게 가라앉았다.

그가 조심스럽게 내뱉는 숨결이 내는 달콤한 소음이 귓가를 간질였다.

새끼손가락과 약지에 그의 검지와 중지가 얽혀 있었다.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서 겨우 손가락 두 개씩을 얽고 있을 뿐인데, 온몸을 뒤섞고 있는 듯 열이 올랐다.

“친구를 집에 처음 데려왔어요?”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할 것처럼 내 눈동자를 응시하던 남자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분위기가 깨진 건가.

하지만 얽은 손가락은 그대로였다.

“어릴 때 친구를 집에 데려올 만한 형편이 못 됐어요.”

아픈 사연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할머니 손에 자랐거든요.”

“어린 마음에 그게 부끄러웠어요?”

조용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기도 했고.”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사정이 좀 복잡했지.”

자세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는 굳이 안 해도 돼요.”

슬퍼 보이는 그를 달래듯 속삭였다.

“그럼…… 이제 뭘 할까?”

나직한 그의 물음에 심장이 쿵 울렸다.

어스름한 방 안, 나는 물속을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숨이 가빴다.

물에 잠겨 간절히 호흡하기를 원하듯.

그래서 타인의 숨결을 바라듯.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내밀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숨결이 나의 구원이 되기를 바라며.

“하아.”

매혹적인 입가에 희미한 웃음기가 고이는가 싶더니 더운 숨이 터져 나왔다.

열기 어린 숨결마저도 모조리 들이마시고 싶을 만큼 달콤한 한숨이었다.

“이런 거 하면.”

머뭇거리는 그를 재촉하듯 말을 이었다.

“어때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입술 위로 그의 호흡이 쏟아졌다.

입술이 질척하고 매끄러운 살점 사이로 뜨겁게 빨려 들어갔다. 혀가 얽히기 시작했다.

흥분을 가두듯 두 눈이 저절로 감겼다.

촉, 소리가 나도록 가볍게 입을 맞췄을 때하고는 차원이 다른 야한 소음이 울렸다.

“우움.”

그의 입술을 머금은 채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아.”

호흡을 고르려고 잠시 떨어진 입술 사이로 그가 벅참 숨을 흘렸다.

다시금 입술이 빨려 들어갔고, 맞닿아 있던 단단한 팔뚝이 등허리 아래를 비집고 들어왔다.

몸이 빙그르르 회전했다. 그는 내 몸을 한쪽 팔로 휘감아서는 가볍게 들어 올렸다.

단단한 근육으로 뒤덮인 상체 위에 내 몸이 뭉개지듯 겹쳤다.

팔꿈치로 그의 머리 옆을 짚으며 키스에 열중했다.

고개가 이리저리 꺾일 때마다 새로운 전율이 깨어났다.

“으으음.”

깊게 달라붙은 입안으로 또다시 앓는 소리가 쏟아지자, 이번에는 그가 단숨에 몸을 일으켰다.

자세가 완전히 반전되었다.

육중한 몸이 위에 놓이고, 나는 그 밑에 깔려 입을 한껏 벌린 채 격정적인 키스를 받아 내느라 몽롱해지고 있었다.

“으음.”

말랑말랑한 입술이 부대끼고, 물컹한 혀가 맞부딪쳤다.

더운 숨결이 뒤섞이고, 서로를 들이마셨다.

단단한 목덜미를 꽉 끌어안고 있던 나는 가슴 안에 고이는 열기가 버거워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본능적으로 그의 떡 벌어진 어깨를 쓸어내리고, 꿈틀거리는 등 근육을 어루만졌다.

옷자락이 손바닥에 스치는 감각이 이렇게 야할 수가 없었다.

그가 손을 등 뒤로 뻗어서 내 손을 움켜잡았다.

두 손이 그의 커다란 손에 결박당했다.

그는 내 손을 침대에 내리누르듯 하고는 키스를 이어 갔다.

가볍게 깨물었다가 깊게 파고들기를 반복할 때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갔다.

순간이 영원이 되기를 바랐던 적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와 입을 맞추는 지금, 나는 감히 영원을 바랐다.

“으으음.”

또 한 번 앓는 소리를 흘린 순간, 그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깊은 결속은 풀어졌지만, 자잘한 입맞춤은 쉴 새 없이 계속되었다.

촉, 촉, 간지러운 소음 때문에 감질이 났다.

아쉽다는 듯 몸을 뒤채자, 내 손을 결박한 그의 손아귀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가만히.”

그가 더운 숨결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이마를 맞댄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침대 위에서 서로 몸을 맞대고 키스를 나누고 있으면서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는 남자에게서는 충동을 억누르려 애쓰는 힘이 느껴졌다.

무너뜨리고 싶은 자제력이었다.

나는 머리를 살짝 들어 올려 그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빨았다.

그러자 그가 무섭도록 급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손을 풀어 그를 끌어안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깊은 숲에 갇힌 채, 허락된 열기에만 응할 수 있는 저주에 걸린 기분이었다.

누군가를 탐하고 싶은 본능이 이토록 거세었던 적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었다.

만지고 싶고, 안고 싶고, 갖고 싶은.

안달하듯 몸을 들썩거리자, 그의 손에서 스르륵 힘이 풀어졌다.

그리고 입술 역시 떨어졌다.

“흐으.”

아쉬운 숨결을 흘리자, 그가 내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옷을 입은 상태인데도 빈틈없이 맞닿은 기분이 들어서 눈을 꼭 감은 채로 가쁜 숨결을 애써 억눌렀다.

맞닿은 가슴에서 쿵쿵 뛰는 그의 심장이 느껴졌다.

“저, 본부장님 좋아해요.”

이 모든 게 꿈인 줄 알고 건넸던 충동적인 고백과는 결이 다른 감정이었다.

무심한 듯 다정하게 나를 신경 써 주는 남자를.

책임질 가족이 있어서 연애 같은 건 할 수 없다고 거절했던 남자를.

침대 위에서 나를 안고도 자제하느라 몸을 바들바들 떠는 남자를.

나는 진심으로 내 곁에 두고 싶어졌다.

“알아. 말했잖아.”

그가 내뱉은 대답이 귓가에 안타깝게 스며들었다.

“그때보다 더, 좋아해요.”

목이 잠긴 듯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나를 놓아주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좀 더 자. 아침에 데려다줄게. 집엔 연락했어?”

건조한 물음이었지만, 열기를 억누르는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연락했어요.”

말을 돌리는 그에게서 대답이 듣고 싶었다.

“대답이요. 그때보다 더 좋아한다고요. 대답해 주세요.”

가슴이 들썩이도록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그는 방문 밖을 내다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좀 자.”

그는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스윽 어루만지고는 침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충동적인 키스를 나누었음에도 끝내 자제하는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왈칵 눈물이 치솟았다.

눈가가 따끔거려서 손등으로 비벼야만 했다.

인생은 한번 살아 봤어도 어려운 건가 보다.

***

이른 아침, 새백 내내 잠을 설친 그가 겨우 잠든 틈을 타 집을 빠져나오려고 했다.

아직은 감정을 가눌 수 없는 상황에서 비롯한 물러섬이라고 해 두자.

그는 거실 소파에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현관에 놓인 구두에 막 한쪽 발을 막 끼워 넣었을 때였다.

“언니, 어디 가?”

그의 할머니가 목소리를 잔뜩 죽이고는 어린아이 같은 말투로 물었다.

주름진 눈가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나는 오른손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쉿, 했다.

“언니, 재미있는 데 가? 나도 따라갈래. 나도 데리고 가. 응?”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막막해서 동화적 상상력을 동원했다.

“언니 괴물 잡으러 가. 언니 따라오면 큰일 난다?”

어린아이의 눈높이에 맞춰서 대답했는데, 할머니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거짓말!”

절대 속아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이 할머니가 씩씩거렸다.

“언니! 다리 밑으로 여관집에 있는 사관 오빠 만나러 가는 거잖아! 나 다 알아! 맨날 둘만 놀고! 너무 재밌게 노느라 치마도 막 뒤집어 입고 들어오고!”

에구머니나?

아무래도 어릴 적 할머니의 언니는 여관에 머무는 사관과 연애를 했었나 보다.

뭘 하고 놀았으면, 집에 치마를 뒤집어 입고 들어왔을까?

“아니야. 언니 진짜 괴물 잡으러 가!”

“지난번에도 개울가에 괴물 잡으러 간다고, 나 떼 놓고 갔잖아.”

그 언니나 나나 창의력이 거기서 거기였구나.

“이것 봐! 오늘은 치마 뒤집어 입을까 봐, 아예 뒤집어 입고 나가는 거잖우!”

할머니가 내 펜슬 스커트를 가리키며 화를 냈다. 솔기 실밥이 풀어진 듯한 디자인의 트위드 스커트였다.

“할머니, 왜 그러세요?”

몰래 나가려고 했는데, 이번에도 잠에서 덜 깬 민서후가 섹시한 자태로 나타났다.

“큰오빠! 언니가 오빠 몰래 도망가려고 했다? 다른 남자 만나려고 살금살금 나가려고 했다우!”

나는 절대 아니라며 고개를 빠르게 내저었다.

“잘 자나 했더니, 다른 남자 만나려고 도망가려고 했어?”

그가 할머니에게 장단을 맞추며 물었다.

미간까지 찡그리며 연기에 열중하는 모습에 기가 막혔다.

“아니, 나는.”

“오빠, 언니 가두자! 방에다가 꽁꽁 묶어 두고, 숟가락으로 문고리 잠가 버리자!”

할머니는 씩씩거리며 놀라운 말을 이어 나갔다.

“아니다! 오빠가 꼭 끌어안고 있어! 새언니 바람나서 도망가면 어떡해!”

어찌나 힘이 센지 할머니가 나를 그의 품으로 밀어 넘겼다.

“자, 이렇게 안고 있으라고! 뭘 그렇게 부끄러워한담? 결국, 지난밤에 첫날밤도 치렀으면서!”

그의 두꺼운 팔을 내 상체에 친친 감아 놓은 할머니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지난밤에 키스는 했습니다만, 첫날밤을 치르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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