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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12/89)
  • 다른 남자와 결혼해

    12화

    그가 감정을 억누르듯 허탈하게 웃으며 담배를 도로 담뱃갑에 집어넣었다.

    “무슨 말씀하시려고 제 이름을 부르신 건지……. 궁금해요.”

    망설이는 그를 채근하듯 말을 이었다.

    “뭘 참고 나가셨다는 건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그가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가 몰고 온 서늘한 밤공기에는 숲의 묵직한 향기가 배어 있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건.”

    그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내가 참고 있었던 건…….”

    기다란 손가락이 어깨 위로 늘어진 머리카락을 섬세하게 어루만졌다.

    “말이 아니었는데.”

    그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서로의 숨결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그의 손아귀에 붙들린 것은 겨우 머리카락 한 줌이었다.

    그런데도 온몸이 그의 품에 꽉 안긴 것처럼 열기가 치밀었다.

    마른 입술이 뻣뻣하게 느껴지면 어쩌지?

    혀로 입술을 축여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그가 갑작스럽게 몸을 뒤로 물렸다.

    겨우 맥주 반 잔을 마셨을 뿐인데, 이번에는 기민하게 넥타이를 잡아당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안 잡네.”

    그 역시도 탕비실에서의 가벼운 키스를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내가 얼마나 많이 곱씹었는지 알아?”

    여전히 내 머리카락은 그의 손아귀에 있었다.

    웨이브 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빙빙 돌려 감을 때마다 심장이 요동쳤다.

    “모르겠어요.”

    떨리는 대꾸가 흘러나왔다.

    “모르겠지. 알 리가 있나.”

    그가 술기운에 중얼거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평소의 그였다면 절대로 보여 주지 않았을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취하셨어요?”

    “아니. 나 술 잘 마셔.”

    산만 한 덩치로 소주 몇 잔에 취하지 않았다고 센 척하는 그가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왜 웃어?”

    “안 취했다고 센 척하는 본부장님이 귀여워서요.”

    어깨가 들썩이도록 숨을 크게 들이쉰 그가 머리카락에서 손을 뗐다.

    그는 주먹을 꽉 틀어쥐고는 택시 정류장에 늘어선 택시를 바라보며 내 이름을 불렀다.

    “정담은 씨.”

    그의 어조가 사뭇 달라져 있었다.

    끈적끈적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건조하고 무미한 음성이었다.

    “아쉽지만, 우리……. 여기까지 합시다. 다음 주에 회사에서 보죠.”

    냉랭한 인사에 눈가가 따끔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지를 줄 것처럼 굴어 놓고, 금세 아무렇지 않게 돌변하는 모습을 마주하자 가슴속에 구멍이 뻥 뚫린 듯했다.

    “조심해서 들어가요.”

    먼저 택시에 오르려는 그를 망연히 바라보고만 있을 때였다.

    “한참 찾았네. 하마터면 길이 엇갈릴 뻔했어요.”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머리카락이 쭈뼛 서버렸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택시 뒷좌석 문을 열었던 민서후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고는 도로 문을 닫아 버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등 뒤에 서 있는 존재를 확인했다.

    “오늘 그 부서 회식한다는데……. 회식하고 혼자 집에 들어갈까 봐 걱정돼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라고요.”

    내 걱정을 그렇게 한 인간이 날 죽였냐?

    “그쪽이 뭔데 내 걱정을 해요?”

    나는 민서후를 대할 때와는 다른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이래요, 담은 씨.”

    강재만이 특유의 유들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건들거렸다.

    한때 저런 모습을 멋지다고 생각하자며 스스로를 설득하려 애썼던 적이 있었다.

    선준의 말마따나 양아치미 득실거리는 X 같은 새끼인데!

    “우리 사이에 이러면 내가 서운하죠.”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닌 거로 아는데요?”

    나의 비아냥거리는 되물음에 강재만이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그만큼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런데 등 뒤에서 단단한 벽이 느껴졌다.

    벽의 정체는 도심 한가운데서 숲 냄새를 물씬 풍기며 서 있는 남자, 민서후였다.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정담은 씨는 내가 집까지 안전하게 바래다줄 생각인데, 강재만 과장은 괜한 걸음을 한 것 같네요.”

    내 평생, 아니 죽었다가 다시 깨어난 지금까지도. 강재만에게 고마웠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그런데 물러서려던 민서후를 자극하고, 붙들어 줬다는 점에서 절이라도 해 주고 싶었다. 한 번 말고, 두 번을 정성스럽게!

    “민서후 본부장, 아직 뭘 모르나 본데, 나랑 정담은 씨는 말이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감히 민서후에게 혓바닥을 함부로 놀리는 새끼 때문에 혈압이 오르기 시작했다.

    “강재만 과장님!”

    내가 말을 채 잇기 전에 민서후가 끼어들었다.

    “제가 굳이 뭘 알고 싶은 건 아니고요. 그럼, 살펴 가길 바랍니다.”

    그는 강재만이 더는 입을 놀릴 기회를 주지도 않고, 택시 뒷좌석에 나를 날름 태웠다.

    차창 밖에서 황당한 얼굴을 하고 서 있는 강재만을 향해 나는 험악하게 눈을 부라렸다.

    뱀처럼 교활한 강재만과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 순간, 나는 정신을 잃고 옆에 앉은 민서후의 단단한 허벅지 위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

    부드럽고 힘없는 손가락이 내 뺨을 콕콕 찔렀다.

    “으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나는 눈을 뜨지 못하고 침대 위에서 버둥거렸다.

    “이 여자 누구야?”

    웬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예쁜 여자 누구야?”

    노인의 목소리에 노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이 여우 같은 계집애가 왜 우리 침대에 누워 있는 건데! 이 여자 대체 누구야! 여보!”

    시끄러운 호통에 나는 화들짝 놀라서 잠에서 깨어났다.

    낯선 침실에서는 익숙한 숲 냄새가 났고, 노쇠한 노인은 침대 앞에 서서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새벽녘 어스름한 침실 안에 서 있는 모습이 조금은 섬뜩했다.

    “할머니. 제 친구예요.”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활짝 열린 침실 안으로 들어선 민서후는 이제 막 잠에서 깬 듯 피로한 얼굴이었다.

    이런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었지만, 잠이 덜 깬 민서후는 무방비해 보였고, 그 자연스러움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친구? 우리 서후가 커서 벌써 친구를 데리고 왔구나. 아이구, 기특해라.”

    그의 할머니는 언제 정신을 잃었냐는 듯이 인자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민서후와 나를 어린애들 대하듯 했다.

    그가 할머니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는 것 같아서 나는 괜찮다며 눈짓을 보냈다.

    “네, 할머니. 친구가 술이……. 피곤했는지 택시에서 잠이 들어서 집으로 데리고 왔어요.”

    나는 겨우 맥주 반 잔을 마셨을 뿐이다. 쓰러질 정도는 분명 아니었다.

    일단 지금은 놀란 할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그의 장단에 맞춰 주어야 할 것 같다.

    “안녕하세요, 할머님. 서후 친구 담은입니다.”

    “담근? 이름이 뭐 그래?”

    그가 비어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는 듯 턱을 아래위로 길게 늘이며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아니요. 담근 아니고, 담은!”

    “당근 아니고 담근!”

    할머니는 어스름한 방에서 해맑게 웃었다.

    “우리 서후가 집에 친구를 데리고 온 건 처음인데? 잠옷 파티냐? 친구가 우리 서후 잠옷을 입었네?”

    내가 그의 잠옷을 입고 있다는 것도 미처 깨달을 새가 없었다.

    나는 다소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자기가 갈아입힌 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인지 두꺼운 팔뚝으로 엑스 자를 그려 보였다.

    “잠옷 파티면 친구하고 같이 자야지. 자, 여기 우리 친구 담근이가 눕고.”

    할머니가 베개를 툭툭 두드렸다.

    나는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침대에 몸을 눕혔다.

    “자, 친구 옆에 우리 서후가 눕고.”

    이어진 말에 열기가 확 치솟았다. 어린아이 같은 놀이를 하면서 달뜬 꼴이 우습기는 했지만, 한 침대에서 그와 나란히 누울 생각을 하자 심장이 덜컹거렸다.

    “하아. 할머니.”

    그가 곤란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 어서!”

    할머니의 호통에 그는 미안하고 민망하다는 듯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내 옆자리에 누웠다.

    “자장, 자장, 우리 아가.”

    마른 손을 내 가슴에 얹고 할머니가 자장가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아주 어린 시절에도 나에게 애정 넘치는 자장가를 불러 주었던 사람은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할머니의 손길에 나는 알 수 없는 평온함을 느꼈다.

    그리고 침대 위에 나란히 누운 남자의 팔뚝이 내 팔뚝과 맞닿아 있었다.

    할머니의 자장가 소리를 들으며 손가락을 살짝 펼쳐 보았다.

    서늘하고 기다란 그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에 조심스럽게 휘감겼다.

    숨이 멎는 듯했다.

    “잠들었나 보네. 잘 자거라. 예쁜 내 새끼. 그리고 우리 서후 친구도.”

    할머니는 다정한 인사를 남기고는 침실을 떠나셨다. 방문을 꼭 닫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좁은 침대 위, 우리를 팔뚝을 맞붙이고, 손가락을 얽은 채로 침묵했다.

    심장이 너무 크고 빠르게 뛰어서 침대가 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자요?”

    꽉 잠긴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아니요.”

    그가 베개 위에서 고개를 돌리는 게 느껴졌다.

    나도 조심스럽게 그가 누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또다시 숨결이 뒤섞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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