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남자와 결혼해
11화
회식이 예정된 갈빗집으로 향하는 길, 나는 선준이 보내온 수십 개의 메시지를 차례대로 확인했다.
대부분의 메시지에 멍청이, 빙구, 바보 등의 애정 넘치는 멸칭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내용의 95%가 강재만을 빨리 쳐내지 못한 나를 비난하는 저주에 가까운 글이었다.
아, 우리나라 고3의 전투력이란.
나머지 5%를 차지하는 메시지가 나의 시선을 사로잡지 않았다면, 아마 휴대전화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교통사고 났던 도로에 갔다 옴. 나는 멀쩡했음. 힘이 넘쳐. 도로 새로 뚫을 수도 있을 것 같음.]
[그때 쓰러진 건 그냥 빈혈 같은 거 아님? 원래 빈혈이 있었나? 없었지 않나?]
[그니까 철분 잘 챙겨 먹고! 픽픽 쓰러지지 말고! 빨리 처리하길 바람! 강재만 그 X 같은 새끼한테 시집가기만 해 봐!]
협박 끝에 붙어 있는 마지막 메시지에 나는 실소했다.
[차라리 나한테 시집올래? 힘 좋은 7살 연하남 어때?]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누구한테 시집오라는 거야? 일곱 살 어린 연하남이면 대체 몇 살이야?”
수아가 메시지를 흘끗 보고는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일곱 살 어린 연하남이면 스물?”
부서원 중 하나가 내 나이를 스물일곱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뭐, 상대가 스물이어야 마땅한 대화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야, 정 대리. 일곱 살 연하 남친도 있어? 능력 좋네.”
웬 오랑캐 같은 놈이 중얼거린 순간, 앞서 걷던 민서후가 나를 슬쩍 돌아보았다.
“아니에요! 사촌 동생이에요. 지금 고3인데, 얘가 야자 하다가 심심한가 봐요. 아시잖아요. 우리나라 고3이 얼마나 힘든지.”
나는 진한 미소를 머금으며 눈썹을 치뜨고 동의를 요구하듯 동료들을 살폈다.
다들 못 미덥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며 웃어 댔다.
“그때 그 동생 말입니까?”
시의적절하게 끼어든 목소리는 민서후의 것이었다.
“네! 그때 그 동생이요!”
부서원의 신뢰가 두터운 본부장의 질문에 웃음기는 금세 사그라들었다.
[메시지를 확인했으면, 답을 보내라. 인간아.]
한없이 건방진 일곱 살 연하남이 또다시 메시지 폭탄을 보내기 시작했다.
[읽고 씹는 게 세상에서 제일 나빠.]
[대한민국 고3이 한가한 줄 알아? 내가 학교 째고 강릉까지 갔다 왔다?]
[계속 확인하면서 한 마디도 없네?]
선준이 쉴 새 없이 메시지를 입력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 사촌한테 전화 한 통만 하고 들어갈게. 얘 영 정신을 못 차리네.”
수아에게 자리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하고는 선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디서 전화질이야? 메시지에 답하라니까.
“너 진짜 참을성 좀 길러! 애가 왜 기다릴 줄을 몰라? 난 직장이 있는 사람이거든!”
- 녜녜, 재벌가 맏딸이 회사원 코스프레 하는 거 X나 힘드시겠지요.
내내 참고 있던 나도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선준이 한발 물러섰다.
- 알지, 알아. 정담은 씨가 얼마나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인지. 내가 잘 알지. 암.
나는 어금니를 악문 채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너는 그 도로에 갔는데,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 어. 나는 아무렇지도 않더라. 차 없을 때, 도로 위에 대자로 누워도 봤거든? 근데 완전 괜찮음.
그렇다면 죽은 장소 때문에 내 몸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니었다는 뜻이 되는 건가?
- 괜히 쫄았던 거 아님?
분명 몸에서 힘이 쭉 빠졌었는데, 그게 단순히 쫄았기 때문이라고…… 일종의 트라우마?
“알았어. 아무튼, 알아봐 줘서 고마워.”
- 고맙기는 덕분에 바다 구경도 하고 좋았음.
“너 말 똑바로 안 할래?”
- 내가 지금 말을 거꾸로 하고 있음?
말을 말아야지 싶다.
- 근데 진짜 이제는 빨리 움직여야 하지 않아? 왜 그렇게 굼떠! 기사 뜬 건 어쩔 거임? 민서후랑 딜 해! 5년 후에 너 죽는다! 내가 너 살려 준다! 그리고 우리 생각해 보면, 엄청난 정보를 알고 있는 거야.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우리한테 있는 거라고. 주식 하자! 코인 살까? 부동산은 어때?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시점이 온 것 같았다.
“문선준. 잘 들어. 우리가 많은 걸 알고 있다고 해서 그걸 함부로 이용하지는 말자. 교활하고 비겁한 방법으로 이번 삶을 사는 건, 난 반대야.”
- 착한 사람 콤플렉스라도 걸렸어? 착하게 살아서 얻은 게 뭔데?
“새 삶을 살 수 있는 기회. 그걸 얻은 거 아닐까?”
휴대전화 너머의 선준이 잠시 침묵했다.
내 의견에 동의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이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을 거야. 이게 상인지, 벌인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아무튼 새 삶의 기회를 얻은 건 맞아. 허투루 쓰고 싶어? 우리를 죽게 만든 인간들하고 똑같이 교활하고 비겁하게?”
- 하아. 이거 또 설득되네. 그럼 우리를 이 자리로 되돌려 놓은 누군가가 있다고 믿어? 절대 신 같은 거?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거기까지는 답하기 어려웠다.
- 나랑 점 보러 가지 않을래?
선준이 리듬을 붙여 가며 흥얼대듯 물었다.
“됐다. 끊자.”
통화를 마친 나는 집안일을 관장하는 책임자이자, 나의 유모 격인 구 실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오늘 회식. 늦는다고 사람 붙이면 날뛸 우려가 있으니 주의 바람. 주어 없는 결혼 기사만으로도 충분히 예열된 상태임. 엄빠한테는 알아서 잘 말해 주길. 뭐 대놓고 말해도 상관없음.]
선준에게 옮은 것인지, 집안사람에게 협박 가득한 문자를 보내 놓고도 나는 의연했다.
일단 부모님을 향한 내 작전은 ‘미친X 건드리면 X 된다’ 쯤으로 해 두기로 하자.
일평생 가족에게 독단적인 결정을 강요했던 아버지와 맞서려면 정상적인 대응과 변화로는 불가능하다.
안 그래도 봉사활동 장소에서 쓰러졌다는 소리를 접하곤,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했다.
딸이 쓰러졌다는데, 건강 상태를 염려하기는커녕 본인이 앓아눕는 어머니의 귀부인적 클래스란.
아버지는 묵묵부답이었지만,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것 같기는 했다.
자식이 통제 밖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걸 가라앉히려고 들었다가는 더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도.
현재에 빚어진 갈등이 미래의 화목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아버지의 뜻대로 순순히 응한다면 끔찍한 미래를 피할 수 없다!
결의를 다지며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술자리 분위기가 무르익어 있었다.
“어, 정 대리 여기!”
누군가 나를 향해 손짓했고, 나는 테이블을 살피며 빈자리가 어디 있는지 둘러보았다.
이건 또 어떤 선인이 베푼 하해와 같은 아량인지.
딱 한자리, 민서후 본부장의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우리 때는 수능만 잘 보면 대학 잘 갔는데. 요즘은 생기부다, 뭐다 애들 바쁘더라고. 사촌 동생도 챙기고. 우리 정 대리가 사람이 참 좋아.”
내가 자리를 잡기 무섭게 마주 앉은 과장이 너스레를 떨어 댔다.
민서후는 소주를 우아하게 들이켜고 있었다.
“소주? 맥주?”
“저는 맥주로 하겠습니다.”
나는 과장에게서 맥주 한 잔을 받아 놓고는 눈치를 봐 가며 한 모금씩만 들이켰다.
술이 세지 않은 편이어서 술자리에서는 신중해야 했다.
취해서 내가 죽었다 살아왔다는 개소리를 했다가는 큰일이니까.
“동생이 누나를 잘 따르나 보네?”
술기운에 볼이 조금 붉어진 그가 나직하게 물었다.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고 부드러운 음성이었고, 말끝은 자연스럽게 내려가 있었다.
“네, 가족 중에 제가 제일 편한가 봐요.”
“아…….”
그가 고개를 가볍게 주억거리고는 소주 한 잔을 더 들이켰다.
빈 잔을 채워 주려고 소주병을 들어 올리자, 그가 저지하듯 소주병을 낚아챘다.
“내 잔은 신경 안 써도 됩니다. 술은 각자 채워 마시는 게 낫죠. 각자 마시는 속도가 다른데, 안 그렇습니까?”
그의 질문은 내가 아닌 마주 앉은 과장을 향해 있었다.
회식 때마다 직원들에게 잔을 채워 달라고 징징거리는 행태가 꼴사나운 사람이기는 했다.
“아, 네. 그렇죠. 본부장님.”
과장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스스로 빈 잔을 채웠다.
술잔이 몇 번 더 기울어졌다.
“정 대리.”
그가 속삭이듯 나를 불렀다.
술에 취한 동료들이 목청 높여 떠드는 바람에 나만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는 다정한 부름이었다.
“정담은 씨.”
그의 감미로운 부름에 나도 속삭이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네, 본부장님.”
그는 내 이름을 불러 놓고 한참을 망설이듯 침묵했다.
무거운 침묵을 안은 우리는 시끄러운 무리 속에서 동떨어져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아닙니다. 그냥 한번 불러 봤어요.”
그가 약간은 취한 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뭔데! 왜 불렀는데!
속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자, 저는 여기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카드는 여기 두고 갑니다. 원하는 만큼 즐기다 무사히 귀가하길 바랍니다.”
그는 깔끔한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식 자리에서 법인 카드를 던져 주고 유유히 사라지는 바람직한 리더의 표본처럼.
하지만 나는 그 바람직한 리더가 내 이름을 부른 뒤에 내뱉으려던 말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저도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몸이 좀…….”
“아, 그래! 정 대리, 봉사활동 가서 쓰러졌다고 했었지? 들어가, 들어가! 어휴, 오늘 여기까지 와 준 것만 해도 고맙다, 야.”
아까 민서후에게 한소리 들은 과장이 그 일을 만회하고 싶은 듯이 떠들어 댔다.
자신 역시 부서원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듯이.
덕분에 질척대며 붙잡는 사람 없이 식당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식당을 벗어난 나는 혹시나 민서후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 길가를 두리번거렸다.
저기 있다!
민서후가 택시 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본부장님!”
나는 그가 택시에 먼저 올라타기라도 할까 봐 냅다 뛰어가서 불러 세웠다.
그가 천천히 돌아섰다. 손에는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가 들려 있었다.
그가 담배를 태우는 것도 여태 몰랐다.
“아까 하시려던 말씀이요.”
나는 벅차오른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듣고 싶어요.”
그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미소 지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가라앉았던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린 그가 중얼거렸다.
“간신히 참고 나왔는데, 왜 따라 나와?”
그와 나를 둘러싼 도심의 불빛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