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89)
  • 다른 남자와 결혼해

    10화

    나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읍. 쉽지 않겠는데. 남자가 잘나도 너무 잘났잖아.”

    있는 힘껏 녀석의 정강이를 걷어차려고 발을 뻗었다.

    “어? 피해?”

    “죽었다 살아나더니 사람이 왜 이렇게 폭력적으로 변했어? 결혼도 급발진이고!”

    나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변명을 내뱉으려 했다.

    그런데 문선준이 배를 두드리며 지껄여 댔다.

    “배고프네. 밥 먹으면서 얘기해. 시도 때도 없이 배가 고파서 뒤지겠네.”

    이전 삶에서 딱 하나 그리운 것이 있다면 깍듯하니 예의 바르게 굴었던 문선준 비서실장이었다.

    나는 인간이 덜 된 문선준을 데리고 근처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버섯이 듬뿍 들어간 풍기 피자 한 판과 파머스 스테이크, 명란 크림 연어 파스타와 채끝 리소토까지 해치운 선준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운을 띄웠다.

    “부뚜막 이름은?”

    “민서후.”

    “민서후라……. 민서후, 민서후.”

    미간을 찡그리고 한참 동안 이름을 중얼거리던 선준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이마를 탁 쳤다.

    “아, 그 민서후? 연구소 폭발로 죽은?”

    나는 콧김을 내뿜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필 남자를 골라도.”

    선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내 첫사랑이야.”

    레모네이드를 들이켜던 선준이 음료를 뿜으며 기침을 해 댔다.

    “뭘 그렇게 놀라? 나는 첫사랑 같은 것도 없을 줄 알았어?”

    “아니, 시X. 무슨 첫사랑을 회사 들어가서 했어? 고등학교 때는 뭐 하고? 대학교 때는? 그게 정상이야, 시X!”

    급기야 선준의 말투에 욕지거리가 들러붙었다.

    “알다시피 내가 살아온 환경이 특이한지라, 대학교 때까지는 거의 감시당하면서 학교에 다녔고. 학생 신분에 누굴 좋아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지.”

    선준은 ‘이런 빙구’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신입 사원 OT에서 사업부 소개할 때 처음 봤어. 봤지? 잘생긴 거.”

    나는 꿈꾸듯 중얼거렸다.

    “얼빠였냐?”

    부정할 수 없는 질문이었지만, 꼭 얼굴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한심한 질문에는 대꾸하지 않겠다는 듯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어 나갔다.

    “알잖아. 회장님 내외가 날 얼마나 과잉보호했는지. OT 때, 사업부 상관없이 팀을 짰거든? 근데 민서후 본부장이랑 같은 팀이 된 거야. 회사 근처 맛집이라는 순댓국밥집에 팀원들끼리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내가 수저를 못 찾고 헤맸어. 그런 식당을 가 봤어야지.”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상황은 여의치 않았었다.

    “그중에 꼰대가 한 명 있었는데, 수저가 어디 있는지도 못 찾냐, 막내가 수저 놔야지, 순댓국도 못 먹어 봤냐, 곱상하게 생겨서 귀하게 컸냐. 별소리를 다 하더라고?”

    선준은 본인이 기막힌 소리를 들은 것도 아닌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X발 새끼네, 하고.

    “근데 민서후 본부장이, 그때는 본부장은 아니었지만. 암튼 그 사람이 지나가는 종업원을 붙들고 물어보더라고. 실례지만 여기 수저통이 어디 있죠? 하고.”

    아주머니가 테이블 아래쪽에 붙은 서랍을 열어 주며 웃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수저를 꺼내면서 민서후 본부장이 웃는 거야. ‘식당마다 수저 놓는 곳이 달라서, 저도 헤매요’ 하면서.”

    그때 추임새를 넣듯 대답했던 사람은 동기 수아였다.

    ‘맞아요. 음식 하고 같이 가져다주는 곳도 있고요.’

    수아가 말을 마치자마자, 마주 앉은 민서후가 나를 보며 콧잔등을 찡긋거렸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아마 민서후 본부장은 기억 못 할 거야. 워낙 아랫사람 잘 챙기기로 유명한 사람이니까.”

    고개를 끄덕거리던 선준의 입가에 삐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겨우 순댓국밥집 스테인리스 수저 가지고, 반했어? 하찮다, 하찮아.”

    “그리고 오늘 내가 쓰러졌을 때, 나 안고 뛴 것도 민서후 본부장이야. 나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 앞까지 데려다줬고.”

    선준이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민서후도 마음이 없는 것 같지는 않네?”

    “네가 보기에 그래?”

    나는 테이블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남자가 미쳤어? 쓰러진 사람 안고 뛰다가 잘못하면 허리 나가! 내 허리가 나가도 상관없다, 싶은 사람만 안고 뛰는 거지.”

    “너는 정말, 애가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나는 얼굴을 확 붉히며 나무랐다. 그러자 선준이 두 손을 포개어 턱 끝을 받치며 되물었다.

    “대체 무슨 망상을 하면 허리 나간다는 말에 얼굴을 붉힐까? 죽었다가 살아나더니 머릿속에 더러운 것만 가득 찼나 보네.”

    내가 말을 말아야지.

    선준이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지껄였다.

    “근데 부족하다.”

    “뭐가, 또.”

    “실행력이 부족하잖아. 당장 내년 봄에 결혼하려고 강재만이 달려들 텐데, 그걸 물리치고 민서후랑 잘되고 싶으면……. 이렇게 얽히는 것 같고는 부족하지.”

    나는 묘안이 있느냐며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저기요. 나 그쪽 보좌하다가 결혼도 못 해 보고 죽었거든? 알아서, 잘, 열심히, 엮여 봐. 머릿속으로 망상만 하지 말고.”

    결혼도 못 하고 죽었다는 말에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너도 이번 삶에서는 좋은 짝 만나길 빈다.”

    “나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X 같은 강재만한테 시집이나 가지 마라.”

    단 한 마디도 곱게 내뱉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고3 문선준이었다.

    ***

    며칠 후 오후,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일이 터져 버렸다.

    “대박, 이거 우리 회사 얘기 아닌가?”

    직장인들이 점심을 먹고 무료한 오후를 보내고 있을 때가 가십을 터뜨리기 가장 적당한 때라고들 한다.

    『J그룹 맏딸, B전자 맏아들과 결혼 임박설!』

    언론사라고 일컫는 것조차 짜증 나는 인터넷 신문사의 기사였다.

    맞춤법을 틀리는 것은 예사고, 비문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는 인터넷 신문사들이 일제히 똑같은 내용의 기사를 업로드했다.

    내용인즉슨.

    “J그룹의 맏딸인 J 양의 결혼식이 임박했다는 소식이다. 상대는 최근 스마트 홈 제어 기술 개발에 박차를 올리고 있는 B전자의 맏아들 K모 군이라고. K모 군은 B전자의 경영권 욕심을 버리고 일찌감치 J그룹에 입사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의 올바른 인생관과 근면·성실한 태도에 J회장이 사윗감으로 점찍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B전자의 주식이 금일 상한가를 쳤다.”

    수아가 연신 ‘대박’을 외치며 짧은 기사 전문을 읽어 주었다.

    휴대전화에 불이라도 난 듯 번쩍거렸다.

    선준도 기사를 봤는지 쉬지 않고 메시지를 보내오고 있었다.

    [꾸물거리지 말고 움직였어야지!]

    [기사가 먼저 터졌네.]

    [이제 어쩔 거야? 사고를 치려면 좀 제대로 쳐!]

    일생을 사고 한 번 안 치고 산 사람한테는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차라리 꿈인 줄 알고 제멋대로 날뛰던 시절이 더 쉬웠다.

    왕왕 진동하는 휴대전화를 아예 무음으로 바꿔 버린 순간이었다.

    느껴지는가? 숲에서 마시는 카푸치노의 향기가!

    “오늘 본부 회식 있습니다. 선약 있는 사람은 참석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외부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민서후가 간략한 공지를 남기고는 집무실로 들어갔다.

    “이니셜만 아니면, 민서후 본부장이 사위 후보라고 해도 믿을 거야. 그치? 근데 B전자 맏아들 K 군이 누굴까?”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관심 없다는 듯이 모니터를 응시했다.

    “야, 근데 너 쓰러졌을 때…….”

    수아가 의자를 돌돌 끌어와서는 내 옆에 착 달라붙어서 중얼거렸다.

    “민 본부장님이 엄청 챙겼던 거 알아? 우리 본부장님 진짜 부서원 잘 챙긴다니까. 근데 너 이제 괜찮아?”

    빨리도 물어본다.

    “응, 괜찮으니까 출근하지.”

    봉사 활동하다가 쓰러졌다는 말에 나는 구 실장 손에 병원으로 끌려가서 온갖 검사를 다 받았다.

    검사 결과는 물론 양호했다.

    “하긴……. 아! 맞아! 너 근데 강재만 과장이랑 결혼해?”

    그것도 빨리도 물어본다.

    “아니.”

    미간을 팍 찡그리며 대꾸하자, 수아가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강재만 과장, 은근히 여기저기 건드리고 다닌다고 소문 안 좋아. 조심해. 청첩장이니 뭐니 떠들었던 거 다들 귀담아듣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죽기 전의 삶에서는 그 누구도 강재만에 관한 경고를 건네지 않았었다.

    하긴 그때는 내가 비밀리에 결혼을 준비했기에 누군가 언질을 줄 틈이 없었다.

    “오늘 회식에서는 뭘 먹으려나.”

    저런 혼잣말에 리듬을 붙이는 것은 흥 많은 한국인만의 특징일까.

    들릴락 말락 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수아가 오후 업무에 돌입했다.

    나 역시 인터넷 신문 기사를 어떻게 뒤집어야 할까 고민하며, 업무 이메일 작성을 시작하려고 이메일을 클릭했을 때였다.

    사내 메신저에 메시지가 들어왔다는 알림이 모니터 하단에서 깜빡거렸다.

    혹시 강재만일까 싶어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기사를 봤느냐고 능청을 떨어 댈 모습을 상상하니 구역질이 나려고 했다.

    그런데 메시지의 주인공은 강재만이 아닌 민서후였다.

    [몸은 괜찮습니까?]

    이쪽도 참 빨리도 물어본다.

    [불편하면 오늘 회식은 빠지도록 해요.]

    나는 웃음이 비어져 나오려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런 세심한 배려가 단순히 부서원을 챙기는 데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괜찮습니다. 회식은 꼭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빠르게 메시지를 작성해서 보냈다.

    [그래요. 괜찮다니 다행입니다.]

    메시지 끝에 웃음 짓는 이모티콘이 붙어 있었다.

    저 단순하게 생긴 노랗고 동그란 얼굴이 뭐라고!

    심장이 나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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