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89)
  • 다른 남자와 결혼해

    9화

    그는 런웨이를 걷듯이 요양원 잔디밭을 가로질러서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정웅그룹에서 후원하는 복지단체에는 요양원과 보육원이 함께 자리했다.

    나는 맞은편에 보이는 붉은 벽돌 보육원에서는 나를 죽인 아들을 입양했고, 민서후가 걸어 들어간 요양원에서는 없는 병도 만들어서 강제 입원당한 뒤 죽음을 맞았다.

    “너 얼굴이 왜 그래? 곧 쓰러질 것 같아.”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필 이번 봉사활동 장소가 이곳일 줄은 몰랐다.

    정웅그룹이 후원하고, 교회가 돌보는 단체는 워낙 많았으니까.

    “아니야. 괜찮아.”

    “괜찮기는! 너 입술이 새파래!”

    수아는 호들갑을 떨며 나를 요양원 건물 안으로 이끌었다.

    “여기 잠깐만 앉아 있어. 응? 내가 물이라도 가져올게.”

    나를 로비 의자에 앉혀 둔 수아는 금세 건물 밖으로 나가 버렸다.

    갑작스레 구토증이 일어서 얼른 화장실을 찾았다.

    스물여섯 정담은은 이곳이 처음이었지만, 쉰하나에 죽은 정담은은 이곳이 제집처럼 익숙했다.

    그 사실에 소름이 와락 끼쳤다.

    화장실에서 헛구역질을 반복하다가 나왔을 때, 복도 끝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민서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목제 거울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

    아무렇지 않게 걸어 나가기엔 몸 상태가 좋지 않았고, 시끄럽게 존재감을 드러내서 대화를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좋은 요양 보호사님을 소개해 주셔서, 제가 한시름 덜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민서후가 진중한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내가 뭘 한 게 있다고요. 할머님은 건강하시죠?”

    나이가 지긋한 요양원장의 목소리였다.

    “뭐, 그대로세요.”

    “치매 어르신은 그대로라는 말이 오히려 다행스러운 소식이랍니다.”

    현기증이 이는 와중에도 그의 목소리만큼은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집에서 날 기다리는 사람은 내가 평생 책임져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평생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던 사람은 치매에 걸린 할머니였나 보다.

    “하아.”

    가쁜 숨이 흘러나온 순간, 목제 거울을 타고 몸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거울이 우당탕 소리를 내며 옆으로 기울었고, 내 몸도 힘을 잃고 허물어졌다.

    단단한 몸이 나를 안정적으로 안아 든 채 어딘가로 뛰고 있었다.

    나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려서 상대를 살폈다.

    “민서후…….”

    잘생겼어.

    나는 뒷말을 삼키며 다시 눈을 감았다.

    단단한 가슴에 머리를 기대자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쿵쿵 뛰네.

    내가 뭐라고 떠드는지 깨달을 새도 없이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으음.”

    앓는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눈앞은 핑그르르 돌았고, 내뱉는 숨결이 버거웠다.

    어렵사리 눈을 뜬 순간, 링거 팩을 살피고 있는 간호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 깨어나셨어요.”

    간호사 뒤에서 나타난 사람은 민서후였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민서후의 팔을 끌어안았다.

    듬직한 몸집과 따뜻한 손은 이 순간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여기서 나가고 싶어요.”

    나는 목소리를 쥐어짜듯 중얼거렸다.

    “이 상태로는 안 될 것 같은데요.”

    민서후가 상체를 낮춰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대꾸했다.

    내가 잡은 손을 뿌리치지 않은 것만으로 고마웠다.

    그런데 이상한 기운이 자꾸만 나를 집어삼킬 듯이 엄습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자 낯익은 창밖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 병실이잖아!

    25년 후, 현재보다 훨씬 낙후된 이 병실에서 나는 숨을 거두게 된다.

    몸이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인지 눈알이 빠질 것처럼 어지럼증이 일었다.

    “여기서 나가야겠어요……. 제발요…….”

    나는 민서후의 눈을 들여다보며 애원했다.

    그는 여전히 나에게 눈높이를 맞춘 채,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3초쯤 시간이 흘렀을까, 그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고는 말했다.

    “알겠어요. 나가죠, 여기서.”

    그는 내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 있도록 부축해 주었다.

    나는 그의 품에 안기다시피 했다.

    탕비실에서 맡았던 기분 좋은 숲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단단한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두꺼운 팔뚝에 상체를 의지한 채 걸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네요.”

    그가 중얼거렸다.

    “네?”

    힘없이 되묻기 무섭게 그가 상체를 구부리는가 싶더니,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심장이 수직 낙하해 버렸다. 아니면 폭발해 버렸거나.

    나는 그의 품에 다소곳이 안긴 채로 요양원 건물 뒤편에 자리한 주차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봉사활동은요?”

    나는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주차장에 꽉 들어차 있던 직원들의 차가 온데간데없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아스팔트 위로 낮게 깔리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행사는 진작 끝났어요.”

    그는 나를 안은 채로 검은색 SUV 차량의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차가운 가죽 시트 위에 나를 살포시 앉혀 주었다.

    차 안에서 그의 향수 냄새가 옅게 풍겼다.

    그가 익숙한 몸짓으로 운전석에 올라탔다.

    “집이 어딥니까?”

    나직이 묻는 말에 나는 머리를 굴려 보려 애를 썼다.

    안 그래도 머릿속이 핑그르르 도는 마당에 대안을 생각해 내려니 죽을 맛이었다.

    “도곡동이요.”

    선준이 살던 동네를 떠올리며 대꾸했다. 이게 최선이었다.

    정웅그룹 회장이 사는 것으로 알려진 한남동 저택을 알려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필 왜 거기서 쓰러져서는.

    한심함에 자괴감이 들면서도 그가 운전하는 차 조수석에 앉아 있다는 사실에 심장이 동당거렸다.

    “도곡동 어디요?”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주상복합 건물의 이름을 대자 그는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가족한테 연락해 놔요. 내가 현관 앞까지 동행할 수는 없으니까.”

    고3인 문선준은 지금 불쌍하게도 학교에 있을 것이다.

    “나올 만한 가족이 없어요. 입구에 내려 주시면, 알아서 들어갈게요.”

    나는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에게 거짓말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그래요, 그럼.”

    그는 가타부타 말을 잇지 않았다.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또다시 선을 긋는 듯한 태도에 가슴이 저몄다.

    또 놀랍게도 요양원에서 멀어질수록 원기가 회복되듯 기운이 도는 게 느껴졌다.

    살해당한 장소에는 얼씬도 하면 안 되는 건가?

    내가 또 조심해야 하는 게 뭐가 있을까?

    꿈이라고 여겼을 때는 단순했는데, 현실이 되고 보니 막막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다 왔네요.”

    그가 차를 잠시 정차하고는 조수석을 돌아보았다.

    “얼굴이 아까보다 훨씬 낫네.”

    잘생긴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어렸다.

    왜 안도해요?

    내가 아프지 않아서 다행인가요?

    정말이지, 갖고 싶다! 민서후!

    “기다려요. 차 문 열어 줄 테니까.”

    그는 몸에 밴 매너가 훌륭한 남자였다.

    없는 사심도 쥐어짜서 망상하고 싶을 정도로 다정하고, 친절했다.

    그는 조수석 문을 열고 선 채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커다란 손에 내 손을 살짝 포개어 얹고는 차에서 내렸다.

    아, 그냥 차에서 한 번 더 쓰러질 걸 그랬나.

    아쉬운 마음을 애써 갈무리하려는 순간이었다.

    “정담은……?”

    하찮은 목소리가 차 옆구리 너머에서 들려왔다.

    문선준이었다. 불량한 놈이 야자 째고 집에 오는 길인가 보다.

    “누구?”

    그가 나와 문선준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사촌 동생.”

    “남동생.”

    나와 문선준 입에서 다른 말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남동생.”

    “사촌 동생.”

    번복한 말조차도 엇갈렸다.

    “사촌 남동생이요.”

    나는 잽싸게 대꾸하며 문선준에게 눈을 부라렸다.

    너랑 나랑 하나도 안 닮았거든? 남동생은 무슨!

    “얼른 들어가요. 다행이네. 사촌 동생을 만나서.”

    “네, 감사합니다.”

    나는 문선준이 사회인 필터를 끼우지 않은 입으로 험한 말을 지껄일까 봐 초조해졌다.

    “그래요. 내일 회사에서 봅시다.”

    그가 운전석에 올라탐과 동시에 문선준이 오래 참았다는 듯이 뇌까렸다.

    “저쪽이 부뚜막?”

    그러니까 이 말은 내가 올라탔냐는 거?

    “고등학생 주제에 못 하는 말이 없어?”

    “무슨 망상을 하면 고등학생이 내뱉는 속담에도 발끈하실까?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올라간다. 응?”

    고등학생 문선준은 겁을 상실한 인간이었다.

    “아직 정담은 정체는 모르나 보네요? 여기가 집인 줄 아는 걸 보니까.”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저 남자가 내 부뚜막 맞아.”

    “눈 높네? 강재만 같은 기생오라비가 이상형인 줄 알았더니? 남자가 봐도 멋있어! 합격!”

    “너 말이 짧다?”

    내 경고에 문선준은 여드름 득실득실한 뺨을 일그러뜨리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너 혹시, 네가 죽은 장소에 가 봤어?”

    “뭐 그런 섬뜩한 짓을 다 해?”

    “나 오늘 우연히 갔었는데, 거기 가면 맥이 빠져.”

    선준의 얼굴이 새삼 심각해졌다.

    “그럼, 말이죠.”

    나는 선준이 충실한 비서였던 시절처럼 계책을 내놓을 거라고 생각하며 귀를 기울였다.

    “거기 안 가면 되겠네.”

    이 새끼, 새삼 가르칠 게 많아 보인다.

    “강재만 젖히고, 저 남자랑 결혼하겠다. 그게 우리 사촌 누님의 계획인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