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남자와 결혼해
8화
“바뀌지 않는다며? 무슨 수로?”
“나는 변수 제어 능력이 떨어져요. 그런데 대표님은 아니죠. 가진 게 많을수록 제어할 수 있는 게 많잖아요?”
나는 선준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기만 했다.
죽기 전 선준은 특출한 비서였다.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없었고, 해결하지 못하는 사안이 없었다. 게다가 의리도 있어서 죽어라 내 편만 들며, 강재만에게 매수당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강재만의 표적이 되어서 살해당한 것이다. 강재만, 이 연쇄 살인마 같으니!
“근데 이상하지 않아? 너는 나보다 3년은 먼저 죽지 않았어? 근데 어떻게 우리가 돌아온 시간이 겨우 한 달밖에 차이가 안 나?”
나는 시간을 들먹이고 나섰다.
“그렇게 논리적으로 따질 거면, 우리가 이러고 있는 건 말이 돼요?”
말이 될 리가 없다.
“한 달 동안 이게 현실이라는 걸 깨닫고 나서, 일이 어디서부터 틀어졌는지 고민했어요. 그 시작은 대표님 결혼이에요.”
나도 강재만과의 결혼은 꿈에서라도 피하고 싶었다.
“모태솔로인 대표님이 강재만 그 새끼 양아치미에 반해서 날뛰는데, 아오. 저 진짜 빡쳐 돌아가시는 줄. 한번 뒤졌는데, 또 뒤질 뻔?”
“내가? 아니거든!”
내 심장은 여태 첫사랑 민서후를 향해서만 두근거렸다고 맹세한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결혼할 사람 있다고 저한테 막!”
선준이 울분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학생, 내가 예쁜 건 알아. 그치만 누나는 결혼할 남자가 있어. 그러니까 그만 찾아와. 응?”
내 흉내를 내는 선준이 웃겨서 입꼬리가 실룩거리기 시작했다.
“웃어요? 지금 이게 웃겨요?”
“아니, 그게 강재만한테 반해서 그런 게 아니지. 나는 부모님 말씀 잘 듣는 착한 딸이었고, 결혼은 예정되어 있던 게 맞잖아? 얼빠진 고등학생은 달래서 보내야겠구나, 생각했겠지. 그리고 나 남자 있어!”
엄청난 말을 내뱉었다는 것은 선준의 희번덕거리는 눈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혹시…… 여기 온 지 나흘 만에 친 사고가…… 남자예요?”
선준은 마치 내 친오빠라도 되는 것처럼 눈을 부라렸다. 하긴 선준은 나를 과잉보호하는 비서였다.
“그럴 리가 있냐?”
있다. 탕비실에서 본부장의 입술을 훔친 것도 사고라면 사고다.
내가 입술을 짓씹는 것을 선준은 놓치지 않았다.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대표님 남자부터 만들었어요?”
“오해야.”
아니, 오해는 아닌 것 같기두 하구.
나는 목을 흠, 가다듬고는 살짝 돌아섰다.
“내가 강재만이랑 결혼 안 하면 되는 거잖아? 강재만이 너희 아버지 회사 먹으려고 끌어간 돈은 정웅 자금이었으니까. 그렇지?”
선준이 그제야 말이 통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근데……. 미래가 어느 정도로 안 바뀌는 건데? 만약 내가 결혼을 안 해서 일이 더 꼬이면 어떡하지?”
의문이 첩첩산중이었다.
“그건 대표님 하기에 달렸겠죠. 이제부터 정신 바짝 차려야 해요. 저도 도울게요.”
나는 교복을 입고 서 있는 하찮은 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잘해 보자고요! 지금 대표님 상황이 나보다 더 끔찍하겠어요? 나는 다음 달에 수능도 다시 봐야 하고요! 군대도 다시 가야 한다고요! 미래가 바뀌어도 내가 수능을 봐야 하고, 군대에 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남자한테 군대 두 번 가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 줄 알아요?”
선준은 피를 토할 것처럼 얼굴이 벌게져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알았어. 귀 안 먹었어. 조용히 말해.”
고심하듯 미간을 찡그리며 팔짱을 꼈다.
“튕겨 나갈 준비하지 마시구요.”
내가 방어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하찮은 고3 같으니.
“일단 나도 이게 현실이 맞는지, 테스트가 필요해.”
“하아……. 맞다고요.”
“내가 빙구 같다며? 지금 변신술이라도 쓴 저승사자나 요괴한테 당하고 있는 건지 어떻게 알아?”
선준이 불만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원래 있는 것들이 의심이 많긴 하지.”
“뭐 인마?”
나는 미간을 팍 찡그리며 선준을 겁주듯 매섭게 쏘아보았다.
하지만 세상 무서울 것 없는 고등학생 남자애가 매가리 없어 보이는 나를 보고 겁먹을 리가.
“폰 번호라도 알려 줘요. 급한 일 생기면 연락하게.”
나는 선준이 내민 휴대전화에 내 번호를 찍어 주고는 돌아섰다.
잠시 혼미했던 정신을 추스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이게 꿈이 아니라고?
내가 지금 스물여섯으로 돌아왔다고?
앗싸! 라고 외치며 좋아할 상황인지, 아닌지는 두고 볼 일이다.
***
일요일 아침, 나는 부모님 손에 이끌려 교회로 향했다.
잊고 있었는데 우리 집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주여! 아버지! 아멘! 할렐루야!”
기도에 열을 올리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앉은 나는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에 짊어지고 올라간 십자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는 왜 돌아온 걸까요, 주님?
저를 데리고 가려다가 깜빡하셨나요?
아니면 이게 불교에서 말하는 일종의 윤회일까요?
내가 나로 다시 태어난 겁니까?
교회에 앉아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떠올리면 천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예배를 마치고 부모님은 성경 소모임이 있다며 나를 목사님 앞에 버려두고 사라지셨다.
“담은 양, 오랜만이네요. 요즘 회사 생활은 할 만해요?”
대학에 입학한 후, 나는 부모님과 함께 예배를 드린 적이 없었다.
평사원으로 입사해 부모의 정체를 숨기고 회사에 다니는 나를 위한 배려였다.
대외적인 활동을 숨기고, 개인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게 신경 쓴 덕에 아직 사내에서 나의 배경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부모님이 같이 교회에 가자며 나를 끌고 나온 것이다.
이건 대놓고 ‘정담은이 우리 딸이오!’ 하고 광고하는 행위였다.
“네, 할 만합니다.”
“청년부 강재만 군과 혼담이 오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악마 같은 새끼가 교회에 나와서 착한 척하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니 기가 찼다.
나를 목사님 앞에 버려두고 간 부모님의 큰 그림이 여기에 있었다는 사실에도 숨이 막혀 왔다.
“아니요. 저는 따로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님.”
“그래요. 안 그래도 권사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라고 들었지요.”
어머니께서 그새 목사님께 일러바쳤나 보다.
“목사님. 천국이 있다고 믿으시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멋진 계획을 세우고 계시죠!”
“천국은 어떤 형태인가요? 죽음 후에 자신이 살던 세상으로 돌아올 수도 있을까요? 예수님을 닮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이 천국 아닐까요? 그래서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면요?”
나의 질문이 더해질수록 목사님은 시시각각 얼굴이 어두워졌다.
“담은 양, 우리 담은 양을 위해 기도가 필요한 순간인 것 같습니다.”
목사님이 나처럼 죽어 본 적은 없으니까 대답을 못 하시겠지.
나는 기도에 순응하는 척 눈을 감으려 했다.
그런데 가라뜬 시야에 교회 게시판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정웅그룹 후원 청년 봉사활동》
포스터 귀퉁이에서 이불을 널고 있는 이쑤시개처럼 작은 남자의 형체는 분명 민서후였다!
민서후가 봉사활동도 한단 말이지?
이토록 바람직한 남자가 또 있을까.
“목사님. 저는 아버지를 따라서 기업 경영을 맡고 싶습니다. 교회에 하던 후원도 계속 이어 가고 싶고요. 저는 그래서 제 결정을 존중할 만한 남자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기도를 마치자마자, 내가 내뱉은 말에 목사님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교회는 헌금과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곳이다. 손 큰 후원자가 끊기는 것은 원치 않을 터.
하지만 강재만이 정웅의 실권을 장악한 후로 교회의 사업도 변질되었고, 참 종교인이었던 목사님은 모함을 당한 채로 파직당해야만 했다.
“그래요?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저기 포스터에 있는 청년 봉사활동에 제가 함께해도 될까요? 그리고 제 뜻을 이루기 위해서 저는 결혼과 기업 경영을 제 뜻대로 할 생각입니다.”
나의 의도는 불온하였으나, 목사님은 나를 귀한 어린양 보듯 하셨다.
정웅의 맏딸이라는 사실이 알려질 거라면, 스스로 나서는 편이 더 유리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민서후가 있었다. 회사보다는 더 다가가기 쉬울 것이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목사님을 마주 보았다.
***
과장급 이상 직원 의무 교육이 있어 지난 사흘 동안 민서후는커녕 강재만조차 보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계획했던 대로 정웅그룹이 후원하고, 교회가 주도하는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야, 너 이런 활동 안 하잖아? 무슨 일이야?”
묘한 색감의 분홍색 단체 티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파워 웜톤 수아가 다가와 내 팔뚝을 뚝 치며 물었다.
나는 웃음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너 근데 그 소문 들었어? 회장 딸 말이야. 지난주에 회장이랑 같이 교회에 나왔다더라?”
“그랬는데?”
무심한 척 되물었다.
혹시 그게 너냐는 질문이 나올 차례인가 싶었다.
“대박 예쁘대. 현대판 공주님인데 당연하겠지. 이제 결혼하려고 대외 활동하는 것 같다고 그러더라고. 사진은 그룹에서 전부 차단했나 봐. 예쁘다는데, 사진이 안 도네?”
내가 봉사활동에 참여한다는 둥 뜻밖의 행보를 보인 탓에 그룹 홍보실에서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예쁘대?”
“어, 완전. 교회에 천사가 강림한 줄 알았다고 막 그러던데.”
그 천사가 바로 나예요. 뺨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단속하려는 순간이었다.
“여기 또 다른 천사가 하나 강림했네.”
수아가 저 멀리서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김없이 그곳에는 민서후가 있었다.
웜톤, 쿨톤 논쟁 따위 잘생긴 이목구비 앞에서 중요치 않다는 듯이 연분홍색 단체 티를 완벽하게 소화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