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89)
  • 다른 남자와 결혼해

    7화

    “안 탈 겁니까?”

    택시 기사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물었고.

    “오늘도 절 못 알아보시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문선준이 여드름 득실득실한 얼굴을 붉히며 눈물 한 방울을 똑 떨어뜨렸고.

    “어? 정담은 씨!”

    회사 입구에서 나를 발견하고 튀어나온 강재만이 소리쳤다.

    “일단 타!”

    나는 문선준을 택시 뒷좌석에 욱여넣고는 얼른 따라 탔다.

    “기사님, 빨리 출발이요! 도산공원! 도산공원으로 가 주세요!”

    당장 생각나는 곳이 기껏해야 공원이었다.

    교복을 입고 질질 우는 남학생을 데리고 술집이나 호텔 라운지에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나는 극도의 혼돈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왜 고등학생 문선준이 나를 찾아온 거지?

    알아봐서 다행이라는 저 반응은 또 뭐야?

    택시 기사님이 듣고 있는 자리에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물을 수는 없었다.

    카오스 상태의 뒷좌석 승객들은 무시한 채 택시는 금세 도산공원 입구에 멈춰 섰다.

    나는 턱 끝에 방울진 눈물을 훔치는 문선준에게 따라오라고 턱짓하고는 택시에서 내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꿈이잖아! 꿈!

    공원 안으로 들어서던 나는 손바닥을 쫙 펼쳐서 오른뺨을 세게 치려다 말았다.

    지난번 구 실장 앞에서 뺨을 후려쳤을 때, 몹시도 아팠던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꿈에서도 아픈 건 아픈 거다.

    “대표님이 이번에도 저 못 알아보실까 봐……. 저 진짜 조마조마했다구요.”

    여드름투성이 문선준이 코를 훌쩍이며 내 뒤를 따랐다.

    나는 인적이 드문 공원 벤치 앞에서 멈춰 섰다.

    “있잖아. 문선준 학생. 나는 지금 학생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일단 시치미를 뚝 떼고 보았다.

    “아니잖아요! 지난번에는 진짜 못 알아보셨다고요! 근데 지금은 저 알아보신 거잖아요! 회사 앞에서 강재만 그 파렴치한 인간이 따라붙을까 봐 택시 타고 도망치신 거잖아요! 지난번까지만 해도 강재만이랑 선볼 생각에 들떠 있었으면서!”

    “내가?”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검지를 세워서 머리통을 가리켰다.

    문선준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어느새 땅거미가 내린 공원 안, 벤치 옆 가로등에 비친 문선준의 얼굴은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울고 있는 고등학생과 어른 여자 사람인 나를 흘끗거리며 지나갔다.

    “울지 말고 이야기해. 안 그래도 지금 충분히 이상하니까. 날 미성년자 겁박하는 비열한 어른 만들지 말고.”

    “대표님이 비열하시긴요! 절대 아니죠! 비열한 인간은 강재만 그놈이죠! 저 교통사고로 죽은 거 아니에요! 강재만이 사람 시켜서 제 차 브레이크 패드를 손봤더라고요. 그래서 차를 멈출 수가 없었던 거예요!”

    나는 문 실장, 아니 고등학생 선준이 울부짖는 모습을 바라보며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문선준 실장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차는 교통사고가 나자마자 폐차되었고, 사고 원인은 운전 과실로 판명 났었다.

    “그 차에 대표님이 함께 타는 줄 알았던 거예요, 강재만은! 근데 저만 사고를 당한 거죠!”

    오싹 소름이 끼쳤다. 사고 당시에도 의심했던 부분이기는 했다.

    “문선준 학생. 알겠어.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그게 뭐?”

    “네?”

    선준은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잘 모르나 본데, 우리는 지금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가기 전에 꿈을 꾸고 있는 거야. 저승사자가 어떤 실수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문선준 실장 아니 학생? 그쪽 꿈과 내 꿈이 얽힌 거지. 우리는 각자 원하는 꿈을 꾸다가 저승으로 가면 돼. 오케이?”

    나는 꽤 고집이 센 편이었다. 한번 논리를 정하면 바꾸는 법이 별로 없었다.

    착한 성품이기는 했지만, 재벌가에서 곱게 자란 세상 물정 모르는 고집은 조금 있는 편이었다.

    선준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몰아쉬었다.

    “이럴 줄 알았어……. 내가, 우리 순진한 대표님……. 이럴 줄 알았어! 알았다고!”

    진저리 치는 선준의 기세에 주눅이 든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꿈이 아니라고요! 분명히 저는 운전대를 잡은 채로 숨을 거뒀는데! 강재만 저주하면서! 대표님 걱정하면서! 다시 눈을 떠 보니까, 야자 시간이었다고요!”

    나는 멍하니 선준을 바라보았다.

    “그것 참…….”

    불쌍하다고 해야 하는지, 그래서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하는 건지……헷갈린다.

    “그럼, 네 말은……. 우리가 지금 죽자마자 시간을 거슬러 오기라도 했다는 거야?”

    나는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자 선준은 이제야 그걸 깨달았냐는 듯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에이. 그게 말이 되나?”

    나는 손사래를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동시에 가슴속에서는 의심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심장이 살아 있는 것처럼 뛴다.

    뺨을 때리면 아프다.

    민서후에게 입을 맞췄을 때 놀랍도록 부드러운 감촉에 뒷무릎에서 힘이 풀렸다!

    내 표정이 시시각각 어두워지는 것을 알아차린 선준이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아시겠어요? 과거로 돌아왔다고요. 이승과 저승을 잇는 꿈도 아니고. 지옥 아닌 연옥에 빠진 것도 아니고. 현실 세계라고요.”

    나는 왼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으며, 선준에게는 오른손을 활짝 펴 보였다. 조용히 하라는 뜻이다.

    죽기 전 내 버릇을 찰떡같이 기억하고 있는 선준이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이게 꿈이 아니라고?”

    꿈이 아닌데, 나는 민서후에게 입을 맞췄다.

    “꿈이 진짜 아니라고?”

    꿈이 아닌데, 나는 민서후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현실이라고요.”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아니, 근데 왜 갑자기 죽다 말고 살아나서 무려 25년을 거슬러 온 거지?

    그리고 문선준은?

    초조한 걸음으로 벤치 앞을 빠르게 오가던 나는 우뚝 멈춰 서서 선준을 노려보았다.

    “너 저승사자지?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저도 이유 모르고 죽음을 거스른 인간이 아니라, 저승 능력자라면 좋겠네요.”

    선준이 시니컬하게 웃었다.

    아, 저거 진심인데?

    “말도 안 돼!”

    갑자기 밀려든 당혹감에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쭈그리고 앉았다.

    “대표님이 세상 물정 모르는 빙구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어요! 어떻게 이걸 꿈이라고 생각해요? 먹고, 자고, 싸고. 이런 디테일한 꿈이 세상에 어딨어요?”

    “뭐……. 빙구?”

    나는 가로등 아래에 저승사자처럼 서 있는 여드름투성이를 올려다보며 스산하게 물었다.

    “아, 쏘리! 아직 우리 집이 안 망해서 저 지금 있는 집 도련님이거든요. 집도 망하고,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군대 갔다 오고, 그러고 나서 제가 사람 되잖아요? 아직 인생 고난 패치를 안 달아서 그런지, 제가 좀 싸가지 없는 고3이더라고요. 예전 기억은 다 나는데, 혈기는 열아홉이네. 입에 사회인 필터 없는 건 좀 봐줘요.”

    선준이 불량스럽게 뇌까렸다.

    나는 선준의 비뚤어진 행실을 지적하기에 앞서, 의문이 들었다.

    “너도 그래?”

    “예?”

    나의 진지한 물음에 선준이 새삼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그래. 내가 쉰하나에 죽었거든? 근데 막 스물여섯이 된 것처럼!”

    첫사랑 보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그래서 입을 맞춰 버렸고, 그와 결혼까지 생각했어! 라는 말을 교복 입은 선준에게는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오래 살았네요. 쉰은 못 넘길 줄 알았는데.”

    “뭐 인마?”

    죽기 전, 우리는 서로에게 깍듯이 존칭을 쓰던 사이였다.

    그런데 품행이 방정하지 못한 고등학생이 된 선준과 이제 막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스물여섯의 나는 거침없이 굴고 있었다.

    “혹시 무슨 사고 친 건 없고요? 내가 상태가 이래서 수습해 드리는 게, 어려울 수도 있어요.”

    ‘사고’라는 말에 민서후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까 이승과 저승을 잇는 꿈인 줄 아셨다면서요? 본인 꿈이라고 생각하고 멋대로 사신 건 아니죠? 돌아온 지는 얼마나 됐어요?”

    “사흘인가, 나흘인가.”

    “이것 봐. 본인이 언제 돌아왔는지도 모르고.”

    나를 오랜 기간 보좌한 인물답게 선준은 내 성향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대표님이 본질적으로 선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물정 모르고 날뛸 때가 있거든요? 그게 사람 얼마나 미치게 하는데요.”

    “야!”

    나는 닥치라는 듯이 선준을 노려보았다.

    선준은 전혀 무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너 근데 나는 왜 찾아왔어? 돌아왔으면, 그냥 살 것이지.”

    “미래가 바뀌지 않더라고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서 나는 입을 떡 벌린 채 선준을 응시했다.

    “시험 성적, 축구 대표님 결과, 가을 야구 진출 팀, 다 똑같아요.”

    “그래서?”

    “우리 아버지 공장이 백헌전자 하청인 건 알죠? 아버지 망한 거 다 강재만 때문이고.”

    나도 손쓸 수 없는 순간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막아 줘요. 우리 집 망하지 않게.”

    꿈인 줄 알았는데, 어마어마한 현실이 덮쳐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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