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남자와 결혼해
6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남녀가 엉겨 붙어서 내는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타인의 은밀함이 전해지는 상황이 당황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여보세요? 본부장님! 여보세요?”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민서후 본부장님!”
앓는 소리가 멀어지는가 싶더니, 전화가 뚝 끊겼다.
당황스러워서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는 찰나, 다시금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 정담은 씨?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민서후의 목소리였다. 이번에도 직급을 뺀 이름만 부르는 음성은 기막히게 감미롭다.
왜 직급을 뺄까? 이건 무슨 의미일까?
“저한테 전화하셨으니까, 저겠죠.”
나는 해맑게 웃으며 분위기를 조금 느슨하게 만들어 보고자 애썼다.
- 미안합니다. 가족이 전화를 잘못 걸었어요.
갑자기 머리 위로 폭죽이 파바밧 터지는 것 같은 깨달음이 밀려들었다.
이제는 그가 보호하고 책임져야 할 대상은 혈육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사연을 숨기고 있는 걸까, 이 남자는?
“미안하긴요. 괜찮아요.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끙끙 앓고 계셔서 본부장님 어디 아프신 건 아닌지 걱정했어요.”
사실 포악한 강재만이 벌써 그에게 손을 뻗쳤나, 하는 걱정까지 했다.
- 아닙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대화를 더 이어 가고 싶은 나는 화젯거리를 생각해 내느라 바빴다.
그런데 그는 왜 전화를 끊지 않고 망설이는 걸까?
혹시 택시 뒤꽁무니를 바라보던 애틋함이 그의 숨소리에도 녹아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 나는 휴대전화로 기어들어 갈 것처럼 귀를 기울였다.
- 하아. 내일 회사에서 봅시다.
그의 안타까운 한숨이 휴대전화로 스며든 순간,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네, 내일 봬요.”
통화를 마친 나는 침대에 털썩 몸을 던졌다.
그의 짙은 한숨 소리가 귓전을 끝없이 맴돌았다.
회사에서는 빈틈없이 완벽하기만 한 남자의 연약한 모습을 엿본 것 같아서 가슴 한구석이 허물어지는 것만 같았다.
대체! 우리 민서후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
“정 대리, 오늘 분위기가 좀 다르네?”
입사 동기 수아가 음흉한 눈빛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늘 무채색 계열의 심심한 오피스룩만 입곤 했는데, 오늘은 연노란색 블라우스에 아이보리색 트위드 펜슬 스커트를 입고 나왔다.
썸 타는 스물여섯의 지위와 명예를 고려해서 연분홍색 시폰 원피스를 입고 가라는 구 실장을 가까스로 설득한 끝에 그나마 얌전한 옷을 골라 입을 수 있었다.
처음 이성에 눈을 뜬 소녀의 데뷔탕트를 준비하기라도 하는 듯 구 실장은 열과 성을 다해 나를 살피기 시작했다.
어휴, 피곤해.
출근도 하기 전에 퇴근하고 싶게 만드는 구 실장이었다.
“뭐 좋은 일 있어?”
“좋은 일은 무슨.”
나는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서 일어나 탕비실로 향했다.
아직 이런 면에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나는 커피를 내리는 척 에스프레소 머신 앞에 섰다.
그윽한 커피 향이 코끝을 맴돌기 시작할 무렵, 어디선가 다정한 기운이 엄습해 왔다.
고개를 슬쩍 돌리자 탕비실 입구에 민서후가 서 있었다.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 좁은 탕비실 벽을 양손으로 짚은 채 서 있는 모습에 숨이 턱 막혀 왔다.
“안녕하세요, 본부장님. 커피 드시게요?”
눈을 가늘게 뜬 그가 오른손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조용히 하라고? 왜?
복도 한쪽을 막아서 마련해 놓은 탕비실의 한쪽 벽에는 싱크대와 커피 추출기, 냉장고, 정수기 등이 자리했다.
겨우 한 사람이 지나다닐 만한 통로가 여유 공간의 전부였다.
아직 신재생에너지 사업본부의 공식 사무실이 공사 중인 탓에 임시로 만든 탕비실은 좁디좁았다.
누군가 탕비실을 사용 중일 때는 탕비실 입구에서 차례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런데 민서후가 좁은 탕비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나는 거대한 벽 같은 덩치가 엄습해 오는 것을 바라보며 마른침조차 삼키지 못했다.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뛰었다.
“강재만 과장님도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오늘 너무 멋지시네요.”
밖에서 호들갑스럽게 떠드는 목소리는 동기 수아의 것이었다.
“강재만 과장님도? 오늘 나 말고 또 누가 좋은 일 있는 것처럼 보였나 보네요?”
대답하는 목소리는 강재만이었다.
“우리 정담은 대리요. 오늘 너무 예쁘게 하고 왔더라고요.”
수아가 대꾸하는 동안, 민서후가 나를 가두듯 선 채로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검고 그윽한 시선이 눈동자, 뺨, 턱 끝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연노란색 블라우스의 가슴께가 들썩거리도록 숨이 차올랐다.
그의 눈동자가 찰나 블라우스 위를 스치는가 싶더니 이내 위로 올라온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이듯 물었다.
“강재만 과장 때문에 이러시는 거예요?”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굳게 다문 입술이 탐스럽다. 가까이 선 그에게선 놀랍도록 근사한 숲의 향기가 풍겼다.
나는 그가 내뿜는 향기에 홀린 듯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섰다.
“안 그래도 정 대리 찾고 있었는데……. 우리 정담은 씨, 어디 갔습니까?”
강재만이 제멋대로 지껄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정담은 씨?
나가서 승강이하면 오히려 손해다.
아직 명확한 계획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는 일단 한 발짝 물러서 있는 게 상책이다.
솔직해져야지, 정담은.
실은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서후와 마주 선 채로 끈적끈적한 호흡을 느끼는 순간이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강재만 과장이랑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닙니까?”
어제 했던 물음을 그가 반복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강조하듯 미간을 찌푸렸다.
“어머머! 과장님! 우리 정담은 씨라뇨. 뭐야, 뭐야!”
수아가 특유의 발랄한 웃음 섞인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건 청첩장 돌리면서 말하려고 했는데.”
강재만이 개소리를 지껄인 순간, 민서후가 뒤로 몸을 물렸다.
아쉬운 나머지, 나도 모르게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기고 말았다.
촉,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그의 넥타이를 움켜잡아 끌어당긴 나는 발꿈치를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엄청난 사고를 치고 나서야 놀란 나머지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내 뺨은 그의 귓불만큼이나 붉을 것이다.
그가 기다란 중지로 도둑맞은 입술을 어루만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내 손목을 움켜잡고는 벽으로 몰아세웠다.
“앗!”
두 손을 그에게 결박당한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가라앉은 그의 눈빛이 내 입술에 닿아 있었다.
그가 가쁘게 내뱉는 숨결이 쇄골 위로 떨어졌다.
내 호흡 역시 흐트러져 있었다.
서로의 심장이 좁은 탕비실을 폭파할 듯 질주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예민하게 차오른 공기의 밀도 때문에 살갗이 따끔거렸다.
“정담은 씨.”
금방이라도 입술을 집어삼킬 것처럼 그가 열기를 품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내뱉었다.
“네, 본부장님.”
“방금 본인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요?”
나는 알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드레스 셔츠가 팽팽하게 팽창하도록 그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너른 가슴이 파르르 떨리며 숨을 토해 내는 모습은 지나치게 관능적이다.
“혹시 정담은 씨 자리로 돌아오면, 내가 왔었다고 전해 주세요.”
“네, 그럴게요. 과장님!”
강재만이 사무실을 나서는 듯한 대화가 들려옴과 동시에 그가 내 손을 풀어 주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흥분이 가시지 않은 탓에 나는 손끝을 바르르 떨었고, 그는 긴 숨을 여러 번 몰아쉬었다.
무슨 말을 할 것처럼 입을 벙긋거린 민서후가 먼저 탕비실을 나섰다.
나는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으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내 꿈의 장르는 이제 급발진 에로틱 서사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
퇴근길, 나는 수아와 함께 사옥을 나섰다.
“들어가세요, 본부장님!”
“네, 조심히들 가요.”
민서후가 나와 수아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유유히 버스 정류장 쪽으로 사라졌다.
“본부장님, 오늘 되게 일찍 퇴근하신다. 항상 나보다 늦으셨는데.”
민서후가 일부러 나의 퇴근에 맞추어 사무실을 나왔다는 설레발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한데, 그는 슈트 재킷을 입다 말고 버클을 잠그지 못한 브리프 케이스를 들고서는 수아와 나를 뒤따라 나왔다.
“뭐 급한 일 있으셨나? 되게 급해 보이지 않았어?”
강재만이 또 따라붙을까 봐 걱정한 게 분명하다!
“그랬나?”
나는 수아의 물음에 대충 대답을 흘리면서도 속으로는 어깨춤을 추고 있었다.
이건 분명한 쌍방향이다!
만약 회사 탕비실이 아닌 곳에서 그에게 입을 맞췄다면 어땠을까?
진한 키스로 응답받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던가?
망상을 이어 가는 사이, 수아는 먼저 온 버스를 타고 사라졌다.
나 역시 집으로 향하는 택시에 올라타려던 순간이었다.
“저기요. 정담은 님.”
웬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 나를 불러 세웠다.
“저를, 아세요?”
나는 택시 문을 잡은 채 돌아서서 남학생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기는 한데, 누군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가슴팍의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문선준》
택시 문을 잡고 있지 않았다면 놀라움에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저 알아보시는 거죠, 정 대표님!”
남학생이 곧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소리쳤다.
문선준, 그는 내가 정웅에너지 대표 이사직에서 퇴임할 때까지 나를 보좌하던 비서실장의 이름이었다.
근데 네가 왜 교복을 입고, 내 앞에 울면서 나타난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