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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5/89)
  • 다른 남자와 결혼해

    5화

    그는 마치 사이비 종교의 불법 포교 행위를 맞닥뜨린 사람처럼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못 들은 거로 하죠.”

    그가 나직이 읊조리고는 슈트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택시 불러 줄 테니까. 타고 가요.”

    미친년 취급할 거면서 이렇게 다정할 건 또 뭐람.

    택시가 아주 느릿느릿 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는지 채 1분도 되지 않아서 도착한 모범택시 뒷좌석에 올라타야만 했다.

    “목적지는 저희 직원한테 물으시면 됩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조수석 차장을 통해 택시 기사에 만 원권 지폐 석 장을 건네고는 예의 바르게 웃었다.

    모범택시는 속절없이 출발해 버렸다. 나는 뒷좌석 차창에 매달리듯 달라붙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내가 탄 택시가 점처럼 작아질 때까지 그곳에 서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애인인가?”

    오지랖 넓은 택시 기사님이 룸미러를 흘끗거리며 물었다.

    원래 성격대로였으면, 뭐 이런 개인적인 걸 묻는 사람이 다 있냐며 정색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이나요?”

    나는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상체를 기울이며 흥미진진하다는 듯이 물었다.

    “어, 뭐. ‘저희 직원’ 하는 거 보니까, 애인은 아닌 것 같은데……. 둘이 하도 애틋하게 쳐다봐서…….”

    나의 적극적인 질문에 기사님은 짐짓 당황한 듯 운전대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대답했다.

    “애틋했어요? 누가요? 제가요? 아니면 저 남자가요? 제가 더요? 아니면 저 남자가 더요?”

    “흐흐음. 뭐 둘이 비슷하던데.”

    먼저 운을 띄워 놓고 적극적인 질문에 당황할 건 또 뭐람.

    “남자 쪽이 더 관심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보통 택시 잡아 주고 나면 금방 돌아서거든요. 요즘은 어플에 택시 정보도 다 뜨니까, 굳이 번호 외울 필요도 없겠고.”

    룸미러를 흘끗거리는 기사님의 눈빛에서 나는 희망이라는 두 글자를 읽었다.

    “기사님은 워낙 많은 사람을 대하시니까, 나이 어린 저보다는 사람이나 관계를 보시는 눈이 더 훌륭하시겠죠.”

    택시 기사는 잘 되어 봐야 40대 중반으로 보였다.

    누나는 쉰하나에 죽었단다.

    그는 내 말치레에서 감응하듯 대꾸했다.

    “이쯤 되면 반점쟁이지. 병원 가는 노인네, 아들 군대 면회 가는 부모, 대학 시험 치르러 가는 수험생…….”

    기사는 자신이 만났던 인간 군상을 쉼 없이 늘어놓다가 끝내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들려주었다.

    “애틋하게 배웅하는 남자 말이야. 택시에 같이 타기는 애매하고, 혼자 보내기는 걱정되고. 아까 그 남자가 우리 아가씨한테 더 마음이 있어 보이던데, 뭘.”

    “아유, 그럴 리가요.”

    나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했다.

    택시에서 내리는데 기분이 묘하게 들떴다.

    떠나가는 택시를 바라보던 그의 시선에 담긴 애틋함이 나만의 착각이 아니었다는 판단이 서자, 심장이 몹시도 두근거린다.

    내일부터 회사 생활이 더욱 즐거워질 것만 같다.

    근데 이 꿈은 언제 깨는 거지?

    혹시 내가 한을 풀면 깨는 건가?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꿈속에서 헤매는 기분으로 집 안에 들어섰다.

    “잠깐 앉아 봐라.”

    집안 분위기가 사뭇 심각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응접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나를 불러세웠다.

    나는 경계 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응시하며 소파에 다가가 앉았다.

    “만난다는 사람이 대체 누구냐? 우리 직원이야?”

    결혼 전에는 아버지의 충견처럼 굴던 강재만이 그새 개같이 일러바쳤나 보다.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감히 아비 뜻을 무시하고 회사에서 보란 듯이 남자를 만나? 내가 대체 백헌에 어떤 얼굴로!”

    아버지가 나에게 호통을 쳤던 일은 없었다. 가족을 향해 저렇게 불같이 화내는 일도 처음이다.

    당연하지, 고분고분 당신 말을 다 주워섬겼으니까.

    “나를 어떻게 키우셨는데요? 아버지 인형처럼 키웠죠!”

    “좋은 집에서 호의호식하고 살았으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좋은 옷 입혀 주시고, 좋은 집에서 살게 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근데요. 그건 감정 없는 인형한테도 가능한 일이에요. 다른 애들이 친구 관계로 고민하던 사춘기 때, 내가 왜 그런 고민을 안 했는지 아세요? 친구가 하나도 없었으니까!”

    나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거리며 씩씩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버지가 원하는 대학에 가고, 아버지가 원하는 사람만 만나고,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입사해서! 이제껏 내가 원하는 건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요! 결혼은 내가 원하는 상대와 합니다! 그리고 백헌 볼 면목이 없으세요?”

    나는 한심하다는 듯이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백헌의 감언이설에 속아서 재산을 송두리째 잃고,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독단적인 성격은 내 꿈에서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 그게 아버지라고 할지라도.

    “백헌 조사 다시 해 보세요. 거기서 비밀리에 개발했다는 홈 제어 의료 지원 기술 네덜란드 모 대학 연구진이 먼저 개발한 겁니다. 우리가 상용화하려고 할 때, 특허 문제 걸릴 거예요. 그런 기술이 있으면 왜 쉬쉬하면서, 아버지한테만 읍소하겠어요?”

    “그거야. 우리가 사돈을 맺기로 했고”

    “사돈이 아니라 사기죠. 사기 결혼에 팔려 가고 싶지는 않아요. 결혼은 제가 원하는 상대와 하겠습니다.”

    단호한 말을 내뱉자마자, 나는 소파를 박차고 일어났다.

    “담은아, 다시 생각해 봐. 재만이가 네 걱정이 됐는지, 아까도 여러 번 전화 왔어.”

    “이상하지 않아요? 나랑 아무 사이도 아닌데, 그렇게 걱정하는 거.”

    “그야. 널 그만큼 아끼고 좋아하니까.”

    나는 한숨을 훅 몰아쉬었다.

    “정리할게요. 강재만이 나한테 하는 건 스토킹. 지금 엄마, 아빠가 나한테 하는 건 가스라이팅. 아시겠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입을 쩍 벌린 채로 나를 응시했다. 식전 차를 들고 나오던 구 실장은 살벌한 분위기를 감지한 듯 뒷걸음질 쳤다.

    나는 벙찐 부모님을 뒤로하고 방으로 향하다가 말고 돌아섰다.

    “강재만이 벌써 이야기했겠네요? 내가 만나는 사람이 누군지. 신재생에너지 사업본부, 본부장 민서후요. 제가 오래 짝사랑했어요. 이제 막 썸 타기 시작했으니까, 훼방 놓을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정웅그룹 회장님 비선 실세 아닌가요?”

    아버지가 경영인으로서 엄청난 비리를 저지를 만큼 부도덕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웅그룹 회장님 맏딸인 내 행보가 오너리스크가 될 수도 있죠.”

    그러니 나를 건드리면 폭발해 버리겠다는 협박이나 마찬가지였다.

    기업 경영 후계 구도가 흔들리면, 주식은 폭락하고, 경쟁 그룹은 개떼처럼 달려와 물어뜯기 바쁠 것이다.

    “쟤, 저, 저!”

    아버지가 급기야 뒷목을 잡으셨다. 안타깝게도 정웅그룹 회장님의 건강은 매우 양호했다. 내가 마흔이 되기 전까지 갑자기 쓰러지는 일도 없었다.

    나는 유유히 침실이 있는 2층으로 향했다.

    세상 홀가분한 기분이 들어서 가슴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금세 구 실장이 침실로 따라 들어왔다.

    “그런 반항은 사춘기 때 했어야죠.”

    그녀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맴돌았다.

    “어떻게 부모님께 대들 수 있냐고 혼내려고 오신 거 아니고요?”

    구 실장은 나의 핸드백과 재킷을 받아 들며 더욱 진하게 웃었다.

    “스물여섯이 누구한테 혼날 나이는 아니죠.”

    그러면서 어린아이를 대하듯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 담은 양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결혼 이야기가 나오고.”

    결혼 이야기를 하며 서운한 눈물을 보이는 사람은 구 실장이 유일했다.

    “저 아직 시집 안 갔거든요?”

    “만난다는 그분은 좋은 분이죠?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 솔직히 담은 양이 싫다고 해서 말하는 건데요. 저는 강재만 그 사람 눈빛이 좀 그렇더라고요. 욕심을 잔뜩 숨긴 눈이었어요. 담은 양 볼 때도 꼭 비싼 물건 탐하듯 보고.”

    어머니가 해 줘야 할 말을 구 실장이 대신했다. 나는 상체를 숙이며 구 실장을 와락 끌어안았다.

    “이모. 내 옆에 오래오래 있어야 해요. 만수무강하세요, 꼭.”

    어릴 때는 곧잘 이모라고 불렀었다. 그런데 자신에게 이런 천한 일을 하는 자매는 없다며 어머니가 호통을 치는 바람에 호칭이 구 실장으로 굳어졌다.

    “그래야죠. 우리 담은이가 낳을 아이도 내가 봐줘야지.”

    나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 나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었다.

    꿈에서는 가능할까?

    “응, 꼭 봐줘요. 아들, 딸 골고루 많이 낳아야지. 그 사람 닮으면 애들도 예쁠 거야.”

    나는 택시 뒤꽁무니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남자를 떠올리며 애써 웃었다.

    핸드백 안에서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시의적절한 타이밍에 전화를 걸 줄 아는 민서후였다.

    “내가 자리를 피해 줘야겠네.”

    구 실장이 웃으며 침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으으음.

    수화기 너머에서 이상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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