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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4/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4화

그가 황당하다는 듯이 로비 천장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농담이었어요! 애는 무슨…….”

나는 농담이라고 얼버무리면서도 그의 표정 변화를 기민하게 살폈다.

단정한 눈썹을 한 번 들썩거린 그가 이내 평정을 되찾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방금 내가 한 이야기가 돌고 돌아서 내 귀에 들어오는 일은 없으면 합니다.”

비밀로 삼아야 할 일이다?

나는 그를 더 건드려 보기로 했다. 어디서 발끈하려나, 궁금하기도 하고, 감정이 격해져서 진실의 일부를 털어놓기를 바랐다.

“그럼 통화를 조심하셨어야죠.”

“남의 통화 엿들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 안 듭니까?”

그는 화가 난 것처럼 보였지만, 말투는 반듯하니 정중했다.

“엿듣지 않았습니다. 밀폐된 엘리베이터에서 본부장님이 제가 있는 줄 모르고 통화하신 거잖아요.”

그가 돌아서려던 순간이었다.

“담은 씨, 여기 있었네요. 전화 통화도 안 되고 한참 찾았어요.”

뒤에서 등골이 오싹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상몽이 아니고, 악몽이었나? 이놈이 왜 여기서 나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매혹적인 미소를 머금은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강재만, 내가 가진 전부를 빼앗고, 부모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으로 모자라, 아들을 시켜 제 엄마를 살해하게 했던 악마 같은 남자.

내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렸던 남자가 나를 탐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퇴근해요?”

숨이 턱 막혀 왔다. 토트백을 틀어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죽음의 순간, 비릿한 웃음을 흘리던 남편의 목소리가 귓전을 왕왕 울렸다.

“네, 이제 퇴근하려고요.”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길게 흘러내렸다. 관자놀이에서 심장이 뛰는 듯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 차로 가요. 집까지 데려다줄게요.”

강재만이 사람을 홀릴 듯 화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를 통해 이미 공식적인 선 자리는 거절한 상태였지만, 강재만과는 진작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래도 강재만이 이런 식으로 나를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렸다. 꿈속 특기라던 급발진 버튼은 대체 어디로 간 건지 모르겠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어서 입술만 짓씹었다.

“미안하지만.”

우물쭈물하는 사이, 이지적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정담은 씨는 나랑 선약이 있는데요. 강재만 과장?”

민서후가 내 옆으로 한 발짝 붙어서며 강재만을 향해 말했다.

정중하지만 특유의 경계심이 어린 목소리였다.

‘집에서 날 기다리는 사람은 내가 평생 책임져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 말을 내뱉을 때와 같은 어조였다. 보호하고 지켜 줘야 하는 의무감이 서린 음성.

눈치 빠른 민서후는 정의감도 넘쳐흘렀다. 내가 강재만 때문에 당황한 것을 알아차리고 끼어든 것처럼 보였다.

이러니 내가 민서후를 짝사랑했지.

강재만은 정웅그룹의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있었다.

백헌전자의 맏아들인 그는 경영권 승계에는 관심이 없다며 평사원으로 정웅그룹에 입사했다.

능력 있고 정직한 젊은이라고, 부모님이 강재만을 높이 평가한 이유였다.

“그쪽은 누구?”

강재만이 세상 오만한 눈빛으로 민서후를 훑어보았다. 감히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 자격이 있느냐는 듯이 하찮게 보는 시선이다.

“정웅에너지 소속 민서후입니다. 정담은 씨 소속 본부, 책임자고.”

강재만의 눈동자에 짜증이 도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능력 면에서 강재만보다 더 월등한 민서후다. 나이는 민서후가 더 어렸지만, 직급은 민서후가 더 높았다.

“담은 씨, 오늘 이쪽이랑 저녁 약속 있어요?”

민서후의 말을 못 믿겠다는 듯이 강재만이 떠보는 투로 물었다.

“네, 있어요.”

나는 강재만의 뱀 같은 시선을 피하려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민서후가 애써 거짓말한 보람도 없이 나는 바보처럼 떨고 있었다.

“예약을 6시 반에 해 뒀는데, 서둘러야겠네요.”

민서후가 손목시계를 한번 확인하고는 눈을 부릅떴다. 흘끗 본 그의 손목시계는 엉뚱한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계가 맞지 않아서 당황한 건가?

“나한테도 시간 내줄 거죠? 오늘 이렇게 허탕 칠 줄은 몰랐네요.”

강재만이 어울리지 않게 애처로운 목소리를 냈다.

“나중에요.”

나는 어정쩡한 대답을 내뱉고는 돌아섰다.

“가요, 본부장님.”

민서후의 커다란 손이 내 팔꿈치를 부드럽게 움켰다. 팔꿈치에서 시작된 전율이 전신을 훑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겨우 팔꿈치를 의탁했을 뿐인데, 구름 위를 걷는 듯하다.

“담은 씨, 이따 전화할게요. 집에 잘 들어갔는지. 그리고…….”

강재만에게서 이미 등을 돌린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재만은 할 말이 남아 있다는 듯이 두 사람을 붙들듯 질척거리는 말투로 떠들어 댔다.

“좀 당황스럽네요. 이런 상황.”

나보다 민서후가 먼저 돌아보았다.

“뭐가 당황스럽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지금 그림이 너무 우스워서.”

강재만은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처럼 굴었다.

“정담은 씨, 나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었어요?”

강재만은 마치 제 것이었던 물건을 빼앗기기라도 한 것처럼 억울해했다.

“무슨 오해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랑 정담은 씨는 업무상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겁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오만방자한 강재만과 달리 민서후는 끝까지 정중했다.

그는 내 팔꿈치를 살짝 잡은 채 사옥 밖으로 나를 이끌었다.

주변 회사의 출퇴근 인파까지 섞여서 길에는 사람이 많았다.

“무슨 일입니까?”

인파 속에서 그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나는 걷다가 말고 잠시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강재만 안 따라와요.”

악귀 같은 놈이 따라붙은 줄 알고 잔뜩 쫄아 있던 걸 어떻게 알았지?

“혹시 강재만 과장이랑 무슨 일 있었습니까? 왜 이렇게 떨어?”

무슨 일? 있었다. 그가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일.

피의 복수를 해 줘도 모자랄 판인데, 나는 숨통이 끊어지던 순간을 떠올리며 벌벌 떨고 있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어요.”

나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

스물여섯의 정담은은 아직 아무 일도 겪지 않은 게 맞다.

“설명이 더 필요한 것 같은데요.”

하지만 민서후는 물러서지 않았다. 찡그린 그의 미간에는 우려가 고여 있었다.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지난 삶이 한 줄로 요약되었다.

“혹시 강재만 과장한테 무슨 일 당한 겁니까? 그게 아직 진행 중이고?”

묻는 목소리가 더욱 심각해졌다. 차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든 일을 당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 모든 게 내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도.

그런데 꿈속에서 다시 만난 첫사랑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수야 없지 않은가?

“정담은 씨, 강 과장 때문에 도움이 필요했던 겁니까? 그래서 나한테 갑자기 말 걸었던 거고?”

걱정과 의심이 공존하는 말투로 그가 물었다.

“도움이……. 필요해요.”

어쩌면 이게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너울거렸다.

저 남자를 떼어 내야 하거든요, 제 남자 친구인 척해 주시겠어요?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나는 이런 일에 사적으로 끼어들고 싶지 않아요. 도움이 필요하면 인사과 통할 수 있도록 조처하겠습니다.”

아까 로비에서 기민하게 굴었던 믿음직스러운 남자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이 이상 복잡한 일에 엮이고 싶지 않다는 듯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사적인 개입은 하지 않겠지만, 본부장으로서 소속 직원을 챙기겠다는 책임감 있는 태도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아까 로비에서는 도와주셨잖아요.”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훅 내쉬었다.

“그런 상황에서 모른 척할 만큼 내가 나쁜 놈은 아닙니다.”

“그럼 한 번만 더 도와주세요.”

“정담은 대리.”

여태 이름만 부르던 그가 직급을 갖다 붙였다. 새삼 거리감이 느껴졌다.

“강재만 과장……. 직원들 사이에서 소문 안 좋잖아요. 저는 그걸 너무 늦게 알았어요. 저한테는 특별히 잘해 주셨거든요.”

재만이 나에게만 예외적으로 굴었다는 대목에서 그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살짝 물들었다.

서늘하기만 한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강재만 과장이 왜 저한테만 특별히 호의적으로 굴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승부수를 띄우는 심장이 거칠게 날뛰었다.

“내가 민서후 본부장님께 뭘 해 드릴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이상한 오해를 한 듯 그가 미간을 찡그렸다.

“인생을 바꿀 기회를 드릴 수도 있어요.”

나는 쐐기를 박듯 외쳤다.

민서후, 당신 5년 후에 죽어!

지금 당신이 목을 매고 있는 프로젝트가 진행될 연구소에서 폭발 사고로 죽는다고!

만약 내가 민서후에게 고백하고, 그와 결혼했다면 죽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수도 없이 많이 했었다.

내 꿈에서만큼은 그가 행복한 얼굴로 만수무강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민서후를 올려다보았다.

꿈이라고 하기엔 심장이 너무도 생생히 빠르게 뛰었고.

꿈이 아니라고 하기엔 나를 내려다보는 민서후의 모습이 너무도 근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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