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남자와 결혼해
3화
살면서 그는 나에게 단 한 번도 개인적인 전화를 한 적이 없었다.
업무 용건은 이메일로만 소통했었고.
“잠시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아버지가 숟가락을 놓기 전에는 먼저 식탁을 떠나는 일도 물론 없었다.
부모님의 망연한 눈길이 뒤통수에 꽂히는 듯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정도의 반항에도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 부모님이 강요하는 결혼을 막으려면, 따가운 눈총쯤 감내하고 더 세게 나가야 한다.
“여보세요?”
- 정 대리. 퇴근 잘 했습니까?
누가 내 핸드폰에 카푸치노 엎질렀어?
그만큼 그의 목소리는 감미로웠다.
“네, 잘 했습니다. 본부장님도 퇴근…….”
- 잘 들어갔으면 됐어요. 내일 봅시다.
전화가 뚝 끊겼다. 그는 내가 무사히 귀가했는지 확인하려고 전화를 걸어온 모양이었다.
내가 걱정돼서?
입가가 꼬물거리기 시작했다.
51세에 죽어서 26세의 꽃다운 시절을 꿈꾸고 있는 나는 마치 마음마저도 그 시절로 완전히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여자는 나이를 먹어도 소녀 감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소녀처럼 설레고,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고, 소녀처럼 망상에 젖어 갔다.
아까 그냥 집무실에서 입술을 깨물고 덮쳤어야 했나?
아니, 이건 소녀가 할 만한 망상이……. 뭐, 그렇다고 치자.
아무튼, 나는 저승행을 앞두고 부모님께 반항을 시작했고, 첫사랑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자고 마음먹었다.
결혼! 그래, 민서후랑 결혼을 하는 거다!
급발진 같기는 하지만, 원래 꿈에서는 하늘도 날아다니고, 괴물도 물리치고, 천하무적이 되기도 하지 않는가?
민서후를 떠올리자 입가가 또다시 꼬물거렸다. 망상에 젖은 눈가는 몽롱하게 풀렸고, 스물여섯의 육체는 화사한 빛으로 달아올랐다.
***
그런데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그에게 여자가 있는 것 같다.
나의 남편이 되어야 할 남자에게!
나는 누군가와 통화 중인 그를 티 나지 않게 흘끗거렸다. 속쌍꺼풀이 진 깊은 눈가에는 웃음이 고여 있었고,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상냥했다.
“지금 끝났어요. 응, 집으로 바로 가야지. 맛있는 거 사 갈까요?”
혈육을 저렇게 상냥하게 대하는 대한민국 국민을 아시는 분은 시끄럽게 손을 들어 주세요!
분명 피붙이를 대하는 목소리가 아니다. 애정이 담뿍 담긴 말투는 연인을 향한 밀어처럼 느껴졌다.
분명 여자는 없을 텐데?
며칠 동안 야금야금 민서후에 관한 뒷조사를 해 보았다.
이름 민서후, 나이 32세, 키 188cm, 몸무게 76kg, 특전사 병장 전역, 경영학 전공, 대학 졸업과 함께 정웅그룹 입사, 정웅에너지 소속, 현재 사귀는 여자 없음.
“그래요. 나도 보고 싶어요. 얼른 갈게요.”
이건 누가 봐도 동거인을 향한 달콤한 인사가 아닌가!
뒷조사가 틀렸나?
꿈에서라도 첫사랑과 결혼하려는 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인가?
누군가를 향해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솜털처럼 부드럽고, 다정했다.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닌데, 질투가 나고도 남을 만큼.
밀폐된 엘리베이터 안, 나의 시선은 그의 뒷모습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점심시간마다 사내 피트니스 센터에서 운동한다는 그는 다부진 몸을 가지고 있었다. 육군특수사령부에서 공수특전사로 복무한 덕에 훌륭한 체격만큼이나 무도 실력도 출중했다.
저 두꺼운 팔뚝으로 막, 아주 그냥 막!
또다시 망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슈트 재킷 위로 드러나는 남자의 몸을 관찰하던 나의 시선이 비스듬히 엿보이는 얼굴로 향했다.
티 없이 맑고 투명한 피부와 검고 짙은 눈썹의 단정한 조화, 속쌍꺼풀 진 눈매는 깊었고, 웃을 때마다 붉은 입술이 매혹적인 선을 그렸다.
선하게 잘생긴 얼굴, 선한 인상만큼이나 품행이 바르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이제 퇴근하시나 봐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그가 흠칫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나의 존재를 이제야 알아차린 듯 놀란 눈치다.
30층에서 내려오는 내내, 우리는 단둘이 엘리베이터에 함께 있었습니다만?
“아, 네.”
“집에 기다리는 분이 계신가 봐요?”
특별히 관심을 두고 묻는 말은 아니라는 듯이 자연스럽게 덧붙였다.
“저도 엄마가 기다리시는데, 얼른 들어가야겠다.”
사실 집에 누굴 숨겨 두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서 돌아가실 지경이다.
죽었는데, 또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궁금증을 해결해야만 한다!
컴컴한 꿍꿍이를 숨기고 사람을 대하는 일에 능숙한 성격이 아니다.
착해 빠졌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착하게 살다가 살해당했다. 이제 그런 삶은 안녕이다.
“들어가요, 그럼.”
그는 부드럽게 선을 긋듯 인사하고는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본부장님!”
성큼성큼 앞서 걷는 그의 뒤로 얼른 따라붙었다. 그는 나의 부름에도 멈추어 서거나,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조바심이 났다. 꿈에서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일이다. 끝을 예견할 수 없으니, 이상한 집착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첫사랑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강한 집념 말이다.
“본부장님은 외국어 공부 어떻게 하셨어요? 회사 다니시면서 자격증도 따셨던데, 저녁 시간 이용해서 학원 다니셨어요? 저도 공부를 더 해야 하는데, 다니신 학원 소개받을 수 있을까요?”
“아니요. 저녁에는 시간이 없어서.”
“아, 댁에 기다리시는 분 때문에, 일찍 들어가셔야 하셔서요?”
결정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가 멈춰 섰다.
“정담은 씨.”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경계의 빛이 역력했다.
“정담은 씨랑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할 만큼 친했습니까?”
“지금까지는 안 친했지만, 앞으로 친해지면 되죠.”
싱긋 웃어 보이자, 그의 미간이 꿈틀 움직였다. 못 볼 것을 봤다는 듯이 얼굴을 구기기까지 한다.
“미안하지만, 정담은 씨.”
그가 잘생긴 눈매를 접었다가 뜨며 말을 이었다.
“나는 사내에서 연애나 그 비슷한 것, 할 생각 없습니다. 지금 그럴 형편도 못 되고요.”
눈치 빠른 남자 같으니.
철벽 치는 속도가 수준급이다.
“와……. 되게 상처 되는 말이네요.”
상처라는 말이 신경 쓰이는지, 그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고개를 한번 내젓고는 입을 뗐다.
“아니, 내 말은.”
“괜찮아요.”
구구절절 이어지는 설명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제가 지금은 이 정도로 상처받을 만큼 나약하지는 않거든요.”
본래 스물여섯의 정담은이었다면, 얼굴을 붉힌 채로 황급히 자리를 떴을 것이다.
하긴 그때는 남자한테 사적인 말을 붙이는 것조차 어려워했었는데, 뭐.
“혹시 집에서 기다리신다는 분은 누구신지…….”
그가 위협적인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문제는 위협적인 얼굴조차 잘생겼다는 것!
“너무 사적인 질문이라는 생각, 안 듭니까?”
“그것만 대답해 주세요.”
그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웃었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내가 왜?”
“저한테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여서요.”
아무리 내 꿈이라고 해도 도의적인 책임과 의무라는 게 있는 거다.
첫사랑 민서후가 감히 내 꿈속에서 누군가와 살림을 차렸다면……. 내 그년을 당장 끌어내어 주리를 틀 것이니! 가 아니라…….
조용히 포기해야 하는 게 도덕적으로 옳은 선택지다.
남자를 덮치네, 마네 온갖 망상은 다 하면서 도덕을 들먹거리는 모순점은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하긴 꿈에서 사람을 죽였다고 해서 현실 법으로 처벌받지는 않잖아? 아, 꿈속에서 처벌받을라나?
“그게 왜 중요합니까?”
“제가 본부장님 좋아하거든요.”
헛! 고백해 버렸어! 뭐 어때? 꿈인데! 꿈속 고백은 불법이 아니다.
나는 특유의 맑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서 저한테는 중요한 문제고요.”
그가 한숨을 몰아쉬며 대꾸했다.
“미안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나는 사내에서 그런 일로 엮일 생각은 없습니다.”
지나치게 방어적인 그의 태도에서 누군가를 보호하려는 본능이 느껴졌다.
누군지도 모를 상대가 부럽다. 누굴까? 그가 보호하려는 대상이…….
그는 할 말 다 했다는 듯이 돌아서서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빨라지는 그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종종걸음을 쳐야만 했다.
“그럼 사외에서는요? 제가 회사를 그만두면요? 아니면 그보다 더 어마어마한 존재가 저라면……!”
그가 우뚝 멈춰 섰다.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한번 쓸어내린 그가 돌아서며 말했다.
“집에서 날 기다리는 사람은 내가 평생 책임져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나한테 시간 낭비하지 말아요.”
평생 책임져야 할 사람? 도둑 결혼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는 법적으로 결혼한 상태가 아니었다. 결혼을 앞두고 있다면, 그렇다고 말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만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다는 말로 거절하는 게 가장 쉽다.
그런데 그의 대꾸는 연인, 애인, 약혼자 등을 가리키고 있지 않았다. 보호하고, 책임져야 할 연약한 존재처럼 묘사되었다.
“혹시 집에 숨겨 둔 애라도 있나요?”
꿈속의 나는 급발진이 특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