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남자와 결혼해
2화
민서후의 집무실, 그는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앉아 있었다.
나는 벌 받는 학생이 된 심정으로 그의 앞에 서 있고.
시간이 째깍째깍 흘러갔다. 언제 깰지 모르는 꿈에서 이렇게 시간 낭비를 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하지만 내려다보이는 민서후의 얼굴은 시간 낭비가 무색할 만큼 은혜로웠다.
속쌍꺼풀이 진 눈매는 그윽했고, 꽉 다물린 입술은 음흉한 생각이 들 만큼 붉다.
저 입술은 얼마나 부드러울까?
죽음 전에 맞닥뜨린 환상적인 꿈결보다 더 매혹적일까?
“무슨 생각합니까?”
민서후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
난잡한 망상으로 머릿속을 더럽히던 나는 흠칫 놀라서 되물었다.
“따로 할 말 있다면서, 왜 그러고 가만히 서 있어요?”
네가 안 물어봤으니까요.
그는 집무실로 따라 들어온 나를 세워 두기만 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까 회의실에서 대체 뭐가 안 된다고 한 겁니까?”
일개 대리가 감히 본부장의 프레젠테이션에 끼어들어서 ‘안 돼’라고 지껄였으면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아까…….”
근데 꿈에서 굳이 본부장 눈치 보면서 논리적인 답을 찾느라 고민할 필요가 있나?
나는 솔직하게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제가 잠시 딴생각을 하다가 말이 헛나왔습니다. 실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민서후가 감정 없는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따로 할 말이 있다고 한 건?”
그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나직이 물었다. 그의 어조는 차가웠지만, 목소리는 지나치게 감미로웠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귀로 따뜻한 카푸치노를 마시고 있는 기분이다.
“할 말이 없어서 얼버무린 겁니다.”
“허!”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 쳤다.
건조하기만 했던 잘생긴 얼굴에 미묘한 감정이 고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본부장한테 이런 대리는 처음이야! 뭐, 그런?
나는 염치도 없이 어설픈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 이 상황이 웃깁니까?”
“본부장님도 웃으셨잖아요.”
나는 아까보다 더 진하게 웃었다. 진심 어린 웃음이었다.
마주한 민서후가 잘생겨도 너무 잘생겨서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어차피 내 꿈이잖아?
내 한풀이를 위한 꿈 아닌가?
내 마음대로 한다고 해도 상관없는 거잖아?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허물어지는가 싶더니 찬란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그 미소가 무섭다.
민서후가 칼날 같은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며 눈부시게 웃는 모습은 흡사 저승사자 같았다.
혹시…… 님이 진짜 저승사자? 지금 나 데리고 장난하는 거?
이러다 갑자기 옥황상제 앞으로 소환되는 순간이 오는 것인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51년을 사는 동안, 나는 착실한 사람이었다.
저승이 있다면, 거기서 벌 받을 만한 짓을 한 적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행복했냐고?
봤잖아, 아들이 나 죽인 거.
나는 끝없이 불행했고, 죽음마저 비참했다.
이승과 저승을 이동하는 중에 꾸는 꿈에서도 착실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승을 마지막으로 떠도는 추억 여행 같은 꿈이라면 한풀이를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에서 깨어나 옥황상제 앞에 무릎 꿇는 순간이 온다면, X 같은 인생 보상해 달라고 더 징징거려 볼 작정이다.
한번 죽고 났더니, 온순했던 성격마저 함께 죽었나 보다.
꿈속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전투적인 의지를 빛내고 있었다.
꿈은 확실하냐고?
그럼, 이게 꿈이 아니면, 무엇으로 설명 가능하단 말인가?
“정담은 대리.”
그가 웃음기를 거두지 않는 채 내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 하나는 정말 미치게 좋다.
“네, 본부장님!”
“집중합시다!”
나는 민서후에게 그 어느 때보다 집중했다.
너무 집중한 나머지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부릅뜬 눈으로 그를 쏘아보고 말았다.
민서후가 조용히 경고했다.
“눈에 힘 풀고.”
“집중하라고 하셔서…….”
그가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 대리……. 혹시 무슨 일 있습니까?”
죽다가 잠시 꿈속으로 끌려온 것 같습니다만.
“아니요. 아무 일도 없습니다. 다만.”
“다만?”
그가 한쪽 눈썹을 치떴다.
“본부장님이 너무 잘생기셔서 제가 잠시 정신이 혼미해진 것 같습니다.”
꿈인데, 뭔 소린들 못 하겠는가.
이 꿈을 꾸는 사람은 나고, 어차피 다른 사람들은 다 환시일 뿐이다.
민서후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로 할 말을 잃은 듯했다.
내친김에 책상을 냅다 밟고 올라가서, 스트라이프 넥타이를 끌어당긴 다음, 굵직한 목을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어 볼까?
단단한 몸에 말랑말랑한 몸을 뭉개며 창가로 밀어붙인 후, 짐승 같은 남자를 타고 오르는 거다!
그런 다음 드레스셔츠 단추가 옆으로 타다닥 튕기도록 옷을 찢어발기…….
“정 대리?”
“네, 팀장님.”
나는 하마터면 입안에 고인 침을 스읍, 하고 들이마실 뻔했다.
“지금 표정 되게 몽롱한 거 압니까?”
얼른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시치미를 뚝 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민서후가 고개를 뒤로 물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혹시 술이라도 마셨어요? 아니면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습니까? 충격받는 일 같은 거?”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민서후는 여러 가지 예를 들어가며 묻고 있었다.
“아닙니다. 저는 정말 잘생긴 본부장님께서 계신 사업부로 오게 되어서 너무 좋습니다!”
일단 잘생겼다는 말을 하기는 했는데, 여기서 뭘 더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그래, 책상을 밟고 올라갈까?
“나가 봐요.”
그는 썩 꺼지라는 듯이 고갯짓했다.
그의 집무실을 나서던 나는 가슴속 깊이 남은 음흉한 미련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나의 첫사랑 민서후는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업무 모드에 돌입해 있었다.
안녕, 나의 첫사랑.
나는 작별을 고하듯 속으로 인사를 건넸다. 첫사랑을 향한 인사는 아마도 이게 마지막이지 않을까? 꿈이 마르고 닳도록 이어질 리는 없을 테니까.
그럼, 작별의 키스를 했어야지!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음란하게 물드는 머리를 가볍게 털어 내고는 사무실로 향했다.
“다녀왔습니다!”
퇴근 후, 들어선 집은 평온했다.
식탁 위에는 호화로운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다. 눈물이 나도록 그리웠던 시절로 되돌아온 기분이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함께 둘러앉은 저녁 식탁, 안타깝게도 동생 여은은 지금 학원에 있었다. 불쌍한 우리 고3 정여은.
어머니는 오늘 다녀온 오페라 공연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그래. 오늘 백헌전자 사모랑 만났다고?”
아버지의 인자한 물음에 어머니는 해사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백헌’이라는 이름이 흘러나온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네, 안 그래도 오늘 대충 날 잡았어요. 결혼은 내년 초봄이 어떨까요?”
백헌전자는 겉만 번지르르할 뿐, 엄청난 문제를 안고 있는 회사였다.
그리고 백헌의 맏아들은 우리 집을 풍비박산 낸 나의 남편이기도 했다.
그러니 지금 나오는 혼사의 주인공은 나였다.
나의 결혼식이 있던 그 날, 웨딩 로드를 걸어 들어가면서 주위를 한번 둘러봤던 기억이 난다.
회사 사람들이 자리 잡은 테이블에는 민서후도 함께였다.
그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연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까닥했었다.
‘좋아한다는 말 한 마디 꺼낼 수 없었던 나의 첫사랑, 당신도 잘 살아야 해요.’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신랑 자리에 서 있는 강재만이 민서후로 바뀌는 상상을 했었다.
그때는 그저 상상으로만 가능했던 그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아버지.”
나는 밥숟가락을 식탁 위에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저, 결혼은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고 싶어요.”
스물여섯의 정담은은 부모님께 말대꾸 한 번 해 본 적 없는 착한 딸이었다.
“담은아.”
놀란 어머니가 아버지 눈치를 살피며 타이르듯 내 이름을 불렀다.
“딸이 못 미더워서 회사 경영 맡을 만한 사윗감 찾으신다는 것도 알아요. 백헌전자 기술력 흡수하고 싶으신 것도 알고요.”
아버지는 나와 여동생 여은을 온실 속의 화초처럼 키웠다.
그러니 그 온실이 악귀의 손에 넘어간 뒤로는 속수무책으로 망가졌던 것이다.
“백헌 별 볼 일 없어요. 그건 제가 알아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안다는 거냐?”
아버지가 미간을 찡그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화가 났다는 뜻이다.
어릴 때는 아버지가 자상하고 인자한 성품을 지녔다고 존경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독단적인 가부장제의 표본이기도 했다.
“그리고 앞으로 회사 경영은 저랑 여은이가 맡도록 할게요. 꼭 남자가 회사를 경영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요?”
아들 없이 딸만 둘을 뒀다는 사실을 늘 못마땅하게 여겼던 아버지다.
아버지에게 두 딸은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지, 키워 나갈 재목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를 사랑했다.
딸로서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했지만, 끔찍한 죽음을 겪은 후 그의 가치관까지 동의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열심히 일군 회사잖아요. 제가 아버지께 배우고 익힌 감각으로 이어 나갈 수 있게 해 주세요.”
나는 아버지의 눈을 들여다보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절대 스물여섯의 정담은은 할 수 없는 반항이었다.
후회 가득한 인생을 마감하고, 깨달음을 얻은 후에야 가능한, 일종의 봉기!
이것이 비록 현실이 아닐지라도.
그리고 나는 꿈에서라도 나의 가족이 행복하기를 바랐다.
이승의 끔찍했던 삶은 잊고, 꿈속 가족의 모습을 기억하며, 저승에서 평온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
“생각 좀 해 봐야겠구나.”
심기가 불편한지, 아버지가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담은아. 백헌전자 맏이하고는 한번 만나 보는 게 어떨까? 엄마가 약속한 것도 있고.”
돌이켜 보면 어머니는 재벌가 오너의 안사람이라는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겉치레를 중요시했었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딸의 마음이 곪는 것은 미처 살피지 못했다.
“약속이 깨지는 일도 있는 거죠. 백헌과 우리 정웅그룹의 상황을 살폈을 때, 약속을 깬다 해도 우리가 손해 볼 일은 없을 텐데요.”
어머니가 짐짓 놀란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이내 노련하게 온화한 미소를 머금으며 나를 타일렀다.
“엄마는 백헌 맏이가 참 탐나서 그래. 그런 좋은 사람 만나기 쉽지 않아.”
그런 악귀를 만나기도 쉽지 않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
“저 만나는 사람 있어요.”
생각을 거치지 않은 말이 툭 튀어나온 순간, 민서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때마침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민서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