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89)
  • 다른 남자와 결혼해

    1화

    어두운 병실, 침대 머리맡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안녕히 가세요, 어머니. 그동안 목숨 부지하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낄낄거리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스산했다.

    버석거리는 눈만 간신히 돌리자, 섬뜩한 미소를 머금은 아들의 얼굴이 보인다.

    “네 모친이 고생은 무슨. 재벌 집 맏딸로 태어나서 고생이란 걸 모르고 살았는데. 그리고 세훈아, 말은 바로 해야지. 네가 어머니라고 불러야 할 사람은 이 여자가 아니잖니, 이제.”

    이번에는 남편의 기기괴괴한 웃음소리가 병실을 요란하게 울렸다.

    재벌 집 맏딸이었던 나와 결혼한 남자는 나를 이렇게 만든 것도 모자라 회사마저 홀랑 집어삼켜 버렸다.

    평생 회사를 일군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이듬해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화목했던 집안은 남편이라는 놈에 의해 산산이 조각났다.

    “어머, 이이도 참. 아직 살아 있잖아요! 나는 저 여자, 저 착한 척하는 눈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요. 어서 저 눈 좀 감겨 봐요.”

    참하게 생긴 얼굴로 독한 말을 내뱉는 여자는 남편의 내연녀다.

    이제 내 목숨은 악마 같은 이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제가 할게요, 엄마.”

    아들 세훈이 남편의 내연녀를 향해 상냥하게 말했다.

    불임이었던 우리 부부가 입양한 아이는 기가 막히게도 내연녀가 낳은 남편의 아들이었다.

    짐작하지 못했나?

    의심은 했었다.

    그러나 바보같이 아닐 거라고 믿은 결과가 이 모양 이 꼴인 것이다.

    “그래도 가시는 길, 편안히 보내 드릴게요.”

    세훈의 손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담긴 주사기가 들려 있었다.

    한때 나의 희망이었던 아이다. 신이 있다면, 이 아이 하나만큼은 바른길로 인도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키워 준 엄마를 웃는 얼굴로 죽이는 살인자가 되어 버렸다.

    “으으윽…….”

    비명이라도 질러 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내연녀의 순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표독스러운 눈을 올려다보며 나는 고통스럽게 피를 토해 냈다.

    살고 싶어!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내 인생은 단 한 번도 나의 것이었던 적이 없었다. 결혼 전에는 아버지에게 휘둘렸고,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매장당했다.

    내 뜻대로 살았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제발……. 살려 주세요…….

    신이 있다면,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시야가 마구잡이로 떨리고, 몸이 한없이 무거워졌다. 가슴에 바위를 얹은 듯 심장은 느리게 뛰었다.

    서서히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시체는 어떻게 할 거예요?”

    “요양원 지하에서 화장해서 버려야지, 뭐.”

    남편이었던 놈과 내연녀가 즐겁다는 듯이 떠들어 댔다.

    눈초리를 타고 마지막 눈물이 흘러내렸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절대로 저런 악귀 같은 놈과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제발 살려 주세요. 나도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신조차 나를 외면하는 듯, 기도를 채 마치기도 전에 숨이 멎었다.

    “흐으윽……! 하아! 하아!”

    거친 숨을 고르며 눈을 떴다. 심장이 정수리까지 치밀어 오른 듯 머리가 지끈거렸다.

    “담은 양, 괜찮아요? 무슨 일 있어요?”

    누군가 내 이름을 크게 부르고 있었다.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담은 양, 괜찮아요?”

    문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집안일을 도와 온 구 실장의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 방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그것도 결혼 전 사용하던, 눈물 나도록 그리웠던 침실.

    내가 왜 여기 앉아 있지?

    침대 맞은편에 놓인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심각하게 젊다. 손을 들어 뺨을 어루만졌다.

    “와!”

    주름 하나 없는 매끈한 뺨의 감촉에 감탄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주름지고 앙상했던 손은 복숭아처럼 보송보송했다.

    “담은 양? 들어가도 될까요?”

    “네, 들어오세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는 사이, 구 실장이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늘부터 새로운 사업부로 출근한다고요?”

    구 실장이 레몬을 띄운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대리석 트레이에 받쳐 든 채로 웃으며 다가왔다.

    “출근이요?”

    나는 멍하니 되물으며 구 실장을 응시했다. 다가오는 구 실장은 겨우 40대 중반으로 보인다.

    환갑을 훌쩍 넘기고 병환으로 죽은 구 실장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라서 소름이 오싹 끼쳤다.

    “스트레스가 많았나 봐요. 악몽을 꿨나 보네. 이 땀 좀 봐.”

    구 실장이 물 잔을 건네며 안쓰럽다는 듯이 미간을 찡그렸다.

    나는 구 실장의 얼굴을 한 번, 그녀가 내민 물 잔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손바닥을 쫙 펼쳐서 나의 오른뺨을 세게 후려갈겼다.

    “어머! 담은 양!”

    “구 실장님. 죽었는데도, 뺨이 이렇게 아플 수가 있나요?”

    세기 조절이 미숙했던 탓인지, 뺨이 얼얼하다 못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신소리 마시고, 어서 일어나요! 새 사업부에 출근하는데, 지각할 거예요? 회장님은 벌써 일어나셔서 운동하고 계시다구요.”

    구 실장이 더는 못 들어 주겠다는 듯 엄혹하게 굴었다. 구 실장은 나의 유모나 다름없었기에 그녀에게만큼은 어리광을 곧잘 부리곤 했었다.

    “새 사업부……?”

    “그래요! 신재생에너지 사업본부!”

    삼도천을 오가는 뱃사공이 강을 휘젓는 노로 뒤통수를 때린 기분이다.

    “실장님……. 후우.”

    나는 가슴이 들썩이도록 숨을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오늘이 며칠이죠?”

    “아이참, 오늘따라 왜 이러실까? 10월 1일이잖아요!”

    신재생에너지 사업본부가 출범한 것은 무려 25년 전 가을의 일이다.

    “내가, 올해 몇 살이죠?”

    구 실장의 얼굴에 걱정이 어리기 시작한다.

    “꽃다운 스물여섯이시죠, 담은 양.”

    그러면서 상냥하게 대꾸하고는 내 안색을 빠르게 살핀다.

    저승사자가 나를 저승으로 데리고 가다가 길을 잃어서 엉뚱한 세상에 떨어뜨린 것일까?

    아니면, 고단했던 나의 삶이 불쌍한 나머지 신이 내 기도를 들어준 것일까?

    어쩌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마주한 환상인지도 모르겠다.

    내 죽음이 안쓰러워서 가장 꽃다웠던 시절로 잠시 되돌려 놓은 것인지도.

    이승을 마감하기 전, 사랑하는 이들과 좋았던 시절을 추억하며 작별 인사를 나누는 시간.

    이를테면 죽음 직전의 환상몽 같은 걸까?

    ***

    “신재생에너지 사업본부 본부장을 맡은 민서후입니다.”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대회의실에 고요히 울려 퍼졌다.

    맞아, 신재생에너지 사업본부장이 민서후였지.

    짙고 고른 눈썹, 기다랗고 그윽한 눈매와 우뚝한 콧날이 그리는 T 존이 명화처럼 아름다운 얼굴이다.

    민서후, 그는 나의 첫사랑이었다.

    가슴앓이만 하다가 고백 한 마디 건네지 못한 채, 나는 아버지가 정한 남자와 결혼해야만 했었다.

    ‘문제가 된 일은 제가 직접 처리하겠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본부장님이 그런 일을 하세요?’

    당시 연구소장이 회사를 뒤집어 놓은 일이 있었는데, 사업본부장인 그는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사업본부 부서원들을 보호했었다.

    잘못하면 자리를 내놓을 수 있는 순간이었는데도 그는 연구소장과의 불화를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사실 민서후가 잘못했던 것은 하나도 없는데도.

    ‘이런 일 하라고 본부장 자리에 앉아 있는 겁니다. 혹시 연구소장이 부서원들에게 부당한 요구를 할 경우, 무조건 나한테 보고해요.’

    나는 그때의 민서후를 두고두고 떠올렸었다.

    이후 연구소장은 교체되었고, 민서후는 몇 년 동안 본부장 자리를 굳건히 지켜 나갔다.

    그는 인턴 직원조차 허투루 대하지 않았고, 일을 배우는 신입에게는 더욱 자상했다.

    나 역시도 그의 자상함에 반했었고.

    하지만 그를 향한 마음은 조금도 드러내지 못한 채, 아버지의 뜻에 따라 강재만과 결혼해야만 했었다.

    믿음직스럽고 반듯했던 민서후에 대한 기억은 비열하고 오만했던 남편과 끊임없이 비교 대상이 되었었다.

    끔찍했던 남편의 얼굴을 떠올리는 바람에 오싹 소름이 돋아난 순간이었다.

    “야……. 정신 차려.”

    입사 동기 유수아가 손등을 툭 부딪쳐 왔다.

    “아, 안녕하십니까? 정담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사이, 민서후가 나를 흘끗 보았다. 찰나 눈이 마주쳤다.

    검고 그윽한 시선과 마주한 순간, 마치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미숙했던 스물여섯 정담은으로 완벽하게 돌아간 듯한 착각이 일었다.

    심장이 몹시도 심각하게 두근거렸다.

    “집중합시다.”

    민서후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냉소적인 질책은 자기소개 타이밍을 살짝 놓친 나를 향해 있었다.

    꿈이 뭐 이렇게 생생해?

    나는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나대는 심장을 잠재우기 위해 침을 꼴깍 삼켰다.

    “죄, 죄송합니다.”

    당황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내가 죽은 나이 51세, 그런데 나는 그간 쌓아 올린 연륜 따위 저승사자에게 팔아먹은 듯 수줍어하고 있었다.

    죽다 말고 꾸는 꿈에서 첫사랑 만난 게 가슴 설렐 일이야?

    설렌다. 죽었는데도, 죽도록 설렌다.

    언제 깰지 모르는 꿈이지만, 오랜만에 마주한 나의 첫사랑 민서후는 그만큼 근사했다!

    회의 내내, 나는 민서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민 본부장님, 여자 친구 없으시지?」

    아까 내 손등을 툭 쳤던 수아가 태블릿 PC 위에 메모를 휘갈겼다.

    나는 메모를 한 번, 수아의 얼굴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수아는 야릇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몰라.」

    「아마 없을걸? 내가 아는 한 없어.」

    내가 아는 범주 안에서도 민서후는 여자 친구가 없었다. 그리고 민서후는 5년 후, 연구소 폭발 사고로 젊은 나이에 사망한다.

    “안 돼.”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순간, 수아가 추가로 작성한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본부장님 내 친구 소개해 줘야겠다! 사람 너무 괜찮잖아. 그치?」

    수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의아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회의실 연단에 선 남자도 불만스러운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정담은 대리.”

    “네, 본부장님.”

    “뭐가 안 됩니까?”

    나의 첫사랑 민서후는 사업본부의 방향성에 관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 중이었다.

    “아, 그게. 나중에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칼날 같은 시선으로 나를 찔러 죽일 듯이 바라보았다.

    이미 한번 죽은 몸입니다만.

    갑작스레 떠오른 잡생각에 냉소적인 미소를 머금은 순간, 민서후가 입을 열었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리고 정담은 대리는 따로 좀 봅시다.”

    혹시…….

    죽어 가던 내가 느닷없이 생생한 꿈을 꾸는 이유가…… 살아 있을 때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한을 풀어보기 위함일까?

    한 맺힌 첫사랑 민서후가 나에게 따라오라는 듯이 턱짓하고는 회의실을 걸어 나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