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
해가 바뀌고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벨담과는 달리 승전의 영광을 입은 아르나톨의 사람들은 평화로운 삶을 이어 나갔다.
물론 그들 또한 전쟁 얘기라면 치를 떨곤 했지만, 또 다른 전쟁 속에서 살아 나온 여자의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나는 한동안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 살아야만 했다. 아르나톨의 사람들에게는 내가 저술한 자서전이 있었고, 이야기 밖의 나에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그림자처럼 조용히 살아왔다.
잡지사에서는 팬레터가 끝없이 쏟아진다며 고충 아닌 고충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 편지들을 한 아름 안고 집에 가서 하나하나씩 뜯어 보았다. 얼마 동안은 그게 내 일상의 전부였다.
편지를 뜯어 보면서, 나는 발신자의 이름을 꼭 확인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서, 그가 내게 편지를 보내오는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1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면서 나는 많이 덤덤해지고 무던해졌다. 이제 자일스가 나오는 꿈을 꾸고 울면서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꾸준히 내 꿈에 등장하고는 했다. 침대맡에 누워서, 그는 내게 이런저런 것들을 물었다.
요즘 어때? 식사는 잘 챙기고 있어?
네가 잘 지내지 못할까 봐 겁이 나.
그런 꿈을 꾸고 난 때면 나는 항상 꽃다발을 들고 그의 묘비에 직접 찾아갔다. 시신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장례식에 참석했던 기억은 난다. 비밀리에 치러진 장례식이라 참석자는 거의 나뿐이었다.
물론 땅 밑에 묻힌 시신은 없었다. 단지 의례적으로 준비한 관과 묘비만이 있을 뿐이었다.
구조선이 도착했을 때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나는 영영 바닷속에 가라앉아 버린 그의 영혼이라도 이곳에 편안히 잠들었기를 바랐다.
내가 텅 빈 무덤 앞에 찾아가는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묘비에 그의 이름이 적힌 것을 보고도 나는 이제 울지 않을 수 있었다. 그에게 안부를 전하고, 묘비 앞에 얼마간 앉아 있다가 꽃다발을 두고 돌아오곤 한 지가 벌써 1년째였다.
가끔씩은 자일스가 내가 두고 온 수선화를 들고 나타나는 꿈을 꿀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울고 만다.
파문 없이 평화롭지만 외롭고도 고요한 호수 같은 삶이었다.
나는 혼자서 수프를 끓여 먹다가 문득 생각했다.
자일스는 내가 이렇게 사는 걸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내가 묘비에 찾아가 꽃을 갖다 놓는 것보다는 더 많은 걸 내게 원할 거라고.
불현듯 그가 내 피아노 연주를 좋아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인연이 시작된 건 다 피아노 때문이었다. 자일스는 나만큼이나 내 연주를 사랑했다.
아마 지금도 그럴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곧 이 조용한 생활을 청산하기로 마음먹었다.
*
내가 공식적으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이번이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내 이름으로 피아노 연주회를 열었다. 아르나톨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는 연주회였다.
연주회를 열고 싶다는 말을 들은 관계자는 왜인지 몰라도 크게 기뻐했다. 그는 내게 오케스트라나 일정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다가 마지막에 물었다.
‘그런데, 연주하고 싶은 곡이 따로 있으신 모양이지요?’
물론 내게는 생각해 두었던 피아노 협주곡이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일스는 그 작품을 제일 좋아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이 연주회는 그를 위해 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연주홀에 모였다. 지오다 요원의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정말이지 대단한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가장 큰 홀을 빌렸는데도 관객석이 다 차 버려서 입석까지 허용해야 할 정도였다.
이번에 나는 드레스 대신 정장을 입고 연주하기로 했다. 관계자는 참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드레스가 참 어울리셨을 텐데.’
그러나 나는 화려한 드레스를 걸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정장 차림으로 무대에 오르고 싶었어요.’
‘뭐, 그래도 키팅 양은 정장 차림도 잘 어울리시니까요.’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사람을 시켜서 꽃다발을 보내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부득부득 고집을 부렸다.
‘아무튼, 성공적인 연주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는 오케스트라를 등 뒤에 거느린 채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 새하얀 건반이 조명을 받아 반질반질 빛났다.
나는 지휘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호른이 힘차게 울었다. 웅장한 호른에 힘입어 현악 파트가 계단을 오르듯 음계를 서서히 상승시켜 올라갔다. 오케스트라가 첫마디를 떼고 나면, 이제 피아노가 이야기를 시작할 차례가 온다.
나는 건반을 내려다보았다.
오래간만에 듣는 피아노의 음성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키팅 양, 정말 훌륭한 연주였습니다!”
요원이 내게 박수를 보냈다. 나는 공연장 직원들로부터 전달받은 수많은 꽃다발들에 파묻힌 상태로 겨우 대답했다.
“고마워요.”
“아니, 피아니스트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았잖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제가 먼저 연주회를 열자고 할 걸 그랬어요.”
“너무 과찬하지 마세요. 전 그 정도로 대단한 피아니스트는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지금 들고 계신 꽃다발의 숫자 좀 보세요.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이 정도로 사랑받기도 쉽지 않다니까요?”
심지어 대기실 소파 위에 내가 든 것보다 두 배는 더 많아 보이는 꽃다발과 선물들이 쌓여 있었다. 나는 곤경에 처한 사람처럼 한숨을 쉬었다. 저걸 어떻게 다 들고 가지…….
“나중에 시들어 버릴 거란 사실이 안타깝네요.”
“꽃이 시드는 건 중요하지 않죠. 지금 이 순간을 가장 화려한 모습으로 반기는 게 이 녀석들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귀중한 찰나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는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리고 제가 빠지면 섭하겠지요.”
“여기에 뭘 더 추가하겠다고요?”
“키팅 양! 저희가 알고 지낸 지 벌써 1년째예요! 꽃다발 하나 없이 찾아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죠! 적어도 우리 아르나톨에서 그런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랍니다.”
“정중히 사양할게요.”
“저번에 제가 꼭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이미 꽃은 주문해 놨다고요! 정말 안 받으실 건가요? 꽃 가게에서 제일 비싼 걸로 사 온 건데.”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꽃다발들을 잠시 내려놓고 그의 것을 받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새로운 꽃다발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건 어디 있는데요?”
“지금 배달 중일 거예요. 어디 보자…… 곧 오겠네요. 사정이 있어서 좀 늦는다나 봐요.”
제대로 오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 올게요. 그는 변명 같은 말을 남기고는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얼떨결에 혼자 남은 나는 요원의 이름을 외쳐 불렀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1분이 지나고 5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충분히 오래 기다렸다는 생각이 들 즈음 더는 참지 못하고 대기실을 나갔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고요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뭐지? 그새 다들 퇴근했나?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을 때…….
나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았다.
남자였다. 나와 비슷한 옷을 입은 남자. 검은 머리를 가졌고…… 키가 컸다. 그는 꽃다발을 든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 동안이나 꽃다발을 만지작거리던 남자가 이내 몸을 돌렸다.
그와 내 눈이 마주쳤다.
익숙한 얼굴의 남자는 순간 당황했는지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곳엔 오직 그와 나뿐이었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안녕, 안나.”
나는 그 목소리를 알았다. 1년이 지났지만 그의 목소리만큼은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꿈에서 계속 듣던 목소리였으니까.
“그러니까…… 네 마음에 들면 좋겠는데. 보다시피 가장 예쁜 것으로 골라 오기는 했는데…….”
내가 더 듣지 않고 그의 품으로 뛰어든 탓에 자일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쩌면 이건 또 다른 꿈일지도 모른다. 평소보다 조금 더 생생한 꿈 말이다. 나는 이 꿈이 깨기 전에 그의 얼굴을 더 가까이에서 봐 두고 싶었다.
그는 한 손에 꽃다발을 든 채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변함없이 진실하고 다정한 얼굴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언의 사과를 건네는 듯한 미소였다.
나는 쓸데없는 물음을 건네지 않았다.
그런 일들로 꿈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에 나는 꿈에서 단 한 번도 이루지 못했던 일을 시도했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었다.
나는 말없이 그의 얼굴을 붙잡고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번엔 꿈에서 깨지 않았다. 그의 입술의 감촉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달콤했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꿈이 아닌 진짜 자일스가 내 눈앞에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휘몰아치는 감정을 끝내 제어하지 못했다.
“넌 죽었잖아. 사람들이 네가 죽었다고 했어. 네 묘비에도 항상 찾아갔는데…….”
내가 울먹거리자 자일스는 내 눈물을 닦아 주고는 말없이 나를 품에 껴안았다. 나 또한 입을 다물고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겼다.
“너무 늦어서 미안해.”
아니야. 넌 하나도 안 늦었어. 사과하지 마. 내게 사과하지 마, 자일스. 나는 울며 웃으면서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몇 번이고 해도 부족했다. 나는 1년이라는 공백을 한 번에 채우려는 듯이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윽고 그의 손에서 꽃다발이 떨어졌다. 우리는 진한 꽃 내음 안에서 재회의 기쁨을 만끽했다. 죽은 줄 알았던 연인은 살아 돌아왔고, 이제 더 이상은 아무도 우리를 위협할 수 없었다.
이 순간은 오롯이 우리만의 것이었다.
행복이란 건 추상적이고 허황된 감정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사람의 눈을 가리고 귀를 멀게 할 뿐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난 이제 알 수 있었다.
난 더 이상 좁은 다락방 안에서 살던 아이가 아니었다.
행복이 이런 거라면, 나는 얼마든지 바보가 되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것이 어린 엘로이즈와 나의 가장 큰 차이일 것이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