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92화 (92/93)
  • <92화>

    Epilogue

    나를 데려간 사람들은 입스윈에서 온 이들도, 벨담에서 온 이들도 아니었다. 나는 이제 한 번도 발 들인 적 없었던 또 다른 외국에 와 있다.

    그들이 자신의 나라를 뭐라고 소개했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내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그들이 나를 안락한 병실에 눕혀 놓았지만 나는 단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내가 침몰하던 배 위에서 벗어나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워 있다는 건 분명 꿈처럼 느껴지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내 머릿속은 전혀 다른 곳에 가있었다.

    자일스는 지금쯤 구조를 받았을까?

    그는 어떻게 되었지?

    하지만 자일스의 소재에 대해 알려 주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 보는 외국인들은 내가 충분한 수면을 취하기를 바랐다.

    몇 시간을 혼자 끙끙 앓던 나는 선잠을 자면서 자일스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반기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나는 깨어나자마자 그것이 꿈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일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에 모르는 사람들이 내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누구시죠?”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카렐 지오다 요원이라고 합니다. 저희가 당분간 키팅 양의 안위를 책임져 드릴 겁니다. 이젠 안심하고 계셔도 됩니다.”

    아, 그놈의 정보국 사람들. 이들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요원이라는 말만 들어도 신물이 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차마 미소를 지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렇군요.”

    “그간 밤은 평안하셨나요?”

    “그럭저럭이요.”

    “쾌차하실 때까지는 당분간 여기서 지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 의료진의 소견에 의하면 신체가 많이 약해지신 상태라고 하더군요. 추정컨대 벨담에서 키팅 양을 그리 만든 것이겠지요?”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이 사람들이 나를 구해 준 건 맞지만 나는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벨담에서 나를 거뒀을 때도 나는 내가 안전해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와 반대이지 않았나.

    어쩌면 여기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중에 자세히 들어 보아야 하겠지만, 대충 얼개는 잡히는 것 같군요. 지금은 정신이 없으실 테니 너무 귀찮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당분간은 회복에 집중하세요. 저희도 쾌차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까요.”

    “나를 왜 도와주는 거죠?”

    결국 내 입에서 사나운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최고조로 치솟은 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지오다 요원은 내 말투에 전혀 영향 받지 않은 사람처럼 싱긋 웃었다.

    “그야 저희 영해 안에서 구조를 받으신 분이니까요.”

    “그렇다 해도 난 당신들이랑은 크게 상관없는 사람이잖아요. 내가 회복하든 말든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죄송하지만 성함이 뭐라고 하셨죠?”

    “안나 키팅이요.”

    “그래요! 바로 그거예요. 당신은 안나 키팅 양이죠. 여기서 키팅 양이 얼마나 유명한 사람이 되었는지 아시면 깜짝 놀랄걸요.”

    그래도 내가 내 사연을 외국으로 전파한 게 헛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는 건 더 이상 달갑게 느껴지지 않는 사실이었지만…….

    “모두가 당신 이야기에 감명을 받고 벨담의 잔혹함에 치를 떨고 있어요.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게 놀라울 지경이라고 그러더군요. 전쟁 같은 삶을 헤쳐 나온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당신을 영웅이라고 불러요. 그리 불리는 사람을 맨몸으로 추방시킬 수는 없잖아요, 안 그래요?”

    “왜요, 나를 대통령으로 추대하기라도 하겠대요?”

    그러자 지오다 요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기라고 한 말은 아닌데 내 빈정거림이 이 사람에게는 깔깔 유머집으로 다가오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꼭 그 이유뿐만이 아닙니다. 키팅 양은 난민으로서 망명을 신청하실 자격을 갖고 계시니까요. 저희 군인들을 통해 구조를 받으신 순간부터 그랬죠. 절차를 밟을 생각이 드시면 언제든지 제 관계자를 통해 말씀 주시면 됩니다.”

    “자일스는 어떻게 됐어요?”

    이번에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누군가는 곤란하다는 듯 얼굴을 굳히기도 했다. 대답이 늦어지자 나는 그들을 한 번 더 재촉했다.

    “자일스는 어떻게 됐냐고요.”

    “헤센 씨 말이죠.”

    잠시 고민하던 지오다 요원이 어깨 너머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에게 고갯짓을 해 보였다. 그러자 그와 간호사 몇을 뺀 모든 사람들이 우르르 병실을 빠져나갔다.

    뭔가 안 좋은 소식을 전하려 하는구나.

    나는 바로 알았다. 눈치가 있다면 누구나 알 수 있었을 거다.

    이윽고 지오다 요원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키팅 양…….”

    “왜 그리 뜸을 들여요? 자일스가 여기 어딘가에 있을 거 아니에요. 많이 다친 거라면 내가 가서…….”

    “유감스러운 소식을 전하게 되어 죄송할 따름입니다.”

    잠시 머리가 빈 것처럼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몇 초 동안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그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곧 차가운 현실로 내쫓기듯 돌아왔다.

    “못 구했다는 소리예요?”

    “저희가 소식을 듣는 즉시 구조선을 보냈습니다만, 아무래도 헤센 씨를 구하기에는 너무 늦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가 덧붙였다.

    심장이 뛰고 온몸이 덜덜 떨렸다. 믿고 싶지 않아서 그가 무슨 말이라도 꺼내기를 기다렸지만 더 이상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자일스를 구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난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분노에 차 소리를 질렀다.

    “구해 준다고 했잖아요! 당신들이 꼭 구해 준다고 해서 자일스를 두고 나 혼자만 헬기에 올랐던 건데! 난 그 사람만 차가운 바닷속에 두고 혼자 구조를 받았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제 와서 자일스만 죽게 뒀다고 하면 어떡하라는 건데!”

    자일스가 죽었다는 건가? 그런 건 일어날 리 없는 일이었다. 나는 절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자일스가 죽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는 그만 이성을 잃고야 말았다. 물건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내던지고 깨부수자 간호사들이 달려와 나를 만류했다. 내 얼굴은 금세 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나는 곧 간호사들을 뿌리치려 하던 것을 멈추었다. 적어도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난 구조를 받지 않았을 거예요. 끝까지 그 사람 곁에 있었을 텐데.”

    나는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울었다. 나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게 이토록이나 절망적일 수가 없었다. 나는 검은 바닷속에 자일스를 홀로 두고 왔다. 하지만 그건…… 난 절대 내 목숨을 살리기 급급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난 자일스가 살아서 돌아올 줄 알았다.

    그는 언제나 그래 왔으니까. 그 어떤 위험이 닥쳐도 자일스는 끝내 내 곁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어쩌면 이번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탓일까?

    마지막에 나를 향해 손을 흔들던 자일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게 나와 자일스의 마지막 순간이라고 생각하니 도저히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몇 번이고 내 목숨을 구했는데…….

    나는 끝까지 이기적인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이번엔 그 사실이 절대 자랑스럽지 않았다. 이제 내가 몸을 기댈 곳은 없었다. 내가 살던 세상이 통째로 사라진 기분이었다.

    더 이상은 아무 얘기도 듣고 싶지 않았다.

    위로조차도 나에게는 사치였다.

    “혼자 있고 싶어요.”

    내가 푹 잠긴 목소리로 부탁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머지않아 모두가 병실을 떠나고 나 혼자만 남았다.

    나는 웅크리고 누워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살아남은 것 자체가 죄악으로 느껴졌다. 이대로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자일스가 스스로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구해 준 목숨을 함부로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내가 끝까지 살아남는 게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보답이었다.

    나는 입 속으로 자일스의 이름을 몇 번이고 중얼거려 보았다. 자일스. 자일스 헤센……. 처음에 너를 의심해서 미안했어. 너에게 심한 말을 하고, 너를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 취급해서 미안했어. 사랑한다는 말을 더 많이 해 주지 못한 것을 후회해.

    너를 미워한 것을 후회해.

    나에게 커다란 빵을 가져다주러 오던 군인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그는 내게 생존이라는 마지막 선물을 안겨 주고 나서 내 곁을 완전히 떠나 버렸다.

    생각해 보면 자일스는 자기 자신을 전혀 챙기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내게 무언가를 주는 데에만 열중했다.

    끝까지 제 목숨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죽을 걸 알면서도, 나를 올려다보며 환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정말로 마음이 놓였던 거다. 스스로가 어떻게 되든, 나를 살려 보낼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로도 만족했던 거다.

    나는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그가 듣지 못할 말들을 마음속으로 건네 보았다.

    자일스 헤센.

    정말 많이 사랑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