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
비슷한 시각.
또 다른 호송용 차 한 대가 라르손 부두에 도착했다. 부두에 정박해 있는 배는 단 세 대. 그중 가장 녹슬고 노후되어 보이는 커다란 배가 가장 먼저 출항할 예정이었다.
루이제를 포함한 군인들이 차에서 내렸다. 루이제는 그들이 후면에 달린 문을 열고 그 안에서 여자 하나를 실은 들것을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안나는 완전히 의식이 없었다. 적어도 그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한쪽 팔은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고 안색은 창백했다. 머지않아 곧 죽을 것처럼 보이는 여자를 태우고 떠날 배가 굉음을 내며 울었다.
루이제는 불안했다. 자일스는 왜 보이지 않는 거지? 안나가 곧 배에 탈 것이다.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가 제때에 오지 못하면 안나는 그대로 죽을 일밖에 남지 않는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했다.
“서둘러야 해.”
그녀가 중의적인 암호를 중얼거렸다.
“시간이 많지 않아.”
루이제의 말을 더 빨리 움직이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인 부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들이 들것을 들고 배 쪽으로 걸어가던 그때였다. 얌전히 누워 있던 안나가 돌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성치 못한 몸이었지만 그녀는 놀라울 만한 기력을 발휘해 맨발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놀란 군인들은 들것을 내려놓고 안나를 뒤쫓았다.
“멈춰! 경고하겠다!”
루이제는 그녀를 쫓아가는 척 뒤를 따랐다. 사전에 모의한 일이긴 했지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안나는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한 데다 며칠을 고문당한 몸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솟아 나오는 건지 경이롭기만 했다.
안나는 이를 악물고 도망치며 화물을 옮기던 일꾼들을 일부러 넘어뜨렸다. 박스가 와장창 쓰러지며 미처 대비하지 못한 군인들을 덮쳤다.
루이제는 그들에게 욕을 지껄이며 한편으로는 불안한 눈빛으로 안나 쪽을 바라보았다.
자일스는 대체 언제 모습을 드러내는 거지?
이대로 아무 성과 없이 붙잡힌다면 루이제 또한 더 이상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때였다. 돌연 안나가 놀란 비명을 질렀다. 루이제는 군인 한 명이 불시에 뛰쳐나와 그녀의 팔을 잡아채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몇 분 전, 제압한 군인들을 바깥으로 모조리 내다 버린 자일스는 서둘러 라르손 부두를 향해 차를 몰았다.
벌써 배가 출항했을까? 방금 전 싸움을 벌인 탓도 있겠지만 심장이 거세게 뛰며 체온이 올라갔다. 핸들을 잡은 두 손에는 땀이 찼다.
그는 추적하는 이들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수시로 백미러를 들여다보며 도로 위를 달렸다.
제발 늦지 않아야 할 텐데.
얼마 지나지 않아 부두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정박해 있는 배들이 많았다. 저 중엔 안나를 태우고 떠날 배도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안나의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미 그녀가 배에 올랐다면 모든 것이 허탕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었다.
자일스는 차를 아무 데나 세워 놓고 내렸다. 그를 호송하던 군인에게서 빼앗은 군복 재킷을 입고 머리에는 군모를 푹 눌러쓴 채였다. 유사시를 대비해 권총과 제압용 곤봉도 챙겼다.
자일스 헤센이 부두 근처를 활보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할 사람들은 그를 위해 길을 비켜 주었다. 그는 어렴풋이 보기에 평범한 군인처럼 보였다.
그는 너무 수상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주변을 서둘러 탐색했다.
안나는 어디에 있지?
분명 호송용 차가 세워져 있을 텐데…….
그 순간 근처에서 무언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자일스는 그게 평범한 사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군인들이 무어라 고함을 질러 대는 소리는 곧 그에게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자일스는 뒤늦게 합류한 군인인 척 그쪽으로 뛰어갔다. 그의 예상이 들어맞았다. 검은 머리를 풀어 헤친 흰 옷의 여자가 도주하고 있었다. 안나였다.
안도감이 몰아치는 동시에 자일스는 안나를 향해 뛰었다. 그는 여전히 남들의 눈에 그녀를 체포하러 온 군인으로 보여야만 했다.
자일스는 순식간에 안나의 새하얀 팔을 잡아챘다.
비명 소리가 울렸다. 아직 안나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자일스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버둥거리는 안나를 두 팔로 제압하고는 속삭였다.
“안나, 나야.”
그러자 안나가 으르렁대던 것을 멈췄다.
“자일스?”
“정신을 잃은 척해. 내가 널 기절시켰다고 생각하고.”
루이제와 다른 군인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자일스는 금세 움직임을 멈춘 안나를 안아 든 채 심호흡을 했다.
다행히 루이제는 그의 정체를 눈치챈 듯했다. 설마 자일스가 나타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다른 군인들은 아픈 곳을 주무르며 구시렁대기 바빴다.
“왜 이제 오는 거야? 하마터면 놓칠 뻔했잖아. 빨리 나를 따라와, 배가 곧 출항할 예정이니까.”
“알겠습니다.”
자일스가 낮은 목소리를 꾸며 내며 대답했다.
“너희 쓸모없는 녀석들은 차로 돌아가서 대기해. 죄수를 태우고 나서 바로 이동할 거니까.”
“아, 알겠습니다.”
루이제를 따라온 군인들은 뭔가 미심쩍은 기색이었지만 결국 상관의 명령을 따르러 떠났다. 루이제는 앞장서서 걸어가며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췄다.
“왜 이렇게 늦었어?”
“최대한 빨리 오려고 노력했어.”
“하마터면 이대로 안나를 배에 태울 뻔했잖아. 너무 늦지 않아 다행이야. 저길 봐, 맨 오른쪽에 있는 하얀 배가 세피로스 제도로 떠나는 여객선이야. 나머지는 내가 조치를 취해 뒀으니까 이 표를 가지고 여객선에 타도록 해.”
정체를 들키지 않는 건 오로지 네 몫이야. 그녀가 덧붙였다. 자일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서둘러 움직였다. 자일스 헤센이 도주했다는 사실을 안 군인들이 언제 부두로 쳐들어올지 몰랐다.
자일스가 여객선 쪽으로 향하려던 그때였다.
익숙한 금속성의 소음이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잠깐 기다려.”
그것은 분명 권총을 장전하는 소리였다. 자일스는 등 뒤에서 난 소리에 섣불리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대신 루이제가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아렌트 홀츠만이 그녀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새 자일스의 뒤를 쫓아온 군인들이 경계 태세를 갖추며 그들을 총으로 위협하고 있었다.
“루이제 고틀리프 소령, 잠깐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하겠습니다.”
“민간인들도 많은데 이런 곳에서 굳이 총을 꺼내야 하나?”
“그만큼 심각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죠. 자일스 헤센이 도망쳤습니다. 차를 타고 도주한 모양이더군요. 그놈이 어디로 향했을지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뻔한 일이죠.”
아렌트는 자일스의 품에 안긴 안나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분명 제 애인을 구하러 갔을 게 틀림없지 않겠습니까?”
“홀츠만…….”
“가만히 계세요, 소령님. 얼마 전부터 당신 행적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지. 이번 작전을 일부러 망치려 했다는 게 밝혀지면 그냥 징계만으론 안 끝날 겁니다. 거기 너.”
아렌트가 자일스를 지목하며 명령했다.
“내 쪽을 보고 얼굴을 보여 봐.”
어떻게 해야 하지?
선택권이 없었다. 그들은 열댓 명의 군인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자일스가 몸을 돌렸다. 아렌트는 그가 눌러썼던 군모를 벗기더니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미소를 흘렸다.
“헤센. 벨담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줄 알았습니까?”
그는 자일스가 훔쳐 입은 군복을 가증스럽다는 듯이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그의 머리 쪽으로 권총을 겨누었다.
“여자를 내려놓고 무릎 꿇어.”
자일스는 안나의 호흡이 긴장으로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현실적으로 안나를 품에 안은 상태에서 총을 든 군인들과 싸워 이길 방법은 없었다.
이대로 항복해야 하나?
안나는…… 이대로 죽게 되는 건가?
“무릎 꿇어!”
아렌트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자일스는 그만 눈을 질끈 감고 싶어졌다. 이대로 안나를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이토록 허무하게 죽게 둘 수는 없었다.
“자일스 헤센,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여자를 내려놓고 무릎 꿇어. 그러지 않으면…….”
탕! 돌연 총소리가 울렸다. 놀란 안나가 자일스의 품에서 파드득 떨었다. 하지만 총에 맞은 건 자일스도, 안나도 아니었다.
아렌트의 고개가 천천히 루이제 쪽으로 돌아갔다. 그는 경직되어가는 얼굴 근육으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분노한 것 같기도 하고 의아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런 멍청한 짓을 정말 저질렀느냐고 묻는 듯이.
그의 몸이 기우뚱하더니 곧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렌트의 죽음을 확인한 루이제가 자일스에게 외쳤다.
“뛰어, 병신아!”
그녀의 외침을 기점으로 총격이 시작되었다. 자일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있는 힘껏 달렸다. 품 안에서 떨던 안나가 슬쩍 고개를 들더니 경악했다.
“자일스, 뭐 하는 거야?”
자일스는 죄수들을 태우고 떠날 수송선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저 배에 타면―”
“선택권이 없어! 부두를 벗어나지 않으면 우리 둘 다 죽어! 벨담 땅을 벗어나야 해. 그게 우리가 갖고 있는 최선의 카드야.”
부우우―
수송선이 곧 출발할 것을 알리듯이 다시 한 번 울었다. 자일스는 너무 늦기 전에 배 위에 올라탔다. 이윽고 후미에 달린 통로가 거두어지고 배가 천천히 바다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멈춰! 멈추라고!”
군인들이 뒤늦게 쫓아와 외쳤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증기 기관이 내뿜는 소리에 파묻혔다. 출항 중지를 알릴 선원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자일스는 이제야 뒤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는 군인들 뒤로 한 명의 장교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한때 그와 사관 학교를 함께 다녔던 동기이자 친구였던 이의 죽음이 보였다.
그는 애써 고개를 돌렸다. 한 사람의 목숨을 바쳐서 이 배에 올랐다. 결코 쉽게 얻어진 성과가 아니었다. 그녀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두 사람은 반드시 살길을 찾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