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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86화 (86/93)
  • <86화>

    자일스는 이 선율을 알았다. 안나가 그를 위해 연주해 주었던 적이 있는 피아노곡이었다. 그는 감정이 잦아드는 것을 느끼며 안나의 흔적을 찾았다.

    그러나 안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그녀가 연주하는 음악만이 재판정을 가득 채울 뿐이었다.

    어떻게 그 이름을 잊을 수 있었지?

    자일스의 호흡이 천천히 안정을 되찾았다. 그는 비로소 눈앞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장내를 울리는 목소리들은 더 이상 그를 괴롭힐 수 없었다.

    그는 방청객들이 모인 쪽을 바라보았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사람처럼 인상을 찌푸렸다가 퍼뜩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등 이상 행동을 보이는 그를 향해 우려 섞인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에서 자일스는 두려움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이후의 일이 어떻게 진행되더라도 재판만큼은 끝을 봐야 했다. 재판정에서 어떻게 행동할지는 그의 자유 의지에 달려있었다.

    저들이 그에게서 뭘 원했는지 알 것 같았다.

    무엇을 원해서 그의 혈관에 바늘을 찔러 넣었는지도.

    이제는 허상에 불과한 공포를 한 꺼풀 벗겨 낼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자일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판사가 한 차례 더 소리를 질러 왔다.

    “자일스 헤센! 스스로의 죄에 대해 진술하라고 명령한 바 있소!”

    “저는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놀랍도록 담담한 목소리가 재판정에 침묵을 자아냈다.

    마침내 모두가 언론에서만 보고 들을 수 있었던 악마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순간이었다.

    “전쟁 당시, 저는 전선에서 군인의 의무를 다하는 중이었습니다. 치열한 전투에서 살아남은 저는 입스윈에 있는 군 병원으로 옮겨졌고, 머지않아 당분간 입스윈에 주둔해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입스윈에서 지내고 있던 누이가 보고 싶었기에 저로서는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쾌차하게 되면 먼저 누이를 보러 달려갈 생각이었습니다.”

    마치 진중한 내용의 책을 낭독하듯 차분하고 고저 없는 목소리가 좌중을 숨죽이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당황스러워 보였다. 자일스 헤센은 보기에도 멀쩡했고 미쳐 날뛰거나 저주스러운 단어들을 내뱉지도 않았다.

    그는 평범했다.

    누군가가 지극히 평범하다는 사실이 그들에겐 이토록 당혹스러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제게는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벨담은 전쟁에서 지고 있었고, 실제로도 패배 직전까지 몰렸습니다. 입스윈에 주둔해 있던 나머지 군인들마저도 벨담을 돕기 위해 그곳을 떠났습니다. 상황이 그리 되자 입스윈 사람들은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직접 보지 않아도 뻔했습니다. 저는 동료들을 따라 벨담으로 떠나는 대신에 정반대의 방향으로 달려갔습니다. 셀레스트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자일스의 고백은 사람들이 알던 이야기와는 달랐다.

    “셀레스트를 데리고 입스윈을 탈출하려 시도했지만 전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누이가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던 저는 입스윈 혁명군과 거래를 했습니다. 그들에게 재산을 모두 내어 주고 혁명에 가담한다면, 저와 누이는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입스윈을 빠져나가지 못한 귀족들을 처단하라는 명령에 따랐습니다. 개중에는 먼 친척도 있었고,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죽여야 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셀레스트가 죽게 될 테니까요.”

    “당신이 직접 그녀를 죽인 게 아니었나?”

    누군가 참지 못하고 소리쳐 물었다. 판사가 의사봉을 내리치며 정숙을 요구했다.

    그러나 자일스는 그의 대답을 무시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른 뒤, 저는 또다시 심판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누이를 죽이지 않으면 저는 그대로 버려져 죽음을 맞을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한 후에도 저는 도저히 셀레스트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살고자 하는 욕망은 간절했지만 그런 짓을 하는 건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포기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고문당한 기색이 역력했던 셀레스트는 저를 알아보지도 못했고, 스스로를 찔러 자살했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거야!”

    “정숙하시오! 정숙!”

    판사의 외침에 다시 한번 사위가 조용해졌다.

    의사봉을 내려놓은 그는 자일스를 향해 말했다.

    “자일스 헤센, 피고는 법정 안에서 진실만을 말하기로 사전에 서약한 바가 있소.”

    “저는 진실을 말했습니다.”

    “법정을 모독하려 하면 최고형을 피할 수 없을 것이오!”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제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제가 사형수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아직 제게 베푸실 마지막 자비가 남아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피고!”

    “사형 선고를 내리십시오. 본래 그래야 했던 대로 제 목에 밧줄을 채우십시오. 저는 제가 다해야 할 마지막 의무가 끝나면 언제든지 죽음을 맞이하러 돌아올 겁니다.”

    법정 안의 사람들은 자일스가 예상했던 대로 움직여 주지 않자 몹시 당황한 듯했다. 이런 건 그들이 원했던 그림이 아니었다. 거대한 상황극의 대미를 그가 모조리 망쳐 놓고 있었다.

    물론 악의는 없었다.

    다만 그는 진실을 말할 뿐이었다.

    “저는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니 처벌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당신들의 손에 죽을 생각이 없습니다. 저의 죄는 부풀려지고, 왜곡되고 조작되었으니까요. 벨담을 우롱하기 위해 저에게 거짓 죄를 뒤집어씌웠다는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제 온전한 죄만을 벌하십시오. 그때가 되면 저는 미련 없이 처형장에 올라서겠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언사가 뻔뻔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비난을 쏟아 내지는 못했다.

    누구도 그의 목소리나 시선에서 교묘하게 포장된 거짓을 찾아내지 못했다. 자일스를 비난하던 몇몇 사람들조차 입을 다물었다. 저 남자가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거지? 무엇이 조작되었다는 거지? 왜 재판정에서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는 거지?

    이제 사람들의 관심은 반대편으로 옮겨 갔다.

    그들은 이제 해명을 원했다. 자일스가 치졸한 거짓말로 사람들을 또다시 속이려 한다는 사실을 누군가 증명해 주기를 바랐다.

    자일스는 재판장이 양옆에 앉은 판사들과 무어라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판결문을 꺼내 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일스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피고 자일스 헤센은 도합 103명의 벨담 국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스스로의 누이를 직접 살해한 죄가 크며 스스로의 죄를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이로써 재판부는 벨담을 우롱하고 법정을 모독하려 한 피고인에게 사형 처분을 내린다.”

    판결문을 전부 읽은 후에도 사람들은 얼마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분위기를 주도하려 하듯 박수를 쳤다. 그러자 한두 사람이 조심스레 손뼉을 따라 쳤다.

    이내 박수 소리로 물든 재판정 정중앙을 바라보며 자일스는 그저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는 바꿀 수 없는 현실에 체념하는 방법을 익힌 지 오래였다.

    군인들이 그를 의자에 속박한 벨트를 풀고 두 팔을 붙잡아 끌어냈다. 자일스는 항의하는 대신 순순히 군인들의 손에 이끌려 재판정을 나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처형장까지 끌려갈 생각은 없었다.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얼마 전, 루이제는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너는 재판을 받고 나서 다시 차를 타고 안전 가옥으로 돌아올 거야. 감옥에 가두기에 너는 너무 유명한 죄수고, 상부에서는 너를 군에서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곳에 두기를 원하거든. 내부에 배신자만 없다면 탈출 같은 건 꿈도 못 꾸겠지.’

    자일스는 그녀가 숨겨 놓았을 열쇠의 감촉을 느꼈다. 작은 열쇠는 그가 입을 죄수복 소매 속 교묘한 곳에 실로 꿰매어져 있었다.

    ‘차를 타고 곧장 라르손 부두로 향해. 최대한 시간을 지체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 재판이 끝나고 얼마 안 가 배가 출항할 예정이니까.’

    ‘배라니?’

    ‘안나가 그 배를 탈 거야. 네 재판일에. 보통 배라고 생각하면 안 돼. 그 배는 죄수를 싣고 가는 수송선이야. 상부에서는 안나를 그 배에 태워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거야. 뒷말이 나올 구멍을 완전히 봉쇄하려는 거지. 안나도 결국엔 목격자나 다름없으니까.’

    ‘그녀가 배에 타지 못하게 막을 방법은 없나?’

    ‘거기까진 모르겠어. 상부에서는 내게도 많은 걸 알려 주지 않았어. 내가 제공할 수 있는 정보는 여기까지야. 나머지는 네가 하기에 달려 있어. 나는 마지막으로 안나를 구할 기회를 줄 수 있을 뿐이야.’

    ‘왜 나를 돕는 거지, 루이제?’

    루이제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영영 그녀의 대답을 들을 수 없으리라는 건 자일스도 알았다.

    군인들이 그를 차 안에 쑤셔 박듯이 밀어 넣었다. 자일스는 그들이 차에 타는 틈을 타 열쇠를 손에 쥐고 차분히 수갑의 자물쇠를 풀었다. 그러나 즉각 움직이지는 않았다.

    대신에 그는 차가 움직일 때까지 기다렸다. 아직 그가 수갑에 구속되어 있는 것으로 아는 군인들은 자일스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일스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나머지는 전부 그에게 달려 있었다.

    라르손 부두. 자일스가 기억해야 할 건 오로지 그 장소밖엔 없었다.

    도로에 진입한 차가 제 속도를 내기 시작하던 그때였다.

    돌연 수갑을 풀어낸 자일스가 한 팔로 왼쪽에 앉은 군인의 목을 꺾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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