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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85화 (85/93)

<85화>

전국 각지에 보급된 라디오가 오전부터 사람들의 잠을 달아나게 했다. 신문 파는 아이도 질 수 없다는 듯 동전 몇 푼을 대가로 사람들 사이를 뛰어다녔다.

그 날은 유독 신문을 읽어 보지 않을 수 없는 날이었다. 길거리의 모두가 담배 혹은 신문을 들고 있었다.

전쟁이 한 번 더 터진 것일까? 혹자는 그렇게 생각할 만큼 사람들의 얼굴은 심각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1면에 실린 기사는 이웃 국가가 전쟁을 선포했다는 기사 대신에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고 있었다.

길다면 긴 시간 동안 벨담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사내는 오늘부로 사람들 앞에 설 것이다. 그리고 제 운명이 선고되는 순간을 목격할 것이다.

사람들은 흥분해 있었다. 과연 신문에서만 볼 수 있었던 그 남자는 실제로 어떻게 생겼을까?

모두가 자일스 헤센의 얼굴을 알았지만 그를 실제로 본 이는 극히 드물었다. 사진과 실제는 묘하게 다르기 마련이다.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곁에서 주워들은 아이들은 내기를 걸었다. 분명 옛이야기에 나오는 괴물처럼 눈이 쭉 찢어지고 눈동자는 피처럼 새빨간 색일 거야. 아니, 창백한 안색에 아주 무섭게 생긴 남자일 거야. 전쟁 때문에 외눈박이가 되었을 거야.

벌써 배심원들은 선출된 지 오래였다. 방청객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웬만해서는 마주치지 않고 싶은 남자였지만, 그럼에도 헤센이라는 남자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은 커다랬다.

여름이 찾아오기 전, 어느 화창한 봄날.

자일스 헤센의 재판일이 다가왔다.

군인들은 자일스에게 평범한 죄수복을 입혔다. 거친 면 소재로 된 미색의 옷이었다. 사람들은 자일스가 감옥에 수감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그는 굳이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만 했다.

자일스는 새벽부터 안전 가옥을 나섰다. 안나와는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그녀는 사흘 전보다 더욱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제는 눈을 뜨는 것조차 힘겨워할 정도였다.

하지만 안나는 결국 살아남았다. 그것으로 위기를 절반은 견뎌 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안나의 죽음이 오늘은 아닐 것이고, 나머지는 전부 자일스에게 달려 있었다.

그랬다. 이제 모든 것이 그가 하기 나름이었다.

그는 마음을 굳게 먹고 군인들의 거친 손길에 이끌려 커다란 호송용 차에 탑승했다.

법원에 입장할 때도 그들은 최대한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통로를 이용했다. 그는 위험한 화학 물질 같은 존재였다. 다른 사람의 눈에 띄는 것만으로도 어떤 영향을 일으킬지 몰랐다.

루이제는 따라오지 않았다. 자일스는 오히려 안심했다. 안나를 다른 군인들과 함께 놔두는 것보단 차라리 루이제가 그녀와 함께 있는 쪽이 더 나았으니까.

대신에 낯이 익은 중년의 남자가 등장했다. 그는 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 자일스를 가둬 놓은 방에 들어와 책상 앞에 앉았다.

자일스는 그가 누군지 기억해 냈다. 안나를 안전 가옥으로 데리고 왔던 그 남자였다.

“소감이 어떻습니까?”

남자가 물어 왔다.

“드디어 모든 걸 끝맺게 되었는데 말입니다.”

자일스는 남자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굳이 그의 농간에 휘말려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한편 남자는 어깨를 으쓱였을 뿐, 안경을 고쳐 쓰고는 말을 이었다.

“몇 가지 알려 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우선 당신 같은 죄수들에게는 보통 국선 변호사가 배정되곤 합니다만, 아무도 당신을 맡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점을 말씀드려야겠군요. 변호사 없이 재판을 받으셔야 합니다.”

“상관없습니다.”

“재판정에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겁니다. 방청객이 이토록 많았던 적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들은 모두 당신을 주목할 겁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당신은 아직 준비가 덜 된 모양입니다.”

그는 안경을 벗어서 재킷 주머니에 꽂았다. 남자의 말투가 약간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대체 뭘 어떻게 했기에 아직까지 상태가 이런 겁니까?”

“모든 건 절차대로 진행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잖습니까. 이래서야 더러운 일을 감수해야 하잖아요.”

참 유감이라는 듯이 그가 눈가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자일스는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 무슨 말을―”

“붙잡아요.”

그러자 군인들이 달려들었다. 안 그래도 두 손이 자유롭지 못했던 자일스는 그들의 손아귀 안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그의 머리를 붙잡고 오른쪽으로 내리눌렀다.

남자가 얇은 케이스 안에서 뭔가를 꺼내는 게 보였다. 주사기였다. 조명 아래에서 번쩍이는 주사기 안으로 그가 무언가를 주입했다.

“헤센 씨, 조금 아플 겁니다. 소리 지르지 말고 참으세요.”

“잠깐……!”

그는 망설임 없이 자일스의 목에 주삿바늘을 갖다 댔다. 누군가 자일스의 입을 틀어막은 탓에 그는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알 수 없는 액체가 그의 혈관을 타고 침투해 왔다. 심장이 쿵쿵 뛰고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이 엄습했다. 남자는 그에게 뭘 놓은 건지 끝내 말해 주지 않았다.

자일스는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의식이 점점 그와 분리되고 있었다.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성은 흐려지는데 고통을 떨쳐 내려는 강한 충동은 시간이 갈수록 커졌다.

그가 군인들에게 붙잡힌 채 몸부림치는 모습을 본 남자는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좀 낫군요.”

“언제쯤 나가면 됩니까?”

한 군인이 묻자 남자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어림잡아 5분 후면 입장하게 될 겁니다.”

한편 자일스는 숨을 몰아쉬며 눈앞을 제대로 보려고 애썼다. 그가 정신을 놓아 버리면 안나까지 죽게 된다.

안나를 살려야 해. 안나를 살려야…….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뇌던 와중, 눈앞에 안나가 나타났다. 약물에 의한 환영이 분명했다. 자일스의 시선이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연인에게로 고정되었다.

안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허공에 뭐라도 있는 것처럼 구는 자일스는 남자를 안심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더 이상 자일스에게 신경 쓰는 대신 한 군인과 재판 후 일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일스는 눈을 크게 뜨고 선명해졌다 흐릿해지기를 반복하는 안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죽었다는 생각이 자일스의 머릿속을 스쳤다. 안나는 이미 죽었구나. 그래서 유령이 된 거야.

죽었기 때문에 모습이 온전치 않은 거야.

절망에 빠진 그가 눈물을 흘렸다. 손을 뻗고 싶었지만 군인들이 붙잡고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돌연 분노가 치솟았다. 안나를 죽인 게 바로 이들이었다. 이들을 전부 죽여야겠다는 충동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때 안나가 말을 걸어 왔다.

“진정해, 자일스. 모든 것을 망칠 셈이야?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안나…….”

“걱정하지 마. 내가 항상 말했잖아. 나는 죽지 않을 거라고. 적어도 내가 그러기를 원하게 되지 않는 이상 아무도 날 죽일 순 없을 거야. 너는 나를 구해야 해. 너만이 나를 구할 수 있어. 그러니까 정신 차려.”

자일스는 호흡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그래. 그녀의 생사가 자일스에게 달려 있었다. 자일스가 실패하면 안나는 그대로 배를 타게 될 테고, 혹한의 땅에 발을 딛게 될 것이다.

정신을 차려야 해.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흩어진 생각들을 한 곳에 다시 모아야 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안나는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그를 괴롭히는 고통만은 그대로였다.

귓가에 들리는 음성이 윙윙거리는 시끄러운 소음과 겹쳐 들렸다.

“이제 가지.”

“알겠습니다.”

자일스는 군인들의 팔에 단단히 붙들려 방을 나섰다. 복도를 한참 걸은 끝에 그들은 마침내 재판정에 들어섰다.

거대하고 엄숙한 공간 안에서 모두가 자일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군대는 소리가 커졌다.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던 자일스에겐 웅성거림마저도 고통으로 치환되었다.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사람들은 흥분한 듯이 보였다.

군인들은 재판을 시작하기 전에 단단한 가죽 벨트로 그의 몸을 의자에 동여맸다. 혹시라도 그가 위험한 행동을 시작할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안에 모인 모두가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자일스는 오한이 찾아드는 걸 느끼며 몸을 떨었다. 군인들이 물러나고 나서야 재판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의 ……하는 죄수, 자일스 ……의 ……합니다.”

탕, 탕, 탕! 의사봉을 치는 소리가 마치 총소리처럼 귓가에서 증폭되었다. 자일스는 귀를 막고 싶었지만 두 손이 결박되어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판사가 무어라 말을 하는 것도 같았지만 그의 귀에 제대로 들리는 말소리란 단 한 마디도 없었다. 자꾸만 몸부림을 치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밀려들어 와 그를 에워쌌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신체적 고통은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그의 몸을 단단히 동여맨 벨트의 압박감조차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걸 아는데, 그러기가 힘들었다.

재판이 끝날 때까지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안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는 허공을 필사적으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판사의 외침 소리 때문에 정신을 제대로 차리기가 힘들었다.

“……헤센! ……하시오!”

웅성대는 소리가 커졌다.

모든 소음, 모든 말소리 하나하나가 자극이 되어 폭력적인 충동을 부채질했다. 안나라는 이름조차 아주 천천히 그의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안나, 안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어.

안나가…….

……그게 누구였더라.

“진술하시오!”

자꾸만 그를 향해 소리를 질러 대는 판사를 죽이고 싶어졌다. 자일스는 남은 이성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꼈다. 불가항력에 가까운 현상은 그를 무겁게 내리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가 입을 열려던 그때였다.

돌연 자일스의 움직임이 멈췄다. 날카롭게 귓속을 파고들던 소음들과는 달리 맑고 아름다운 소리가 그의 정신을 사로잡았다.

누군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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