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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84화 (84/93)
  • <84화>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모르겠어.”

    자일스는 자신 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예전에는 안나가 입스윈을 벗어나기만 하면 그것으로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어. 벨담 안에서 안전할 거라 생각했지. 그런데 너희가, 네가 안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원망 섞인 눈초리가 잠시나마 섬광처럼 그녀를 찔러 왔으나 잠시뿐이었다. 자일스는 누군가를 저주하고 미워하기엔 이미 다 타 버린 재밖에 남지 않은 사내였다.

    그리고 마지막 잿불은 스스로를 천천히 태워 갈 뿐이었다.

    “이젠 안나가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겠어. 내가 그녀의 곁에서 사라져 주기만 하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는데…… 애초에 내가 안나를 사랑하려 한 욕심이 모든 걸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 같아.”

    스스로가 불타는 화마처럼 위험한 존재인지도 모르고 한 사람을 사랑하려 했다.

    자일스는 후회했다. 안나를 처음 만났던 그날, 빵 한 덩이와 함께 인연을 끝맺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도망친 안나를 그대로 놔주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안나의 삶에 그라는 존재를 끼워 넣은 것을 후회했다.

    루이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일스의 말대로 안나를 때린 건 그녀나 마찬가지였다. 감히 첨언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남은 사흘 동안,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건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야.”

    “제발, 루이제.”

    자일스는 이제 애원하기 시작했다. 만신창이가 된 그에게는 안타깝게도 추락할 곳이 더 남아있었다.

    “안나가 정말 죽을지도 몰라. 그녀는 내가 벌인 짓과 아무 상관도 없잖아. 나 때문에 죽어서는 안 되는 거잖아. 안나가 그냥 살아가도록 해 줘. 내게 바라는 게 있다면 뭐든 말해. 시키는 건 다 할 테니까.”

    “자일스. 이제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네겐 권한이 있잖아.”

    “그만해!”

    루이제는 자일스를 거칠게 뿌리치고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담배가 피우고 싶었지만 안나를 생각해서 참았다. 그마저도 참 뭣 같은 위선이 따로 없다는 걸 알지만…….

    “자일스, 제발 그만해. 한낱 장교의 권한으로 움직일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내가 뭘 한다고 한들 금방 다시 붙잡힐 게 분명해. 벨담 전체가 너의 적이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이해가 안 돼. 너희는 이미 나를 붙잡았잖아. 나를 죽이지 말아 달라고 하는 게 아니야. 굳이 안나를 희생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거잖아.”

    “안나가 죽는 것도 다 계획에 포함되어 있어!”

    결국 참지 못한 루이제가 말했다. 그 순간 자일스는 그 모습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는 스스로가 받은 충격을 단 한 마디로 뱉어 냈다.

    “왜?”

    “그래야 이 쇼를 더욱 자극적으로 만들 수 있을 테니까.”

    “고작 그건가?”

    안나가 고작 그런 이유로 허망한 죽음을 맞이해야 하나? 자일스는 그렇게 묻고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지? 나로는 충분하지 않은 건가?”

    “자일스, 아직도 모르겠어? 넌 벌을 받는 게 아니야. 귀족들을 죽인 건 애초에 문제가 된 적도 없어. 벨담은 그저 너의 이야기가 필요했을 뿐이야. 적절히 비극적이고 충격적인 이야기가 필요했을 뿐이라고. 아직도 네가 혁명에 가담해서 귀족들을 살해한 것 때문에 체포된 거라고 생각해?”

    이제 자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감히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루이제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이건 거대한 쇼야. 국가가 주도하는 쇼라고. 넌 그냥 희생양으로 낙점된 것뿐이야. 너도, 안나도. 왜 알베르트가 기차까지 끌고 가서 너를 생포하려고 했을 것 같아? 네가 그만한 흉악범이라서? 아니야! 벨담은 네가 절실히 필요했을 뿐이야. 그만큼 이 나라는 망가지고 뒤틀렸어. 간신히 줄타기를 하면서 버티고 있는 형국이라고.”

    “그렇다면…… 내가 한 일들은…….”

    “그건 애초에 중요한 일도 아니었어. 벨담은 귀족들의 안위 따위는 관심도 없었어. 오히려 네가 처리해 줘서 큰 부담을 덜었을 뿐이야.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예전부터 벨담은 실권을 놓지 않으려 하는 주요 귀족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으니까.”

    “…….”

    “너는 벌을 받는 게 아니야. 안나가 말려들게 된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너희 이름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나리오에 올라 있었어. 그리고 내겐 그 시나리오를 고칠 만한 힘이 없어.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잠시 침묵하던 자일스는 루이제를 올려다보았다. 놀랍도록 차분한 모습이었다.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

    “뭐?”

    “아직 나를 도와줄 생각이 있나?”

    그가 결박된 손을 내밀었다. 당연하지만 악수를 청하고자 내민 건 아니었다. 자일스는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지금 뭘…….”

    “총을 줘, 루이제.”

    “뭘 하려는 건데?”

    “결말을 바꿀 기회는 지금밖에 없어.”

    “뭘 하려는 거냐고!”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자일스는 자살을 감행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지 마, 자일스 헤센.”

    “예정된 대로 흘러가게끔 내버려 둘 수는 없어.”

    “그런다고 안나를 살릴 수 있을 것 같아? 안나는 이미 너무 깊숙이 개입해 버렸어. 벨담이 모든 걸 목격한 안나를 살려 둘 리가 없잖아. 정신 차려. 넌 의미 없는 짓을 하려는 거야.”

    “너희가 안나를 죽일 때까지 기다리는 데에는 의미가 있나? 말해 봐! 안나는 내일도 처참히 폭행을 당하게 돼! 이걸 알고도 가만히 있는 데에는 과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나는 뭐라도 해야 해! 안나를 지옥으로 끌고 들어온 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이런 식으로 무책임하게 모든 걸 끝낼 순 없어.”

    잠시 분노하는 듯하던 자일스의 격정은 이내 가라앉았다. 하지만 루이제는 그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

    시나리오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국가의 계획은 너무나도 견고해서 한 사람이 노력한다고 망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이 시나리오에는 구멍이 있었고, 루이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일스의 새카만 두 눈을 마주 보며 스스로의 죽음에 대해 다시 한번 떠올렸다.

    “아무래도 더 고민할 이유는 없을 것 같군.”

    “뭐?”

    “자일스. 재판 당일까지 버텨. 안나에게도 그리 전해. 버티라고. 최대한 버티는 게 너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죽지만 않으면 돼. 그것만으로 너희는 충분히 저항할 힘을 얻을 수 있을 거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이리 와.”

    루이제는 자일스의 귓가에 대고 그녀만이 아는 사실을 속삭였다. 이제 그녀의 정보를 토대로 무엇을 하느냐는 자일스에게 달려 있었다.

    루이제의 이야기를 듣고 난 자일스는 조금 두려워하는 듯한 기색으로 침묵하며 안나를 내려다보았다. 확신이 서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확고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은 말고 안나가 그때까지 살아남기만을 빌어. 네가 믿을 건 이제 그녀뿐이야.”

    “알고 있어. 처음부터 그랬지.”

    처음부터, 자일스는 안나라는 존재 하나에 매달려 살아갔다.

    지금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루이제는 굳은 얼굴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고는 바닥에 나동그라진 곤봉을 챙겼다.

    “당분간은 안나를 격리하지 않을 테니 함께 있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그게 다야.”

    “그 이상도 해 줬잖아.”

    자일스는 작게 덧붙였다.

    “고마워.”

    “……난 그런 말을 들을 자격도 없어.”

    루이제는 차갑게 식은 대답을 돌려주고는 그대로 방문을 닫고 나갔다. 문이 잠기는 소리가 철컥, 하고 울렸다.

    자일스는 다시 침대맡에 앉아서 안나를 내려다보았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그나마 안도감을 자아냈다.

    그가 손을 뻗어 안나의 뺨을 가린 머리카락을 걷어 냈다. 그러자 안나가 스르르 눈을 떴다. 맑은 하늘처럼 파란 눈이 자일스를 응시했다.

    “자일스.”

    “그래. 나 여기 있어.”

    “이리 와. 같이 누워.”

    망설임 끝에 자일스가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는 안나가 아프지 않도록 조심스레 그녀 곁에 누웠다. 가까이서 본 안나는 내려다보았을 때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그녀가 버틸 수 있을까.

    “너 또 이상한 생각 하고 있구나.”

    “미안해, 안나. 나만 아니었더라면…….”

    “난 네가 구해 줬기 때문에 살 수 있었던 거야. 그 사실을 잊지 마. 설령 여기서 모든 게 끝나더라도…… 내 삶을 연장해 준 사람은 너였어.”

    하지만 나는 네가 계속 살아가기를 원해. 여기서 끝을 맺는 건 원치 않아. 목이 메어 오는 바람에 자일스는 차마 그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처음에, 너를 미워하고 원망해서 미안했어.”

    “사과하지 마, 안나. 네가 왜 사과를 해.”

    “그때는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 시절의 나는 호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도 몰랐고, 그럴 여유도 갖고 있지 못했어.”

    “괜찮아. 정말로 괜찮아, 안나.”

    “그래. 그러니까 좀 낫네. 상황이 아무리 개같이 돌아간다 해도 괜찮다고 말해. 죽상을 한다고 나아지는 건 없어. 이건 내 경험담이니까 믿어도 돼.”

    온몸을 피멍으로 물들였음에도 안나는 아직 웃을 수 있었다. 자일스는 그가 안나를 만나고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갖지 못한 저력을 안나는 갖고 있었다.

    그녀는 끝없는 생명력으로 불타오르는 존재였다.

    어쩌면…… 그녀로부터 작은 불씨라도 나눠 받기를 원해 왔는지도 모른다.

    자일스는 눈을 감고 안나의 입술에 짧게 입맞춤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할 말이 있어, 안나.”

    안나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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