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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83화 (83/93)
  • <83화>

    ‘엘로이즈 비스마르’의 죽음은 예정되어 있었다.

    적어도 그들의 계획에 따르면 그랬다. 그녀는 아주 완벽한 희생양이었다. 자일스를 자극하기에 가장 좋은 도구가 있다면 바로 그녀일 것이다.

    루이제는 아직도 명령서에 적힌 내용들을 기억했다. ‘자일스 헤센이 재판정에 설 때까지 엘로이즈 비스마르를 고문할 것. 그 방법이 어떠하든 헤센을 ‘변화’시킬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용인됨. 단, 반드시 재판 당일까지는 효과가 나타나야 함.’

    ‘짧으면 이틀, 길면 일주일 안에 빈사 상태에 이를 것이 예상됨. 뒤탈이 없도록 시체를 확실하게 처리할 것. 사망 시 즉각 상부에 보고서 올릴 것.’

    ‘만일 재판 당일까지 사망하지 않을 시…….’

    ‘책임자, 루이제 고틀리프 소령 확인 바람.’

    루이제는 생각했다. 애당초 자일스 헤센을 맡아선 안 되었다. 대충 감시만 하면 끝날 거라던 아렌트의 무책임한 말이 떠올라 이가 갈렸다.

    물론 그녀도 자일스 헤센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이게 절대로 쉬운 임무가 아닐 거라는 사실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민간인 고문이 포함될 줄이야.

    자일스 헤센이야 그렇다 쳐도 안나는 달랐다. 그녀에게 죄가 있다면 그건 헤센과 놀아난 것뿐이었다. 아니, 그게 죄인가? 개처럼 맞아 죽는 잔인한 결말을 맞게 될 만큼?

    상부에서는 군인들을 시켜 안나를 기절할 때까지 때리게 했다. 그러고는 다시 치료를 받게 했다. 의미 없는 행위였다. 어차피 해가 밝으면 또다시 맞게 될 텐데…….

    이 모든 건 한 사람의 죄를 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쇼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서였다.

    유순한 죄수를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는 없으니까.

    벨담이 원하는 건 좀 더 자극적인 것이니까.

    루이제는 이 비인륜적인 임무의 중간에 끼여 있었다. 결국 안나를 폭행하라고 명령하는 건 그녀나 마찬가지였다.

    담배가 타들어 갔다. 이게 정말 맞는 것일까.

    자작극을 위해 한 사람을 죽도록 패야 하는 게 과연 맞는 걸까.

    처참히 고문당하는 안나를 바라보는 자일스의 얼굴이 생각났다.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눈에 핏대를 세우며 죽여 버리겠다고 으르렁거리지도 않았다.

    자일스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바깥으로 분노가 터져 나오는 대신 뭔가가 그의 내면을 엉망으로 갉아먹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이쯤 되어 루이제는 한 가지 의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거짓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이 자극적인 이야기에 조금이나마 진실이 섞여 있기는 할까?

    이렇게까지 해서 거짓말을 지어내야 할까?

    자일스 헤센은…… 그는, 정말 악마였을까?

    그 또한 활자가 찍어 낸 허상의 베일을 뒤집어쓴 건 아닐까?

    루이제는 이러한 생각이 벨담에 대한 배신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국가가 하는 일은 절대 의심해서는 안 되는 법이니까.

    하지만 어떻게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환멸이 났다. 평생토록 믿어 온 신념의 맨얼굴을 목격한 그녀는 혼란에 빠졌다. 이제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길을 잃었다. 아주 오래간만에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새로운 이정표가 필요한데, 그걸 어디서 찾아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벨담을 위해서’. 마법의 주문과도 같았던 말은 더 이상 루이제를 고양시키지 못했다.

    오랜 고민 끝에 그녀는 생각의 흐름을 반대로 바꾸어 보았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어야 할지 고민해 보는 건 어떨까?

    그러자 답이 보였다.

    문득, 루이제는 스스로가 죽음에 대한 답을 아주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는 사실을 함께 깨달았다.

    *

    안나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폭행을 끈질기게 버텨 냈다. 그녀의 살갗 위에 검푸른 얼룩이 생길 때마다 자일스의 영혼에도 똑같이 멍이 들었다.

    저러다 뼈가 부러지는 건 아닐까?

    다시는 멀쩡히 걷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녀가 다시는 피아노를 치지 못하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자일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졌다.

    안나가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미래를 그들이 부수게 놔둘 수는 없었다.

    “멈춰, 제발! 더 이상 손끝 하나 대지 마!”

    그러나 돌아오는 건 낄낄대는 비웃음 소리뿐이었다.

    “들었어? 자기가 아직 다른 놈한테 명령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나 봐.”

    “뭐라고요? 잘 안 들리는데요, 대위님. 울지 말고 좀 더 또박또박하게 말씀해 주십쇼.”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자일스는 이게 현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저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건 바로 자신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안나가 대신 맞고 있는 거지?

    “그러고 보니까.”

    곤봉을 든 군인들 중 하나가 의식적으로 자일스를 곁눈질하며 운을 떼었다.

    “이제 생각난 건데, 이 여자 직업이 피아니스트랬지.”

    그는 쓰러진 안나의 손가락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손가락 하나라도 부러지면 피아노를 다시 못 치게 되는 건 아닐지 궁금하지 않아?”

    “야, 이거 봐라. 잔인한 새끼.”

    군인들이 소리 내어 웃는 모습을 보며 자일스는 냉정을 되찾으려 애썼다. 이렇게 된 이상 정말로 가만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수갑을 찬 상태로 자신을 붙든 군인들을 제압할 방법에 대해 빠르게 생각해 냈다. 곧 붙잡히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진짜 할 거야? 진짜로?”

    “못 할 게 뭐가 있어. 이러는 목적이 뭔데? 저놈 꼭지가 돌아 버리게 만들어야 한다고.”

    자일스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현실적으로 두 명의 군인을 힘으로 제압할 수는 없다. 뭔가 다른 작전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가 무언가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기절한 사람처럼 누워 있던 안나가 벌떡 일어나 군인의 손아귀를 깨물었다. 군인이 비명을 지르며 곤봉을 놓치자 안나는 그것을 잽싸게 주워 들었다.

    물론 그녀는 비틀거리다 다시 무릎을 꿇고 쓰러졌지만 눈빛만은 형형히 살아 있었다.

    안나는 무기를 두 손으로 붙들고는 소리를 질렀다.

    “오지 마! 난 분명히 경고했어!”

    그러나 그들의 눈에 안나는 여전히 힘없는 여자일 뿐이었다. 안나의 외침은 오히려 그들의 비웃음만 샀다.

    “뭘 경고한다는 거지?”

    “내 눈엔 그걸 휘두를 수조차 없을 것 같은데요, 영애님.”

    군인들이 안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기 시작했다. 경계를 늦추지 않던 안나의 시선이 돌연 자일스를 향해 옮겨 왔다.

    그녀가 외쳤다.

    “받아!”

    안나가 있는 힘을 다해 곤봉을 던졌다. 군인들의 정신이 분산된 사이 팔을 들어 올려 무기를 받아 낸 자일스는 곤봉을 휘둘러 오른쪽 군인의 턱뼈를 가격했다.

    한쪽 팔이 자유로워지자 다른 한 놈을 제압하는 건 쉬웠다. 한편 죄수가 무기를 들고 반항을 시도할 경우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전달받지 못했다.

    당황한 나머지 군인들이 멈칫거리는 사이 자일스는 그들을 안나에게서 멀리 몰아냈다.

    “씨발, 뭐야!”

    “그거 당장 내려놔! 명령이다!”

    “나는 벨담군이 아니야. 명령에 따를 이유는 없지.”

    자일스는 안나의 앞을 막아선 채 서늘한 어조로 말했다.

    “안나를 내버려 둬.”

    그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지금 뭘 하는 거냐?”

    언짢은 장교의 고성에 군인들이 즉각 자세를 바로 했다. 루이제가 문가에 서서 쓸모없는 부하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방 안이 침묵으로 가득 찼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

    “소령님, 그것이…… 이 여자가 저항을 시도하는 바람에.”

    “들을 가치도 없군. 이 너저분한 상황은 내가 정리한다. 너희 모두 당장 나가.”

    우물쭈물하는 군인들을 향해 다시 한번 고성이 터져 나왔다.

    “나가!”

    그제야 군인들이 방을 우르르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루이제는 팔짱을 풀고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아직 자일스는 손에 곤봉을 들고 있었다. 루이제를 믿을 수 없었던 그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안나를 힐끔 바라본 루이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거 내려놔.”

    “내가 뭘 믿고?”

    “봐. 내 손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잖아.”

    그러나 자일스는 여전히 루이제를 믿지 않는 눈치였다.

    “안나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야. 감히 나를 믿으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이 말만은 믿어 줘. 곤봉을 바닥으로 떨어뜨려. 발로 차 버려도 좋고.”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진실을 읽어 내려는 듯하던 자일스가 이내 안나와 가까운 쪽으로 무기를 떨어뜨렸다.

    루이제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자일스는 자유롭지 못한 팔로 안나를 안아 들고 침대에 눕혔다. 안나는 시트가 등에 닿을 때조차 고통에 찬 신음을 뱉어 냈다.

    “왜 왔지?”

    물어 오는 목소리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루이제는 그를 바라보며 이 작전은 방향 자체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자일스는 더욱 초췌해졌을 뿐, 여전히 괴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재판일이 정해졌어.”

    “그래서?”

    “알려 주려고. 사흘 후에 출석하게 될 거야.”

    “판결에 의미가 있나?”

    그는 사형수였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재판정에 모이는 건 자일스가 사형을 받게 되리라는 걸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위함에 지나지 않았다.

    루이제는 대답하는 대신 안나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두 눈을 부릅뜨고 있던 그녀는 긴장이 풀렸는지 두 눈을 감고 기절해 있었다.

    엉망이었다.

    모든 것이 다.

    “내가 죽으면 안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루이제는 이번에도 자일스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안나는 자일스가 사형을 당하기 전에 죽을 운명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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