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과거의 어느 날.
루이제는 베흐만 대령의 집무실에 들어서며 경례를 올려붙였다.
“벨담에 무궁한 영광을. 대령님, 부르셨습니까?”
“아, 루이제. 적절한 때에 바로 와 줬군. 여기 앞에 앉게.”
그녀는 책상 앞으로 걸어가는 발소리마저도 신중히 하며 명에 따랐다. 반면 베흐만 대령은 바로 자리에 앉지 않았다.
그의 집무실에는 특이한 꽃을 피우는 화초가 몇 가지 있었다. 그는 화초들에 물을 주는 중이었다.
“그래서, 요새 별문제는 없나?”
“모든 것이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비록 자일스 헤센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그런 사실까지는 보고할 필요가 없었다. 진실을 아는 건 헤센과 그녀 둘뿐이었다.
“안정적이라. 그것 참 희귀한 소식이군.”
“아무리 자일스 헤센이라지만 벨담이 주시하는 이상 꼼짝도 못 할 겁니다. 물론 도주의 가능성 또한 미미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말고. 자신감 넘치는 것 같아 좋군그래. 분명 이 임무를 처음 내려 받았을 땐 달갑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아주 잘해 주고 있어.”
“그렇지 않습니다.”
루이제가 곧바로 대답했다.
“저는 사령부의 명령에 단 한 치의 이견도 가진 적 없습니다.”
“어깨에 힘 풀게,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니까 말이야. 그와 절친한 동기였던 과거는 나도 잘 알고 있네. 그래서 우리는 자네를 더욱 믿을 수 있었던 거라네. 적에 대해 잘 알수록, 더욱 대비하기도 쉬워지는 법이니까.”
마침내 베흐만 대령이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 보았다. 정보국 소속 참모인 그는 군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인상의 소유자였다.
군복을 입고 있지만 않았다면 정말 평범한 원예가처럼 보일 정도였다.
“지금까지 자일스 헤센을 관찰했으니 그에 대한 견해가 생겼으리라 믿네.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그가 정말 인간의 탈을 쓴 악마이던가?”
“제가 보기에는…….”
그가 기대하는 답이 뭘까? 이런 상황이 올 때마다 루이제는 진실을 그대로 전하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그녀의 전략은 절대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는 생각보다 얌전합니다.”
“얌전하다고?”
“예, 그렇습니다. 눈에 띄게 저항하지도 않고, 명령에도 순순히 따릅니다. 처음에는 빈틈을 노리는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런 속셈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체념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기다리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흠. 그렇군.”
“그래도 저희는 긴장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바로 대응할 준비가 갖춰져 있습니다.”
“고틀리프 소령.”
“예, 대령님.”
“우리가 문제 삼는 건 바로 그 부분이라네.”
뭘 말하는 거지? 루이제는 지금껏 이루어졌던 대화를 머릿속으로 빠르게 복기해 보았다. 뭔가 실언이 있었나? 베흐만 대령의 얼굴을 살피니 다행히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자일스 헤센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평범해.”
루이제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살육광도 아니고, 미치지도 않았으며 악의와 증오가 가득 차 들끓는 사람도 아니지. 희대의 살인마라기에는 너무도 점잖고, 이성적이고 심지어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할 줄도 안다네.”
베흐만 대령은 웃으며 덧붙였다.
“국민들이 배신자에게서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은 특히나 아니지.”
“……예. 이해했습니다.”
“죄수로서 얌전히 굴어 주는 건 분명 편리한 일이지.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그는 평범한 죄수여서는 안 된다네. 서커스를 보러 갔는데 맹수가 온순하게만 군다면 그 얼마나 실망스러운 일이겠는가. 기억하게, 고틀리프 소령. 우리는 범죄자를 처단하고 있는 게 아니야. 저 바깥 사람들을 위한 쇼를 벌이고 있는 거지.”
루이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의 눈을 가려 줄 자극적인 이슈들과 스캔들…… 벨담에 필요한 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자일스 헤센은 그 자체로도 쇼를 위한 완벽한 배우가 되어 주었다.
“사람들은 평범한 악마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아.”
“예. 그렇겠죠.”
“그가 악마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눈치챈다면, 그보다 귀찮아질 수는 없겠지. 안 그런가?”
루이제는 불길함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베흐만 대령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예정된 재판일이 얼마 남지 않았네. 그때까지 우리는 준비된 맹수를 내놓아야만 해. 나는 얼마 전, 자일스 헤센을 훌륭한 맹수로 만들 만한 탁월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네.”
그가 책상 위로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루이제는 서류를 받아들자마자 경악에 휩싸였다.
그 서류에 올라 있는 사람은 바로 안나였다.
자일스가 사랑해 마지않는 단 한 명의 여자…….
“그녀를 이용하게.”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못 할 건 또 뭐란 말인가? 한번 시작했으면, 제대로 끝을 볼 줄 알아야지. 게다가 이건 대의를 위한 일이네. 흐지부지 마무리하는 건 용납될 수 없어.”
대의……. 양날의 검과도 같은 단어를 머릿속으로 되뇌어 보던 루이제는 하얗게 변한 머릿속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혹시 자신이 없는 겐가? 고틀리프 소령.”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안에 한해서는 그 어떤 행위를 가해도 상관없네. 우리의 목적을 이룰 수만 있다면. 여자가 어떻게 되든, 살든 죽든……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건 자일스 헤센이야. 평범한 자일스 헤센이 아니라 최악의 살인자 자일스 헤센이지.”
서류가 거두어져 갔다. 베흐만 대령은 서류에 불을 붙이며 그것이 천천히 타들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직하게 말했다.
“이 모든 게 벨담을 위한 일이야.”
벨담을 위해서.
그 말에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루이제와 같은 사람들에게 벨담은 목숨보다도 우선하는 존재였기에, 그 이름 앞에서는 저항할 수도, 울음을 터뜨릴 수도 혹은 도망칠 수도 없었다.
***
자일스는 군인들에 의해 붙들린 채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조리 지켜봐야 했다.
커다란 남자들에 둘러싸인 건 안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마치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이,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형벌을 받아 내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벌을 받는 건가? 안나가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을 대신 받고 있는 건가? 하지만 왜? 그가 불을 질렀기 때문인가? 죄수로서 얌전하게 굴지 않았기 때문인가?
“안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그가 분노에 차 외쳤지만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결국 이 모든 게 전부 다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저러다가 안나가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움에 휩싸인 자일스는 루이제를 향해 빌었다.
“제발, 제발 그녀를 놔줘. 죄를 저지른 건 나야. 내가 모든 걸 감당할 테니까 안나는 건드리지 마.”
그러나 루이제는 석고상보다도 차갑고 미동 없는 얼굴로 이 모든 현장을 지켜보기만 할 뿐, 대답을 돌려주지는 않았다.
“루이제 고틀리프!”
그러나 그녀는 절대로 자일스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를 무시하려는 것일까, 혹은 그럴 자신이 없는 걸까?
그의 호소가 애원으로 바뀌고, 애원이 곧 울부짖음으로 변모하고 나서야 폭행이 끝났다.
“그만.”
루이제의 명령 한 마디에 군인들이 안나에게서 몇 걸음 떨어졌다. 안나는 이제 만신창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루이제는 단 한 마디만을 말할 뿐이었다.
“의사를 불러라.”
“예, 알겠습니다.”
“정해진 인원을 제하고 나머지는 철수해.”
이런 짓을 저질러 놓고도 그들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기계처럼 명령에 따랐다. 자일스는 숨을 몰아쉬며 루이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루이제는 끝까지 자일스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매정한 걸음걸이였다.
그녀의 뒤로 문이 닫히고 나서야 군인들이 그를 내팽개치듯 놔주었다.
손아귀에서 풀려난 자일스는 비틀거리며 안나를 향해 다가갔다.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온몸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
“안나.”
마음 같아서는 그녀를 품에 안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안나에게 새로운 고통이 될까 봐 자일스는 죄인처럼 무릎만 꿇고서 눈물을 흘렸다.
그가 안나의 손을 잡았다. 자일스가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인 모양이었다.
“미안해, 안나. 널 이렇게 만들어서…… 정말 미안해.”
왜 그녀를 벨담에 데려왔을까?
자일스는 왜 벨담이 그녀를 지켜 주리라고 그리도 확신할 수 있었을까?
전부 다 그의 패착이었다. 안나를 벨담으로 데려온 것도, 그녀가 목숨의 위협을 느끼게 만든 것도…… 그리고 그의 개인적인 욕심을 위해 제때에 그녀를 놔주지 못한 것도. 전부 다.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고 누워 있던 안나가 스르르 눈을 떴다. 자일스는 새파란 눈을 마주하며 누군가 심장에 칼을 박아 넣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곧 부서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그때.
돌연 안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이 상황이 참 웃겨 죽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는 대신에 실컷 웃었다. 그리고 힘이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개새끼들.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지.”
그녀의 손이 뻗어 왔다. 자일스는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안나의 손을 자유롭지 못한 손으로 붙들었다.
“울지 마, 자일스.”
안나는 나무라는 듯이 자일스를 바라보았다. 푸른 눈 속에서 뭔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난 절대 안 죽어. 그러니까 너도 무너지지 마.”
자일스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이미 그의 마음속 한구석은 형편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를 집어삼킨 것은 분노와 증오가 아닌 처절한 무력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