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81화 (81/93)
  • <81화>

    ‘모종의 이유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 글뤼비흐네 잡지사가 해외의 동종 업계 회사를 인수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이너 잡지사인 글뤼비흐네가 무슨 돈이 생겨서 해외 진출까지 한단 말이지? 그야말로 미스테리였다.

    일각에선 벨담의 상황이 더 나아질 것 같지 않자 대출을 끌어모아서 아예 해외로 뜨려 한다는 추측까지 나왔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글뤼비흐네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은 금방 식어 버렸다. 그래 봤자 인기 없는 잡지사일 뿐이지. 곧 쫄딱 망해서 빚더미에 올라앉겠군.

    오래간만에 업계의 관심을 사로잡았던 글뤼비흐네는 다시 ‘그저 그런 잡지사’로 되돌아가 모두의 관심 속에서 잊혀졌다.

    벨담에서도 별 소득을 내지 못하던 잡지사가 해외에서 커다란 주목을 얻게 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글뤼비흐네를 대표로 방문한 기자에게 당부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에 내던 기사들을 계속 발행하세요. 본사를 옮기는 것처럼 보여야 해요. 작은 잡지사라 처음에는 주목을 받게 되겠지만 곧 관심이 식을 거예요.’

    벨담 사회는 잡지사 하나에 눈길을 두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주도로 자극적인 정보들이 판을 치는 요즈음에는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정상적으로 잡지를 발행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세요. 성급하게 굴면 안 돼요. 뭔가 이상하다는 걸 정보국에서 눈치채면 다 수포로 돌아가는 거예요.’

    라디오 방송 사건 이후로 정보국은 엘로이즈 비스마르를 내버려 두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정보국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뜻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자일스 헤센의 연인이었다.

    그 후로도 나는 서적들을 사들이는 것으로 위장해 글뤼비흐네 관계자들을 만났다.

    ‘이 정도 원고라면 괜찮겠습니까?’

    원고를 꼼꼼하게 훑어 내려가던 나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이 계획에 확신이 없는 듯했다.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만큼 대단한 효과가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외국에서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괜찮아요.’

    정말 괜찮았다. 한낱 나라는 존재가 세상을 뒤흔들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허탕만 친 꼴이 될 수도 있을 거다.

    ‘우선은 계속해서 진행해요. 결과를 보면 답이 나오겠죠.’

    벨담이 내 말을 들어 주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에게 호소하면 될 일이었다. 내 이야기가 단 한 사람에게라도 닿는다면, 그리고 그것이 아주 조금이라도 나와 자일스를 도울 수 있게 된다면.

    가끔은 나도 생각한다. 이런 게 정말 자일스를 살릴 수 있을까. 어차피 벨담 내에서 그는 공인된 사형수나 마찬가지인데. 벨담 바깥의 여론을 움직여 봤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래도 나는 뭔가 꾸준히 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불안해서 잠이 오질 않았다.

    이게 소득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면 또 다른 방안을 찾으면 될 일이다.

    머지않아 타국에 본사를 옮긴 글뤼비흐네 잡지사가 내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발행했다.

    나는 단박에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정보국 사람들이 굳은 얼굴로 저택에 쳐들어올 이유가 그것 말고 더 있겠는가?

    아렌트 홀츠만이 입구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비스마르 백작가의 가주로서 웃으면서 그를 맞이했다.

    “오랜만이에요, 요원님. 차라도 한잔 드릴까요?”

    물론 그가 차를 마시러 온 게 아니라는 건 우리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가 한숨에 섞어 흘려보내며 말했다.

    “엘로이즈 양…… 지금부터 일어날 일에 항의하실 자격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계시겠지요.”

    해 보라지. 나는 뭐든지 대가로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마치 내 머릿속을 읽은 것 같았다. 쓸데없는 첨언 따윈 필요 없다는 듯이 그가 수행원들을 향해 턱짓을 했다. 커다란 남자들이 나를 붙잡으려 하자 일부 사용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잠시만요! 지금 아가씨께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이분은 비스마르 백작가의 가주이십니다.”

    요제프가 수행원들을 내게서 떼어 내며 항의했다. 나는 그에게 조금 고마워졌다. 허울뿐인 신분이라지만 그래도 나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용인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엘로이즈 양께서는 잠시 다른 곳에서 지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가씨께서 동의한 부분이 아니라면 인정할 수 없습니다.”

    “국가를 위한 일입니다.”

    그 한마디에 요제프는 할 말을 잊은 채 아렌트와 나를 번갈아 보기만 했다. 나는 의로운 사용인이 더 흥분하기 전에 그를 달랬다.

    “괜찮아요. 내겐 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

    “하지만…….”

    “어디로 가면 되죠?”

    저항해 봤자 내게 더 이상 물러설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나는 구태여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다.

    아렌트는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따라오시죠. 나머지는 저희가 알아서 해 드릴 겁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이보다 최악의 상황을 몇 번이나 겪었던 적이 있었다. 또한 그들이 아직은 나를 죽일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내겐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제 요제프를 포함한 사용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내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문득 내 눈이 아델레와 마주쳤다. 그녀는 나와 눈을 오래 마주치지 못하고 황급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들은 내게 가는 길을 보여 주지 않았다. 차창은 검은 천으로 막혀 있었고 이동하는 내내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그들을 단단히 화나게 만든 모양이었다. 뭐, 그렇다 해도 놀라워할 일은 아니었다. 나도 대충은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여론의 반응이 어땠는지 알 수 있었다면 좋을 텐데…….

    얼마 후 차에서 내린 나는 건물의 모양새를 올려다볼 새도 없이 출입문 안으로 등을 떠밀렸다.

    그들이 내 발걸음을 재촉하는 와중에도 나는 열심히 눈을 굴려 보았다. 다행히 나를 험한 장소로 데려온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까지는.

    이곳은 또 다른 저택일까? 아니면 정보국 소유 건물이라도 되나? 텅 비어 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건물 내부는 내게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죠?”

    내가 용기 내어 물었으나 아렌트는 등을 보인 채 짤막하게 대답했다.

    “안전한 곳이니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원래도 안전한 곳에 있었는데요.”

    “적어도 이곳에선 아무도 엘로이즈 양을 귀찮게 하지 못하겠죠.”

    나는 그의 말뜻을 알아먹지 못할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우리는 계속 걸었다. 이 건물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넓었다. 게다가 창문이 있어야 할 곳은 모조리 판자로 못질해 삭막하기까지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는 좀 더 뻔뻔하게 굴어 보기로 했다.

    “반응은 어떻던가요?”

    그는 나를 무시했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당신들이 이렇게 화를 낼 정도면 내가 헛일을 하지는 않았나 봐요, 그렇죠?”

    미세하게 그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가 안경을 고쳐 쓰며 짙은 한숨을 내쉬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내 말이 사실인가 보군. 나는 이런 식으로라도 내가 정말 의미 있는 일을 했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그래도 조금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이 사람들이 나를 깊숙한 곳에 가두기로 작정한 거라면 나는 이제 자일스를 어떻게 도와야 하지?

    벌써부터 탈출 동선을 그리고 있는데 돌연 아렌트의 걸음이 멈추었다.

    “들어가십시오.”

    그가 또 다른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나는 표정을 읽기 힘든 그의 얼굴을 한번 올려다보고 나서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첫 인상은 생각보다 넓은 방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전혀 아늑하지는 않았다. 새하얀 방은 오히려 차갑게 느껴지기까지 할 정도였다.

    방 한구석에서 누군가 몸을 일으켰다. 단순히 다른 수행원인 줄 알고 그를 무시하고 있었던 내가 그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그 순간, 나는 평정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안나?”

    자일스가 거기 있었다. 다행히 그는 멀쩡해 보였다. 고문을 당한 것 같지도 않았고, 내가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멀끔했다. 다만 묵직해 보이는 수갑이 그의 손목을 구속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자일스 또한 이게 현실임을 자각했는지 확신 어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안나!”

    “자일스!”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어서 무작정 그에게로 달려가 안겼다. 물론 자일스는 나를 안아 줄 수 없었다. 상관없었다. 나는 있는 힘껏 그를 껴안았다.

    혹시라도 이게 허망한 꿈 중 하나일까 봐 입술을 깨물어 보았지만 다행히 꿈은 아닌 것 같았다. 단단한 몸을 감싼 천의 감촉이 생생했다. 꿈이 아니야. 이건 현실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런 식으로 자일스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기에 더 그랬다.

    자일스는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동시에 서글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두 손을 움찔거리자 쇠사슬이 쩔그렁거리는 소음을 냈다.

    나는 자일스에게 뭔가를 묻기 위해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일스, 그들이 너를 괴롭히지는 않았어?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무사했던 거야? 아무 일 없었던 거지?

    하지만 그들은 내게 그마저의 시간도 아깝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우리의 재회는 금방 끝을 고했다.

    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를 붙잡고 거칠게 떼어 냈다. 무어라 항변할 새도 없이 나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거친 마룻바닥에 피부가 긁혀서 피가 맺혔다.

    “지금 뭐 하는 거지?”

    화가 난 자일스가 나를 향해 다가오려 했으나 그마저도 군인들에 의해 제지당했다. 그는 두 팔을 붙잡힌 채 불안이 서린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도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질 거란 사실을 직감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렌트는 벌써 어디로 가 버린 건지 보이질 않았고 군인들만이 나를 둘러싸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를 찾아왔던 소령, 루이제 고틀리프였다.

    “루이제, 지금 뭘 하려는…….”

    그녀는 유난히 굳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더니 내게는 들려주지 않았던 또 다른 목소리로 명령했다.

    “……시작해.”

    “루이제!”

    자일스의 외침 따위는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커다란 군인들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그들의 손에 들린 곤봉을 발견하고는 본능적으로 몸을 동그랗게 말고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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