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대전쟁은 많은 것을 앗아 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던 터전, 앞날에 대한 희망과 꿈. 그뿐이었겠는가. 차라리 그뿐이었다면 좋았을 뻔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개중에는 루이제의 동료나 부하들도 있었다. 하지만 루이제는 그들의 숨이 멎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매정하게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전쟁이란 그런 거였다. 남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눈앞에 있었다.
‘고틀리프 소령’으로서는 그랬지만, 루이제 고틀리프는 단 한 번도 그들의 죽음을 무시할 수 있었던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죽은 이들의 흔적이 미련과 악몽이 되어 발목을 붙잡을까 봐 두려웠다.
루이제는 아직도 그의 직속 부관의 숨이 꺼져 가던 날을 기억했다. 그는 끝까지 눈을 뜨지 못했다. 부관이라고는 하지만 가장 믿음직스러웠고 절친했던 이였다. 사관생도 시절에 아끼던 후배 녀석이기도 했고.
조금 아껴 줬더니 그는 종종 건방지게 기어오르기도 했다.
그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옛 시절에 그랬듯이, 끝까지 루이제의 속을 뒤집어 놓고야 말았던 부관은 결국 남들처럼 그녀의 곁을 떠나갔다.
이번에는, 속 좋게 웃으며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일 따윈 없었다.
불현듯 얼굴 위로 쏟아져 오는 선득한 감각에 자일스가 눈을 떴다. 몽땅 젖어 버린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니 한 사람만을 제외한 모두가 당황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흐트러진 몰골의 루이제가 물컵을 든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가 불시에 물을 끼얹은 게 분명했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이번에는 말간 정신으로 눈앞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소령님, 환자에게 갑자기 물을 끼얹으시면…….”
그러자 사나운 눈길이 의사 쪽으로 향했다. 순식간에 말이 멎었다.
“보고.”
화를 눌러 참는 듯한 목소리를 들은 의사가 잽싸게 대답했다.
“다행히 제때 구조를 받으셔서 신체상에 큰 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계셨더라면 위험했을 겁니다. 연기를 많이 들이마시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회복은?”
“그을린 부분에 물집이 잡힐 겁니다. 그 부분만 안내드린 대로 조치 취해 주시면 다른 건 괜찮을 겁니다.”
루이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의사는 이만 가라는 제스처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이 빠르게 자리를 떴다. 수많은 눈동자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무어라 묻기도 전에 루이제가 한 번 더 말했다.
“다 나가.”
“예?”
“나가라고. 전부 다. 우리 대위님께서 진지한 훈육을 받으셔야 할 모양이니까.”
슬금슬금 그녀의 눈치를 보던 군인들이 하나둘씩 방을 빠져나갔다. 머지않아 처음 와 보는 방에는 자일스와 그녀 둘만이 남게 되었다.
루이제는 부하들이 자리를 뜨자마자 담배를 한 대 꺼내 입에 물었다. 새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동작이 성급했다.
“……환자 옆에서 담배를 피워도 되나?”
자일스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루이제의 시선이 옮겨 왔다. 치고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듯이, 그녀가 담배 연기를 천천히 빨아들였다가 다시 내뱉었다.
루이제는 테이블 위에 살짝 걸터앉아 그를 내려다보았다.
“왜 그런 거야?”
“…….”
“정말 뒈질 생각이었던 거야? 그 안에서 불을 붙이게?”
자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초보적인 실수 때문에 계획에 실패했다는 데에 대한 침울함만이 그를 감쌌다.
루이제는 끝까지 그를 몰아붙였다.
“아니면, 반항인가? 네 눈엔 내가 그따위 반항을 받아 줄 정도로 쉽게 보였나 보지. 안 그래?”
“진정해. 죽으려 한 건 아니었으니까.”
“넌 정말 죽을 수도 있었어. 잠긴 방 안에서 불을 붙인 놈의 말을 나더러 믿으라는 거야? 이왕 처형당할 거, 화형당하고 싶다는 걸 우회적으로 표현한 건가?”
자일스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루이제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자일스는 그녀가 크게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소령이 아니라 루이제 본인으로서.
“멍청한 놈. 그 문은 안에서 열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어. 바깥에서는 자유로이 열 수 있지만, 문이 닫히고 안에서 다시 열려면 열쇠가 필요하지. 왜, 입스윈은 너무 구식이라 그런 건 처음 봤나 봐?”
“그런 거였군. 다음번엔 참고하지.”
“건방진 새끼야,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잖아.”
담배가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왜 그랬냐고 물었어.”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가?”
“딴소리하지 말고 네 입으로 직접 대답해.”
“정전을 틈타 도망치려고 했다. 난 네가 당연히 눈치챘을 줄 알았는데.”
“내가 그딴 걸 몰라서 물은 것 같아? 갑자기 마음이 바뀐 이유가 뭐냐고 묻는 거잖아.”
다시 그의 손목을 구속한 수갑이 쩔그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걸 다시 풀 기회가 더는 오지 않으리라는 걸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 왔다.
성공했어야 하는 건데.
보초병에 눈길을 빼앗겨 문에 주목하지 못한 그의 패착이었다.
“나는 매일 너를 보고 있었어. 분명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넌 죽은 사람 같았지. 식사도 억지로 하고, 묻는 말에 대답도 겨우 하고. 네게선 살려는 의지가 보이질 않았어. 뭐, 사형수가 으레 보이는 모습이긴 하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어. 하지만 넌 갑자기 달라졌어.”
루이제는 담배를 한 차례 더 빨아들였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그를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언제부터 그 깜찍한 계획을 머릿속에 품고 있었던 거지?”
문득 그녀가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니면, 네 손버릇이 희망을 주기라도 한 건가?”
“…….”
“쓸 만한 물건이 생기니까 참을 수 없어진 거겠지. 잠시나마 네가 날 상대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자일스 헤센, 말해 봐. 그 날에 무슨 생각 했어?”
“뭘 말이지?”
“정전 되던 날에 말이야. 무슨 생각 하고 있었냐고. 네가 날 두고 도망가지 않은 게 이런 짓을 벌이기 위해서 그런 거였나?”
자일스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루이제는 자일스가 다른 목적을 머릿속에 품고서 그녀를 구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어느 정도는. 그러나 라이터를 훔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조금 나중의 일이었다.
“그래. 네가 갑자기 동지애를 발휘해서 내 곁에 남았을 리가 없지.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이었다고 생각하니 이제야 완벽히 이해가 가네. 잠시나마 내가 널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던 내가 한심스러울 지경이야.”
자일스는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 그래 봤자 루이제가 받아들여 줄 것 같지도 않았고, 에너지를 낭비하기에 그는 너무 피곤했다.
“자일스 헤센. 마음을 바꾸게 된 계기가 뭐였어?”
“너무 명확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뭐?”
“안나가 말했잖아. 포기하지 말라고.”
루이제의 행동이 일순 멎었다. 담배 연기만이 공중으로 흩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녀는 납득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고작 그것 때문이었다고?”
“안나는 내가 살기를 바라.”
“그걸 그때가 되어서야 깨달을 만큼 아둔한 놈이었나?”
“……그럴지도 모르지. 그 당연한 사실을 잠시나마 잊고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가 희미하게 미소 짓는 모습을 보며 루이제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일스에게서 그런 표정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래 봤자 소용없어. 네가 사형대를 피해 달아날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그건 두고 볼 일이지.”
“자일스 헤센. 나는 잠시나마 네가…….”
루이제는 한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내 그녀가 체념한 표정으로 말했다.
“됐다. 그만하지. 너 같은 놈에게 이런 말을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질문에 대답했으니 나도 한 가지 물어도 되나?”
눈길이 마주쳤다. 자일스는 구태여 허락을 기다리지 않았다.
“나를 그 방에서 빼냈을 때…… 왜 울었지?”
정신이 몽롱할 때 스치듯 남았던 기억이라 사실은 그조차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제대로 본 게 맞는지. 루이제가, 벨담의 고위 장교가 한낱 죄수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는 게 사실이었는지.
어쩌면 그가 착각을 한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헛것을 본 것이거나.
그러나 단박에 거친 대답을 들려줄 줄 알았던 루이제가 잠시 침묵하는 것을 보면서 자일스는 의아해졌다.
왜 망설이지?
놀랍게도, 그녀는 화를 내거나 비웃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나도 그 이유를 좀 알 수 있었으면 좋겠군.”
루이제는 담뱃불을 지져 껐다. 그녀는 더 이상 대화할 마음이 없음을 군모를 눌러쓰는 것으로 대신 표현했다.
“쓸데없는 소동 피울 생각 마. 넌 절대 달아날 수 없어. 달아나더라도 잡히는 건 시간문제다. 네가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우리 쪽에서도 가만있을 수만은 없겠지.”
그녀가 덧붙였다.
“그러니 우리 둘 다 불편해지기 전에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루이제는 미련 없이 방을 나갔다. 그녀가 떠나자마자 자일스는 남몰래 한숨을 내려놓았다.
루이제의 경고 따위는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이제 다음 기회는 어떻게 노려야 하지. 경비는 더 삼엄해질 테고, 루이제도 다시는 그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사형대로 끌려갈 때까지 두 번째 기회 따윈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자로 막힌 창을 바라보던 자일스는 문득 그를 붙잡고 소리를 지르던 루이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가 눈물을 보였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도.
왜 그랬을까?
잠시나마 자일스가 죄수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던 걸까.
어째서 그를 죽어 가는 동료처럼 바라봤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