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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79화 (79/93)
  • <79화>

    자일스는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예전에는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할 수 있었던 거지? 마치 그때의 자일스는 잠시 자기 자신에서 벗어난 존재였던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 자일스의 신경은 완전히 곤두서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얌전해 보였지만 그의 머릿속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잠시 실의에 빠져 멈춰 서 있었던 그를 안나가 깨웠다. 라디오를 통해서나마 그녀와 만난 이후로 자일스는 절대 예전 같지 않았다.

    재판까지 며칠이나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적거리는 게 허용될 정도로 충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일스는 허공을 노려보며 유순한 죄수처럼 앉아 있었다. 보초를 서는 군인이 그를 의심해서는 안 되었다. 때를 기다려야 했다.

    자일스는 적절한 순간이 오기만을 차분히 기다렸다. 오래전, 저격 부대에 차출되었을 적 목표물이 사정거리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던 때처럼.

    루이제는 안나가 괜찮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루이제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안나는 인터뷰를 망치는 위험을 감수하고 그에게 제발 돌아와 달라고 외쳤다. 그 사실만으로도 안나는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그녀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자일스는 뭐라도 해야 했다. 설령 성공할 확률이 극히 낮다고 해도 말이다.

    방송이 나간 뒤로 며칠이나 지났을까? 라이터를 빌미로 수색을 당하기는 했지만 자일스는 나름 조용히 지냈다. 군인들로부터 ‘이런 게 정말 그 지독한 놈이 맞나’ 싶은 눈초리를 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과연 모범 죄수가 되고 싶어서 그랬을까?

    자일스는 눈을 감고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제발. 제발. 오늘은 기회가 와야 한다. 하루를 더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안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이 희미하게 번쩍이는 것이 느껴졌다. 자일스는 눈을 뜨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전등이 깜박이고 있었다. 불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을 몇 번 반복하더니 어느 순간 시야가 완전히 깜깜해졌다.

    순식간에 문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군인들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런, 젠장. 또 뭐야?”

    “정전인 것 같습니다.”

    “하인리히! 힌들러 따라서 최대한 빨리 복구할 수 있도록 해!”

    “알겠습니다.”

    벨담의 주요 전력 공급원이 대다수 폭격을 당한 이래로 정전은 아주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 되어 버렸다. 길어 봤자 몇 시간 정도 내에 다시 불이 들어올 테지만 군인들에게 그 시간을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자일스는 보초를 서던 군인이 문 너머로 멀어지는 소리를 확인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며칠 밤을 꼬박 새며 마룻바닥에서 뜯어 낸 나사를 신발 안에서 꺼냈다. 찰칵, 나사에 의해 자물쇠가 풀리며 수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 그의 두 손은 자유로웠다. 자일스는 매트리스 안에 숨겨 둔 라이터를 꺼내 불이 잘 붙을 만한 곳은 전부 불을 붙였다.

    화재를 효과적으로 일으키기 위해서는 공기의 순환이 필요했다. 그는 버려진 벽난로 안에 나동그라져 있던 부지깽이로 판자를 뜯어 냈다.

    창문을 열자 금세 바람이 통했다. 불이 순식간에 방 안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아직 전등은 제 빛을 되찾기 전이었다. 시간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건물 구조상 그들이 눈치채기까지는 얼마 정도가 더 걸릴 터였다.

    이제 자일스는 문을 열고 방을 탈출할 것이다. 그리고 혼자 남겨져 있는 군인을 찾아서 그의 목을 조른 다음, 그의 제복 상의를 빼앗아 걸치기만 하면 어둠 속에서 자일스와 다른 군인들을 식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 틈을 타서 저택을 은밀히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자일스는 문고리를 잡고 돌리려 했다. 하지만 문이 잠겨 있었다. 일순 그의 행동이 멈췄다. 그들이 평소에도 문을 잠갔나? 적어도 자물쇠 돌아가는 소리를 들은 적은 없던 것 같은데.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벌어지자 그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자일스는 주먹을 휘둘러 문에 달린 유리창을 박살 냈다. 그 사이로 팔을 뻗어 보려 했으나 문고리까지 잘 닿지가 않았다.

    이제는 힘으로 문을 부숴야 했다. 그는 문에 몸을 부딪쳐 보았다. 몇 번만 더 반복하면 문을 부수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연기에 콜록거리면서도 있는 힘껏 문을 부수려 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일스! 너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젠장! 자일스는 소매로 코와 입을 막았다. 바람의 힘을 입은 불길은 그를 오래 기다려 주지 않았다. 조금만 더 하면 문을 부술 수 있는데. 기침 때문에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괜찮아. 시도는 좋았으니까.

    그가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루이제는 바깥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 좀 그만 피우라던 동료들의 잔소리가 떠올랐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런 거라도 피우지 않으면 어떻게 살란 말인가? 루이제 같은 사람들은 알코올에 중독되거나 골초가 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어쩌면 그보다 더 안 좋을 수도 있고.

    그녀는 안나가 했던 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안나가 자일스와 손을 잡은 사기꾼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안나를 찾아갔던 건 단순히 그녀가 어떻게 그런 식으로 방송을 망칠 수 있었는지 궁금해서였다. 자일스 헤센이 대체 그녀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그녀가 정상적인 상태이기는 한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듣지 말았어야 할 말을 듣고 말았다.

    ‘그가 미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과거의 기억들을 끝까지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자일스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거예요.’

    하지만 그뿐이었는가.

    ‘처음에, 그는 과거의 일들을 머릿속에서 다 내버렸다고 했죠. 품고 있다간 미쳐 버리고 말 것 같다고. 하지만 나중에 그건 다 거짓말이었다고 내게 고백했어요. 내게 벨담에서의 추억을 이야기해 주면서, 그것들이 없으면 정말 괴물이 되어 버릴까 봐 무서웠다고 말했어요.’

    하……. 루이제는 담배를 피우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비단 자일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어 버리지 않기 위해 과거를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사는 사람. 그건 루이제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자일스도 그랬단 말인가.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거지? 자일스는 그의 친구들을 죽이고 하나뿐인 누이마저도 죽였다. 그런 짓을 하고서 좋은 시절의 추억을 품고 산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그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그는 정말 미쳐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거지?

    안나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정부가 선전했던 내용들 중엔 거짓이 얼마나 포함되어 있을까?

    루이제는 머리를 흔들어 퍼즐 조각들을 흩어 버렸다. 쓸데없는 생각일 뿐이다. 곧 죽을 죄수에게 감정적으로 흔들려 봤자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중얼거렸다. 잊지 마, 루이제 고틀리프. 자일스 헤센은 더 이상 네 동기가 아닌 네 임무야. 넌 임무를 수행하기만 하면 돼.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담배를 한 차례 더 빨아들이던 그녀가 무심코 위를 올려다보았다. 생각 없이 한 행동이라기보다는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감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판자로 완전히 막혀 있어야 할 창이 뚫려 있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 틈으로 보이는 저 불빛은…… 절대 전등 불빛일 수가 없었다.

    “씨발!”

    그녀가 욕설을 내뱉으며 손전등을 켜고 안전 가옥 안으로 달려들었다.

    자일스! 자일스 헤센!

    그의 몸이 더 이상 나른해지는 것을 막기라도 하려는 양 누군가 귀가 찢어질 듯한 소음을 냈다. 뭔가 부서지는 것 같기도 한 소리였다.

    여자는 계속해서 외쳤다. 나와! 나오라고, 이 개자식아! 자일스는 몸을 움직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땀이 얼굴을 타고 줄줄 흘렀다.

    이제 끝인가?

    그런 생각이 들던 그때, 열기가 그의 온몸을 덮쳤다.

    자일스는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일어나.”

    누군가 그의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자일스는 흐릿하게나마 눈을 떴다. 이제 시야는 다시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만은 아직 그렇지 못했다.

    루이제는 그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걸 용납할 수가 없는지 연신 그의 뺨을 때려 댔다. 아팠지만 효과가 있었다. 거친 손바닥으로 맞을 때마다 머릿속의 전구가 하나둘씩 켜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루이제는 아직도 그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점점 이성을 놓고 있었다.

    “정신 차려! 씨발, 정신 차리라고! 자일스!”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자일스의 얼굴을 내리치던 끝에 뭔가 흉기처럼 보이는 것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보다 못한 부하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소령님.”

    “뭐야, 이거 안 놔?”

    “조금 흥분하셨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난 자일스를 깨워야 돼! 깨워야 한다고! 눈을 못 뜨면 그대로 죽어!”

    “고틀리프 소령님…….”

    루이제는 결국 부하의 만류에 못 이겨 손에 들린 물건을 떨어뜨렸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헤센 대위!”

    목소리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일스는 힘겹게 눈을 떴다. 물에 흠뻑 젖은 그는 덜덜 떨면서도 젖어 있는 게 그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천천히 깨달을 수 있었다.

    루이제는 충혈된 눈으로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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