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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78화 (78/93)
  • <78화>

    손님을 안으로 모셨다는 보고를 받은 나는 응접실로 향했다. 이제 그곳에는 군인이 아닌 민간인 기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이럴 줄은 몰랐는데 근래 들어 손님을 꽤 자주 맞이하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 선택이었다. 나는 이 ‘손님’을 돌려보내라고 하지 않았다. 백작가의 이름값에 걸맞은 티 세트가 테이블 위에 차려져 있었다.

    지난번과 달리 나는 자연스레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디.”

    “그냥 편하게 대하세요. 어차피 우리뿐이잖아요.”

    그녀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경을 쓰고 나름 유행하는 헤어스타일로 머리를 만진 그녀는 다른 기자들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그러니까, 내 관점으로 보자면 덜 사기꾼 같았다.

    오히려 그녀는 기자라기보다는 사인을 받으러 온 독서광처럼 보인다는 표현이 더 알맞은 사람이었다.

    나를 직접 만나게 되었다는 게 영 믿기지 않았는지 안경 너머로 보이는 두 눈이 호기심과 열의로 빛나고 있었다.

    돌연 기자가 벌떡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아니타 뮐러라고 합니다. 글뤼비흐네 잡지사에서 나왔고요.”

    그러면서도 아니타는 확신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귀족에게 이런 식으로 악수를 청해도 되나? 물론 나는 그런 귀족식 예법 같은 건 상관하지 않았기에 흔쾌히 그녀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저도 읽어 봤어요.”

    “정말요?”

    “네. 아주 흥미롭던걸요.”

    일부러 애매모호한 단어를 골랐는데도 아니타의 낯빛이 금세 상기되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저희 잡지사는 주로 유명인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꼭 가수나 배우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이들이라면 저희 잡지사의 페이지를 채우기에 충분하죠. 글뤼비흐네는 아주 다양한 주제를 다뤄 왔어요. 그중에서도 저희는 스캔들 전문이죠.”

    “더 자세히 말해 봐요.”

    “저희는 스캔들을 찾아다녀요. 하지만 오해하지는 마세요. 다른 황색언론처럼 도마에 오른 사람들을 물고 뜯는 그런 짓은 하지 않으니까요. 저희가 관심 있어 하는 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일말의 진실입니다. 자극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진실만큼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없죠. 레이디께서 출연하신 라디오 방송이 저희에게 영감을 주었어요.”

    글뤼비흐네 잡지사의 특성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주로 가십거리에 오른 인물들의 인터뷰를 싣곤 했다.

    거기에 자극적인 요소를 위한 과장이나 악의적인 편집이 거의 들어가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던 나는 이 잡지사야말로 대화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글뤼비흐네에는 다른 문제가 있었다.

    “온 벨담 국민이 듣는 앞에서 진실을 전달하려 하신 건 정말 용기 있는 행동이셨어요. 그래서 저희가 방문을 결심하게 된 거고요.”

    “제가 한 말이 진실이라는 건 어떻게 확신하시죠?”

    “예?”

    아니타는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기색이었다. 그녀가 한 손으로 안경을 고쳐 썼다.

    “자일스 헤센은 극악무도한 배신자이자 살인자예요. 그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가족의 죽음까지도 모욕하고, 제가 사랑해 마지않던 약혼자도 죽였어요. 그리고 제 몸을 노리고서 착한 남자를 연기하며 제게 접근했죠. 저는 긴 시간을 고통받다 그에게서 달아나기 위해 벨담 국경을 넘었어요. 벨담에서는 이게 진실이에요. 사람들이 믿는 건 바로 이 얘기라고요.”

    “그러니까, 저희가 어떻게 레이디의 말을 믿게 되었는지 궁금하시다는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한 적도 없지만 내 말을 믿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찍어 낸 종이 쪼가리에 실린 말들만 믿었다.

    정작 사건의 당사자는 나인데도 말이다. 모든 걸 눈앞에서 보고 겪은 건 나인데.

    아니타를 비롯한 이들은 아무도 믿지 않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고 했다.

    그럼 당신들만이 특별한 이유는 뭐지?

    이미 조사를 마쳤다지만, 나는 한 번 더 그들을 검증해야만 했다. 계획이 흐트러질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해야 했으므로.

    “그게 거짓말이라면, 왜 굳이 전국민이 듣는 앞에서까지 말하려고 하겠어요?”

    “제가 거짓말쟁이일 수도 있잖아요.”

    “누굴 위해서요? 자신에게 하나도 득 될 것 없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없어요.”

    “제가 아직 자일스에게서 심리적으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면요? 신문에서 말하는 대로, 제가 세뇌를 당한 거라면요?”

    “그래요. 자일스 헤센이 정말 레이디를 괴롭혔다고 치죠. 성적으로 유린당하고 세뇌당한 사람이 갑자기 정신이 돌아와서 벨담 국경을 넘어 도망치고, 자일스 헤센을 벨담에 체포당하게 만든 다음 뒤늦게 그를 구제해 달라고 사람들 앞에서 호소한다? 그건 너무 이상해요. 삼류 작가라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쓰지는 않아요.”

    “사람들은 그걸 믿잖아요.”

    “그들에게는 무엇이 진실이고 타당한지는 중요하지 않은 거죠. 듣고 싶은 이야기가 곧 진실이 되는 법이니까요.”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벨담은 나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원했다. 내가 울고 화내고 소리칠수록 그들은 더욱 좋아할 것이다.

    그만큼 이 사회가 괴로움에 몸서리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고통을 또 다른 고통으로 해소하려 하는 그 심리를 나는 잘 알고 있다.

    “저희도 알아요. 언론에 좋지 않은 일로 회자되면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봤거든요. 레이디께서 방송을 통해 하시는 말들을 듣고 바로 알았어요. 믿든 믿지 않든, 말하지 않으면 못 배길 것 같은 기분이죠. 그렇죠?”

    그렇다.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의자에 사지가 묶인 사람이 좀체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것처럼,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못 견딜 것 같아서였다.

    “……사람들이 믿어 줄 거란 기대는 안 했어요. 믿어 주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자일스가 듣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마음으로 방송을 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그것만으로 안 될 것 같아요.”

    나는 테이블 밑으로 두 주먹을 쥐었다. 아니타라면 내 이야기를 들어 줄 거란 확신이 생겼다. 그녀가 그래 주기만 한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을 얻을 수만 있다면 나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자일스를 살려야 해요. 그가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건 알지만 이런 식으론 아니잖아요. 벨담은 자일스를 희생양으로 쓰려 하고 있어요. 단순히 그가 지은 죄를 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요. 나는 그가 그런 꼴을 당하는 걸 가만히 볼 수 없어요. 왜냐면 나는 그를…….”

    그를 사랑하니까.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나는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자일스는 나를 구해 준 사람이에요.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벌써 죽었을지도 몰라요. 예전에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를 증오했어요. 그가 죽기를 바라기까지 했어요. 물론 내가 살아온 삶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지만 나는 그를 죽음 앞까지 몰아세우려 했던 기억을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 이번에도 모른 체할 수는 없어요. 이번에야말로 나는 잘못된 결정을 내리지 않을 거예요. 내 자신을 더 이상 부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자일스는 내가 그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내게 배신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묵묵히 받아들였다. 내가 그를 포용할 수 있을 만큼 스스로 괜찮아질 때까지, 그는 잠자코 기다렸다.

    그는 한 번도 나를 미워한 적이 없었다…….

    “레이디,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안나요. 내 이름은 엘로이즈가 아니에요. 나에게는 안나 키팅이라는 이름이 있어요.”

    “그래요. 안나 양. 이번에는 제가 질문 하나를 드릴게요.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어떤 마음으로 제 방문을 허락하신 건가요? 저희 잡지사는 인터뷰를 싣는 것밖엔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어요. 판결을 바꿀 수도 없을 테고, 심지어 독자들이 이 이야기를 받아들여 줄지도 미지수겠죠. 그럼에도 안나 양은 저의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이셨어요. 무엇을 바라시고 제게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시나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글뤼비흐네는 대중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잡지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오히려 글뤼비흐네는 마이너한 잡지사 쪽에 속했다. 애초에 다른 신문이나 잡지에 비하면 구독자 수도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잡지사의 유명세 같은 건 상관없었다. 그건 내가 해결할 수 있었다. 내 이야기를 왜곡하지 않고 진실을 전달하기만 한다면, 잡지사의 규모가 작든 크든 그런 건 내게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게는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게 만들 권력이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돈밖에 가진 게 없는 여자이기도 했다.

    “내 노력이 자일스를 구하게 될지는 나중에 가면 알게 되겠죠. 우선은 제가 할 수 있는 걸 다 해 볼 뿐이에요. 그러니 당신들은 내 이야기를 전해요. 잡지에 실어요.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발행하면 돼요. 단 한 치도 왜곡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요. 그럼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해 줄게요.”

    “나머지라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돈을 대 줄게요. 비록 기울어 가던 귀족가라 해도 잡지사 하나 못 밀어줄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아요. 내 이야기를 전해요. 벨담 안에서뿐만 아니라 바깥에까지. 나는 이 이야기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기를 원해요.”

    아니타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나는 사용인이 가져다 놓은 찻주전자를 들어 연한 붉은색이 감도는 차를 따랐다. 쪼르르르, 찻잔 채워지는 소리가 맑게 들려왔다.

    “그러니 당신은 하던 일을 하세요. 나는 내 몫을 다할 테니까.”

    나를 학대하고 천천히 말려 죽이던 자들에게서 빼앗은 재산은 제 몫을 톡톡히 할 것이다. 과거에 나는 내 생존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던 여자였다. 물론 그건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다만 이제 나의 목적은 내 구원이자 내가 구원한 이를 다시 한번 구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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