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11. 탈출로
“당신이 엘로이즈 양을 만나러 갔다던데요.”
루이제는 아렌트의 말을 듣자마자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대답 대신 담배를 한 차례 더 빨아들일 뿐이었다. 아렌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왜 그런 겁니까?”
“뭐가.”
“그녀에게 용무가 있었다면 저에게 말씀을 주셔도 충분했을 텐데 말입니다.”
“내가 직접 묻고 싶었을 뿐이야. 개인적인 궁금증 때문이었다고.”
루이제가 짜증을 내자 아렌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개인적인’ 호기심 하나를 해결하고자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찾아갔다는 겁니까?”
“별말 안 했어. 라디오 방송에서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물었을 뿐이야. 솔직히 말해 봐, 너도 안나 양이 당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 하나도 몰랐잖아. 그러니까 일을 칠 때까지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던 거겠지. 안 그래?”
“그 일은…….”
“됐어, 변명할 필요 없어. 나도 네게 해명 따위 할 생각 없고. 누군가는 알아야 할 것 아니겠어? 그녀가 정말로 무슨 꿍꿍이를 품은 건지 말이야. 나는 이 임무에 직접적인 책임을 맡은 사람이야. 알 건 알아야지.”
아렌트의 인상이 조금 누그러지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무언가 석연찮은 낯빛을 지우지 못했다. 그는 요새 루이제가 평소보다 담배를 더 많이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전쟁 이후 골초가 된 그녀였지만, 그나마도 요새는 더하다.
뭔가가 그녀를 신경 쓰이게 만들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무엇일까?
“혹시라도 자일스 헤센을 다루는 게 부담 되신다면…….”
“가당치도 않은 소리 하지 마.”
“저에게도 눈치란 게 있습니다.”
“홀츠만.”
루이제가 담배를 거두고 그를 쏘아보았다. 불면증과 묵은 스트레스 때문에 망가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위 장교로서 부하들을 지휘하던 권위는 조금도 퇴색되지 않았다.
“내가 자일스 헤센을 위해 딴생각을 품으리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지금 이런 질문을 하는 저의가 대체 뭐야? 똑바로 말해.”
“상부에서 의심할 만한 행동을 하실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내가 알아서 잘 하고 있다고 보고하든지 알아서 해. 난 벨담을 위해 대전쟁까지 치른 군인이야. 고작 배신자 하나 때문에 조국을 배반하기라도 할 것 같아? 네 눈에는 내가 그렇게 얄팍해 보이나?”
“……아닙니다.”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고 이만 가 봐. 문제가 있다면 내가 먼저 말할 테니 안심하고 있어. 그리고 혹시나 내가 딴생각을 품고 있다고 해도 말이야, 자일스 헤센이 사형당하리라는 사실은 아무도 바꿀 수 없어. 너도 그걸 잘 알고 있겠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아렌트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짧은 목례와 함께 그가 루이제에게서 멀어져 갔다. 루이제는 다시 정면을 바라보고는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담배가 맛이 없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기분이 나빴지만 이게 담배 때문인지 그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젠장.”
그녀가 짧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
돌연 군인들이 방 안으로 몰려들었다. 두 손이 결박된 채 침대맡에 앉아 있던 자일스는 예고도 없이 군인의 팔에 붙들렸다.
“가만히 있어.”
자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항할 생각일랑 그에겐 없었다. 군인은 그의 몸을 이곳저곳 수색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자일스를 노려보았다. 뭔가 숨기는 게 있으면 지금 말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자일스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는 대신 다른 군인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들은 필요한 최소한의 가구만이 있을 뿐, 텅 비어 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방 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성과를 올릴 리가 만무했다.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한 그들이 말했다.
“여긴 이상 없습니다.”
그제야 이름 모를 군인이 자일스를 놔주었다. 그는 여전히 자일스를 의심하는 눈초리였지만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쓸데없이 잔머리 굴릴 생각 마.”
군인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경고하는 것뿐이었다. 자일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윽고 들이닥쳤던 군인들이 하나둘씩 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잠깐이나마 소란스러웠던 장내는 다시 외로운 침묵에 휩싸였다.
자일스는 그들이 수색 작전을 펼친 이유를 알고 있었다. 분명 라이터 때문일 거다. 루이제는 라이터가 사라진 게 우연일 거라 생각할 만큼 속 편한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다시 침대맡에 앉았다. 아직도 문밖에서는 한 명의 군인이 그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일스는 재판 날짜를 기다리는 온순한 죄수처럼 굴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만은 그렇지 않았다.
자일스는 정전이 일어났던 그날에 대해 생각했다. 일반 가옥에 전기가 끊기는 일은 전쟁 이전에도 드물게 일어나곤 했다. 그러니 벨담이 대전쟁에서 패배한 이후에는 언제 정전이 일어나도 전혀 놀랍지 않게 되었다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그는 잠시 갈등했었다. 불이 나간 틈을 타 도망쳐야 할지, 혹은 눈앞에서 쓰러진 루이제를 구해야 할지……. 그러나 그는 결국 루이제를 구했다. 새파랗게 어린 사관생도 시절에 그랬듯이, 호흡 곤란이 찾아온 루이제를 붙들고 그녀가 숨을 쉴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자일스는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이런 기회가 다신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는 잊지 않았다. 안나가 라디오를 통해 건넨 말을 무시해서는 안 되었으니까.
사형 선고를 받을 때까지 순순히 기다릴 수는 없었다.
자일스는 루이제가 경황이 없는 사이 몰래 그녀의 품속에서 라이터를 훔쳤다. 더 쓸모 있는 물건을 훔칠 수도 있었겠지만 가판대에서 물건 고르듯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짧은 소동이 끝난 후 다시 방으로 돌아온 자일스는 어두운 밤을 기회 삼아 수갑의 툭 튀어나온 부분으로 침대 매트리스 밑을 찢었다. 물건을 숨길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찢기까지는 몇 시간 정도가 걸렸다. 군인은 밤에도 보초를 서고 있었으니까.
지금도 라이터는 매트리스 아래쪽에 숨겨져 있었다. 이것은 그의 유일한 기회였다. 자일스는 이곳에서 탈출해야만 했다. 안나에게 또 다른 절망을 안겨 줄 수는 없었다.
사는 동안 수많은 죄를 저지른 그였다. 죽는 순간까지도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안나가 그를 원한다면, 그는 살아갈 것이다. 죽음이라는 형벌은 그녀가 더 이상 그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 받아도 충분했다.
*
내가 방송을 망친 일을 빌미로 앙갚음이 되돌아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나는 멀쩡했다. 갑자기 나도 모르는 새에 모르는 곳으로 끌려가는 일 또한 일어나지 않았다.
정보국은 나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아마 나를 건드리지 않는 쪽이 그들에게 더 이로울 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처럼.
나는 신문 읽기를 멈췄다. 그런 일에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세상은 자일스와 나를 가지고 쇼를 벌이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항의하면 할수록 그들이 더욱 신나 어쩔 줄 몰라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나는 하녀에게 더 이상 신문을 가져다주지 않아도 된다고 통보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생겼다. 내가 여기 살고 있다는 사실은 또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는 방문객들이 나를 만나기를 종종 요청해 오곤 했다.
그들이 누구일지는 안 봐도 뻔했다. 아마 기자들이겠지. 그들에게 무서운 것이란 없고, 기삿거리를 얻기 위해서라면 맹수의 굴에도 들어갔다 오고도 남을 작자들이니까.
나는 방문객 요청이 올 때마다 거절했다. 내가 기자들을 만나서 좋을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들은 어떻게든 내 마지막 남은 살점까지 다 뜯어 가려고 기다리는 까마귀 떼와도 같았다.
신문이라는 매체에 신물이 났던 나는 기자들을 모조리 돌려보냈다. 모르는 이들이 내 저택으로 쳐들어오려 하는데 아렌트는 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던 그때였다.
그렇다면 나는 뭘 할 수 있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세상에 대고 하고 싶은 말을 외쳐 봤자 아무도 듣는 이가 없었다. 나는 권력을 가지지 못했다. 권력이란 백작가의 가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사소한 말에도 사람들이 귀 기울여 경청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말해야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에게나 내 이야기를 전달해 달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신문에 보도되던 이야기들이 전부 진실만은 아니라는 걸 알릴 수만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었다. 소용없는 짓이라고 해도 좋다.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주저앉아 울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아니겠나.
“아가씨,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요.”
하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주저하며 말했다.
“저, 그게…… 손님이 오셨습니다만 저번에 오셨던 분들과 다를 것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기자인가요?”
“예, 아무래도 그래 보입니다.”
어제 같았다면 더 듣지도 않고 당장 내쫓으라 했겠지만, 나는 몇 가지를 더 묻기로 했다.
“어느 신문사에서 나왔는지는 말하던가요?”
“신문사가 아니라 잡지사랍니다. ‘글뤼비흐네’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나는 그 잡지사에 대해 알았다. 최근에 사람들이 주로 찾는 신문과 잡지들을 모아 꼼꼼히 훑어본 적이 있었다. 내 이야기를 제멋대로 조각내어 왜곡하지 않을 곳을 고르기 위해서였다.
잠시 생각하던 내가 말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네?”
“대화를 해 봐야겠어요. 응접실로 모시세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하녀에게 당부했다.
“단, 한 명만 들어올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