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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76화 (76/93)
  • <76화>

    “꼭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나요?”

    “당신이 처음부터 그를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 아니에요? 그와 함께했던 날들을 삶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이라고 표현하셨죠.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지 알고 싶습니다.”

    나는 그녀의 질문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를 어째서 남에게 납득시켜야 한다는 것이지? 그건 자유로운 감정이었다. 논리적인 인과나 타당한 이유로써 성립하는 게 아니었다. 노을이 지는 어느 날, 홀로 바다 너머 지평선을 바라보다 문득 밀물처럼 스며드는 감정과도 같은 것이지.

    하지만 루이제는 나를 시험하거나 떠보려고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말 그대로 그녀는 내가 왜 자일스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벨담군 소령이 사사로운 감정에 대해 캐묻기 위해서 방문했다는 건 여전히 납득되지 않았지만, 나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우선 신문에서 읽은 이야기들은 전부 잊어야 해요. 대부분이 사실과는 다르거든요. 하지만 당신 말이 맞아요. 처음부터 자일스를 사랑한 건 아니었어요. 오히려 처음에는 그를 증오했었죠. 동시에 두려워했었고요. 하지만 누구나 나 같은 삶을 살아왔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타인의 이유 모를 호의를 전혀 믿을 수 없었던 때니까.”

    루이제는 내 이야기를 방해하지 않고 잠자코 들었다. 나는 진중한 분위기 속에서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귀족의 딸이었고…… 그는 혁명군 장교였어요. 당연히 그가 나를 해치려 할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니라면, 다른 남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내 몸을 함부로 대할 줄 알았고요. 하지만 자일스는 그러지 않았어요. 그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품은 적이 없었어요. 내가 만났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어요. 그가 내게 음식을 가져다주러 온 건, 내게 코트를 건네주었던 건 그냥 조금이라도 나를 편하게 만들어 주고 싶어서였던 거예요. 그럼으로써 그 또한 위안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나는 이야기를 건네면서 점점 내 감정 속에 빠져들었다. 자일스가 곧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를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현실을 앞에 두고 처음 보는 장교에게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말하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감정이 실렸다.

    “물론 그가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는 건 알아요. 그래서 미움을 받는다는 사실도 알고요. 하지만 적어도 그는 내가 만나 본 사람들 중 가장 다정한 사람이었어요. 내 몸을 탐하지도 않았고, 나를 때린 적도 없어요. 자일스는 내게 순수한 호의라는 걸 처음 보여 줬어요. 그러니까 나는 그를 사랑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든, 그가 내 안위를 그의 것만큼 아꼈고 우리가 서로에게 목숨을 빚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그가 자신의 누이를 직접 죽였다는 건 알고 있나요?”

    나 또한 그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자일스가 셀레스트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던 탓에 무엇이 진실인지 분간할 수 없었던 나는 그 기사를 곧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었다.

    “그건…… 사실인가요? 자일스가 정말 셀레스트를 죽였나요?”

    루이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황상 사실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는 혁명군에 자신의 충성심을 입증해야 했고, 그 증거로 자신의 누이를 내놓아야 했습니다. 물론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겠죠. 자신의 가장 끔찍한 치부였을 테니까요. 이 사실을 알고도 당신은 그를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을까요?”

    “나는…….”

    무어라 반박하려던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마음을 추슬렀다. 자일스가 셀레스트를 죽였다는 게 사실이라면. 하지만 그런 사실은 내가 알던 자일스와는 너무나도 괴리감이 컸다. 개연성이 뒤죽박죽인 이야기처럼.

    “믿어지지가 않아요. 그가 많은 이야기를 해 주지는 않았지만 나는 자일스가 누이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아요.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요. 분명해요.”

    “그걸 안나 양이 어떻게 확신하죠? 그는 이미 친구들과 지인들을 죽인 전적이 있는데.”

    “자일스는 가족을 사랑했어요. 그 사실만큼은 확신할 수 있어요. 그가 내게 어릴 적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어요. 물론 셀레스트가 등장하는 이야기였어요. 만약 그가 정말 셀레스트를 죽였다면 그런 얼굴을 하고서 내게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을까요? 난 아니라고 봐요. 한 가지만은 확실해요. 자일스는 혁명의 불꽃이 되어 주변을 다 태워 버렸지만, 그럼에도 미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과거의 기억들을 끝까지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자일스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거예요.”

    내 말을 들은 루이제는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놀란 것도 같았고, 무언가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안나 양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는 거죠?”

    “자일스가 내게 직접 말해 줬어요. 처음에, 그는 과거의 일들을 머릿속에서 다 내버렸다고 했죠. 품고 있다간 미쳐 버리고 말 것 같다고. 하지만 나중에 그건 다 거짓말이었다고 내게 고백했어요. 내게 벨담에서의 추억을 이야기해 주면서, 그것들이 없으면 정말 괴물이 되어 버릴까 봐 무서웠다고 말했어요.”

    “…….”

    처음과는 달리 이제 루이제의 안색은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에게선 더 이상 나를 도발하거나 의심하려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생각해 냈다.

    “소령님, 저와 처음 대면하실 때부터 저를 안나라고 부르셨죠.”

    “네. 그게 당신 이름 아닌가요?”

    “벨담에서 만난 사람들은 전부 저를 엘로이즈라고 불렀어요. 내가 대외적으로 사용한 이름이 뻔히 있는데도, 저를 안나라고 불러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왜 저를 엘로이즈라고 부르지 않은 거죠?”

    “글쎄요.”

    상념에서 잠시 빠져나온 루이제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졌다.

    “아마 엘로이즈보다는 안나 쪽이 제게 익숙해진 모양입니다. 자일스는 매번 당신을 안나라고 부르니까요. 하루도 그 이름을 듣지 않은 적이 없었죠.”

    “……자일스는 내가 이름을 바꾸고 나서,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내 새 이름을 그대로 받아들여 줬어요.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죠. 아직도 내 이름을 부르던 그의 목소리가 귀에 선해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안나 키팅이라는 이름은 대충 떠오르는 대로 지은 것이었다. 자일스의 추적을 피하고 싶었고, 릴리나 엘로이즈라는 낡은 이름들을 계속 쓸 수는 없었으니까.

    나도 내가 새로운 이름에 이토록 애정을 가지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직접 지은 내 이름은 곧 내 정체성이자 자유 의지와도 같았다. 어린 시절에 이용당하며 살기만 했던 나는 나 자신을 다시 정의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남자의 목소리로 내 진짜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이 이름을 평생 내버리지 못하리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자일스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내 물음에 루이제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의 운명은 정해졌고, 아무도 바꿀 수 없어요.”

    “난 그가 죽기를 원하지 않아요. 그를 살릴 수 있다면 뭐든 할 거예요. 자일스는 나 때문에 삶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고 말했어요. 그 순간 나는 알았어요. 내가 살아남는 것 또한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을 구해 내는 건 다른 의미로 가치 있다는 사실을요. 내가 이 짧은 생을 살면서 이룰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좋은 일을 망쳐 버리고 싶지 않아요.”

    나는 그만 나 스스로의 감정에 필요 이상으로 몰입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루이제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나를 바라보다 물었다.

    “말해 봐요, 안나. 자일스는 어떤 사람이죠?”

    “……무슨 뜻이에요?”

    “내가 진정으로 묻고 싶었던 건 당신이 자일스에게 가진 감정에 대한 것이 아니었어요. 당신도, 나도 그에 대한 대답을 이미 알고 있을 터이니까.”

    얼굴 위에서 눈물의 흔적을 지워 낸 나는 루이제를 물끄러미 보았다. 어쩐지 그녀가 나만큼이나 슬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착각이겠지. 벨담군 소령이 자일스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낄 리가 만무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루이제는 내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자일스 헤센에 대한 당신의 견해입니다. 그는 어떻죠? 당신에게 다정했나요? 혹은 때때로 선을 그을 줄 알았나요? 자일스는 제 앞에서 다양한 면모를 보여 주지는 않습니다. 참 낭패인 일이죠. 당최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도, 심지어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제대로 모르고서 그를 관리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당신이라면 대답해 줄 수 있겠죠. 자일스 헤센을 곁에서 보았던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그 순간 나는 루이제가 자일스와 일면식 한 번 없던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자일스가 좋은 사람이라고는 확언할 수 없어요. 사람마다 기준을 다르게 둘 테고, 그 또한 저지른 죄가 많으니까요. 하지만 자일스는 내가 만나 본 이들 중 가장 다정한 사람이었어요. 그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내 목숨을 구하고, 내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았어요.”

    루이제는 대답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러곤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알베르트가 당신을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이유를 알겠군요.”

    “네?”

    “그는 종종 난폭해진다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사람 하나는 제대로 파악할 줄 알았거든요.”

    그녀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슬슬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대화 즐거웠어요, 안나 양. 아, 사용인을 통해 내어 주신 이 다과도요.”

    나는 루이제와 악수를 나누었다. 그녀는 군모를 옆구리에 끼운 채로 내게서 멀어져 갔다. 나는 루이제의 등 뒤에 대고 물었다.

    “나를 도와주실 수 있나요?”

    그러자 루이제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녀의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대답을 들려주는 대신, 루이제는 그대로 문 너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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