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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75화 (75/93)
  • <75화>

    루이제는 안전 가옥을 나서면서 입 속으로 욕지거리를 했다. 그녀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 했으나 품을 뒤져도 라이터를 찾을 수 없었다. 안 가져왔나?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러나 그녀에겐 라이터의 행방에 대해 생각할 만한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첫 번째는 그놈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는 점이었다. 그 사실이 자존심을 긁어 댔고, 두 번째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인 것으로도 모자라 이성을 잃고 흥분했다는 것이었다.

    루이제는 심지어 자일스의 몸에 상처를 입히기까지 했다. 아마 윗선에서 이 사실을 알면 경을 칠지도 모르는 일일 테다. 자일스는 국가의 철저한 계산 아래에 진행될 재판이 있기 전까지는 안전하게 머물러야 했고, 그래서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안전 가옥까지 마련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쓴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는 것보다는 스스로 감정 조절에 실패했다는 사실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격한 감정을 표현한다는 건 곧 마음속에 감춰진 속내를 드러낸다는 것과도 같았다. 자일스 헤센에 대한 복잡한 심정을 들키고 말았다는 게 그녀로 하여금 담배에 대한 미련을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자일스만이 알아챘다고 볼 수도 없었다.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루이제는 자일스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를 폭행했고, 그건 자일스를 평범한 죄수로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증명한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일스 헤센은 그녀가 맡은 죄수였다. 동시에 친하게 지냈던 사관 학교 동기이자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던 과거 잔상의 파편 중 일부이기도 했다. 그 점이 루이제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더욱 혼란스러운 건…… 그녀가 알던 과거의 자일스와 다를 게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자일스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적어도 그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검은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댔던 어린아이처럼, 생존하려는 본능에 목매달았던 인간. 물론 선전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건 아니었지만, 결국 악마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존재였다.

    물론 그는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렇다면 루이제는? 그녀는 어땠는가? 그녀야말로 전쟁터에서 많은 사람들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고, 수류탄으로 그들을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먼저 죽이지 않으면 죽게 되니까.

    그렇다면 루이제와 자일스를 구별 짓는 건 뭐란 말인가? 군인과 민간인의 차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생각들은 전부 의미 없었다. 어차피 자일스의 운명은 정해졌다. 그는 죽을 것이다. 모두를 위해 처형당함으로써 죄를 갚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마지막으로 남는 의문점이 하나 있었다.

    루이제 또한 라디오 방송에서 외치던 안나의 목소리를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안나는 자일스를 공개적으로 비난해야 했다. 하지만 안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끝까지 자일스의 곁에 서는 쪽을 택했다. 그것도 벨담의 전국민이 듣는 앞에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지? 만일 자일스가 정말 교활하고 악한 인간이었다면, 어떻게 다른 이에게서 이토록 확고한 지지와 사랑을 얻어 낼 수 있단 말인가?

    루이제는 문득 안나를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심리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어쩐지 그녀와 대화를 하고 나면 마음을 정리하기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한 인간으로서의 자일스에 대해 알려 줄 수 있는 건 안나 키팅뿐이었다.

    *

    나는 창문 너머로 검은 승용차가 대문 앞에 서는 걸 보았다. 차를 보자마자 머리가 아파 왔다. 보나마나 아렌트가 찾아온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아니면 날 방문할 사람이 누구겠는가? 게다가 저런 번듯한 승용차를 타고 올 사람은 오직 그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아렌트를 돌려보낼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었던 탓에 나는 한숨만 푹푹 쉬어 댔다. 이번엔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온 거지? 아니면 저번에 내가 라디오 방송을 망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고 쫓아온 것일 수도 있겠다.

    방송이 나가고 난 다음 날, 나 또한 저택으로 배달된 신문을 확인했었다. 굳이 한 장 한 장 넘길 필요도 없었다. 1면에 떡하니 나에 대한 헤드라인이 적혀 있었으니까.

    뭐라고 쓰여 있었더라. ‘살인마에게 세뇌당한 여인의 고백’이었던가? 제일 점잖은 신문에 실린 기사마저도 직설적인 화법을 가차 없이 사용했다. 나는 기사를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았다. 헤드라인 한 줄만으로도 내용이 머릿속에 훤히 들어오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상관없었다. 내가 방송에 참여하겠다고 한 건 오직 하나의 목적 때문이었다. 어딘가에 갇혀 있을 자일스에게 내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 말이다.

    그가 들었을까? 들었다면 좋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사용인이 문을 두드리며 말을 건네왔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지금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았어요.”

    나는 하는 수없이 대답하며 문을 열고 나갔다.

    사용인을 따라서 응접실로 향하는 내내 내 기분은 곤두박질쳤다. 그를 만나면 대체 뭐라고 응수해야 하지?

    하지만 응접실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던 인물은 아렌트가 아니었다. 그는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처음 보는 군인이 테이블 앞에 앉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안녕하세요, 안나 양.”

    “네…… 안녕하세요.”

    군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악수를 청했다.

    “루이제 고틀리프 소령입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라셨을 텐데, 먼저 사과드리겠습니다. 우리 둘 다 직접 대면하는 건 처음이죠?”

    “아, 반가워요. 소령님. 자리에 앉으세요.”

    그녀의 말대로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방문이었다. 게다가 소령씩이나 되는 거물이 나를 찾아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탓에 얼떨떨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벨담 군인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던 내가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 루이제가 먼저 운을 떼었다.

    “벨담에서의 삶에는 익숙해지셨습니까?”

    “사실, 입스윈에서와 그리 다르지 않아요.”

    “하긴 그렇겠지요. 이웃 나라인 만큼 생활 양식이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저…….”

    나는 루이제가 입은 군복에 눈길을 주었다. 그가 군인이라면, 혹시 자일스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까?

    “혹시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말씀하세요.”

    “자일스는 무사한가요? 많은 건 바라지 않을 테니 그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만 알려 주세요.”

    “자일스 헤센 말이죠.”

    루이제는 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공백을 둔 후 대답했다.

    “그는 감옥에 수감되어있습니다. 사지 멀쩡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혹시 고문 같은 걸 받지는 않았나요?”

    “왜 당연한 걸 물으시죠?”

    의미심장한 대답에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 표정을 살피던 루이제가 어느 순간 쾌활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조롱을 당한 기분이 들어서 내 표정이 일순 구겨졌다.

    “왜 웃으세요?”

    “아니, 그러니까, 정말 사실이었구나 싶어서요.”

    “뭐가요?”

    그녀는 한 번 터진 웃음을 좀체 가라앉히질 못했다. 나는 이게 웃을 만한 일인지 혼란스러워하다가 결국 화를 냈다.

    “그만해요! 당신에겐 장난일지 모르겠지만 나한텐 아니라고요. 자일스는 내 소중한 사람이에요. 물론 당신은 비웃겠죠. 저 바깥의 다른 사람들처럼 신문만 읽고 그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하는 부류일 테니까요. 나는 자일스를 사랑해요. 당신도 그걸 다 알고 왔으면서 이런 장난을 치는 이유가 대체 뭐예요?”

    “알았어요. 미안해요, 안나 양.”

    루이제는 겨우 웃음을 그쳤다. 나는 왠지 몰라도 그녀가 정상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이제는 커다란 사건 때문에 정신적인 충격을 겪었고, 그 때문에 어딘가가 살짝 엇나가고 만 사람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전쟁 때문이겠지. 그녀 또한 세계 대전에 참전했을 테니까. 그래도 난 이런 처우는 용서할 수 없었다.

    루이제가 말을 이었다.

    “사실 당신의 반응을 보려고 일부러 그런 거예요. 다시 한번 사과할게요. 당신이 자일스에 대해 진실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야 했거든요.”

    “그걸 당신이 왜 알려고 하는데요?”

    “안나 양, 이제부턴 사실만을 말씀드리죠. 자일스는 잘 있어요. 그는 감옥이 아닌 다른 장소에 홀로 격리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특별히 취급해야 할 죄수이니까요. 물론, 고문도 없었어요.”

    “……날 왜 찾아온 건지 말해요.”

    “당신이 라디오 방송에서 했던 말들을 들었어요.”

    결국 그 이야기인가? 그러나 피로감이 채 몰려오기도 전에 루이제의 다음 말이 내 주의를 사로잡았다.

    “저 혼자만이 아니라, 자일스와 함께 들었죠.”

    “자일스와 함께 있었나요?”

    “저는 매일 자일스를 면회합니다. 제가 자일스를 관리하고 있거든요. 그런 만큼 많은 건 알려 드릴 수 없는 점 이해하십시오.”

    “어쨌든 자일스는 무사하다는 거죠?”

    “네. 재판을 받을 때까지 그를 안전하게 구금하는 게 제 임무입니다. 그러니 그의 신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세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자일스는 곧 사형 선고를 받을 텐데 신변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니.

    그래도 자일스가 내 말들을 들었다는 사실 하나만은 조금이나마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방송을 듣고 저는 정말 궁금해졌습니다. 안나 양, 당신은 자일스 헤센을 변호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듣는 앞에서 멋대로 행동했어요. 그건 아주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겠지요.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던 건지, 자일스 헤센을 위해 누군가가 위험 부담을 감수했다는 게 가당키나 한 건지 알고 싶었어요. 평범한 사람도 아닌 모두의 미움을 받는 희대의 살인자를 변호하다니 말입니다.”

    루이제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안나 키팅, 당신이 자일스를 사랑하는 이유가 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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