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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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제 고틀리프는 쾌활하고 두려울 것 하나 없는 소녀였다. 특유의 낙천적이고 저돌적인 성격을 타고난 그녀는 한번 마음먹은 일이 생기면 가차 없이 저질러 버리곤 했다.
그런 성격 때문에 생도 시절에는 가벼운 징계도 많이 받았다. 어쨌든 루이제는 그런 소녀였고, 모두가 그녀를 작은 골칫덩어리라고 부르면서도 호감을 가졌다.
그런 루이제에게도 한 가지 약점은 있었다.
루이제는 어릴 적, 달빛조차 희미한 야밤에 바닷가에서 놀다가 그만 파도에 휩쓸린 적이 있었다. 그녀의 말로는 죽다 살아났다고 한다. 친오빠가 겨우 구해다 던져 준 선박용 튜브 쓰레기가 아니었더라면 정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 말이다.
그날 이후 루이제는 암흑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한 줌의 빛조차 보이지 않는 새카만 어둠 속에 갇히면, 그녀는 어린 시절 바닷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숨 한 번 쉬지 못해 죽을 위기를 겪던 때를 떠올리곤 했다.
머릿속 아주 깊은 곳에 아물지 않는 흉터를 남긴 트라우마는 루이제가 다 자랄 때까지도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 밤늦게까지 도서관에 남아 공부를 하던 날이었다. 소등 시간이 다 되면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겠지만, 그 때까지는 꿋꿋이 버틸 요량으로 책을 붙들고 있었다.
루이제의 곁에는 자일스도 있었다. 자일스 헤센. 부잣집 도련님 주제에 사관 학교에 들어와서 군인이 되기를 자처한 괴상한 놈. 모두가 그에게 대체 이런 곳엔 왜 기어들어 왔냐고 물었지만 제대로 대답을 들은 이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자일스는 오히려 루이제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서로만의 별종 같은 면모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밤늦게까지 함께 공부를 하던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무엇을 하든 함께 몰려다니는 무리 중 일부였고, 그 무리 중에서도 특히나 가까운 사이였다.
물론, 친구로서 그랬다는 거다.
“언제 들어갈 거야?”
책을 보던 자일스가 물어 왔다. 루이제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20분 뒤에는 가야겠지.”
“이번에는 좀 서두르자. 저번에 소등 시간에 겨우 맞춰서 들어갔잖아. 또 걸리면 이번엔 훈계만으로 안 끝날걸.”
“알았어, 알았어. 거의 다 봤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15분 뒤에 가는 거다.”
“……그래.”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침묵 속에 빠졌다. 도서관에 남은 사람도 그들 외에는 거의 없던 까닭에 책장 넘어가는 소리마저도 크게 들릴 지경이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이제 됐다 싶었던 루이제가 책을 덮으려던 순간, 갑자기 불이 나갔다. 정전이 된 것이었다. 자일스는 갑작스레 그들을 덮친 어둠에 당황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 주위에는 비상등으로 사용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뭐지? 소등 시간은 아직인데. 루이제, 아무래도 정전인가 봐. 그냥 지금 빨리 돌아가는 게 낫겠어.”
그러나 루이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답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었다.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자일스가 상황 판단을 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가 위험을 감지한 건 루이제가 내는 소리 때문이었다. 그녀는 기도가 막힌 사람처럼 켁켁거리며 밭은기침을 해 대고 있었다. 얼마 안 가 의자 쓰러지는 소리가 도서관 안을 요란하게 울렸다.
“루이제!”
자일스는 소리가 난 쪽을 더듬어 쓰러진 루이제를 찾아냈다. 하지만 루이제가 정말로 쓰러진 건 이번이 처음 일어난 일이라 그조차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그녀는 호흡 곤란으로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다. 뭐라도 해야 했던 자일스는 루이제를 품에 끌어안고 다급히 속삭였다.
“괜찮아, 그냥 정전이 된 거야. 그게 다야. 루이제, 나 여기 있어. 정신 차리고 따라 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다시 내뱉어 봐. 다시, 들이마시고. 옳지. 그렇게. 잘 하고 있어. 넌 괜찮아. 괜찮을 거야. 우린 바닷속이 아니라 도서관에 있잖아.”
1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지던 때였다. 정전 상태가 정확히 몇 분이나 지속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자일스가 루이제를 붙들고 고군분투하던 끝에, 다시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그때 자일스는 눈물로 엉망이 된 루이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불이 들어오자마자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나, 난 못 해…… 난 못 하겠어. 난 군인이 아니야……. 고작 어두워졌다고 병신 새끼처럼 구는 게 무, 무슨 군인을 할 수 있어? 난 포기할래. 난 안 될 것 같아.”
“루이제 고틀리프.”
루이제와 자일스의 눈이 마주쳤다. 나무라듯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자일스가 어깨를 두드렸다.
“일어나. 이만 자러 가야지.”
그는 루이제를 일으켜 세우고는 그녀의 짐을 대신 챙겨 주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이제는 아직도 울음기가 채 가시지 못한 목소리로 외쳤다.
“넌 내가 가망이 있다고 생각해?”
“루이제.”
“임관하면, 내가 임관하고 나서 전쟁이라도 터지면 그땐 내가 제일 먼저 죽을 게 뻔해. 못 봤어? 내가 고작 어두워졌다고 주저앉아 버린 거 못 봤냐고.”
“넌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어. 군인은 혼자 싸우지 않아. 그 사실을 잊지 마. 누구나 약점 하나쯤은 갖고 있지. 그래서 동료를 두는 거고.”
할 말을 잊은 루이제의 품에 가방을 들려 주며 그가 씩 웃었다.
“이제 정말 가자. 늦었다고 혼나겠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루이제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그랬던 날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는.
“루이제. 루이제 고틀리프!”
자일스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 채 잠시 갈등했다. 루이제를 버리고 도주를 시도할 수도 있었다. 오래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언제 다시 불이 들어올지 몰랐고, 루이제 또한 지금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기회가 있다면 아마 지금뿐이 아닐까.
끝내 자일스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출구가 아니라 루이제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감각에 의존하며 식탁을 빙 돌아 반대편으로 옮겨 간 자일스가 루이제의 상태를 살폈다. 그녀의 손이 차가웠다.
그는 루이제가 그에게 기대게 한 후 차분하게 지시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숨 쉬어. 정신 차리고. 들이마셔. 들이마시라고. 이제 다시 내쉬어. 다시. 정신 차려, 고틀리프. 불이 곧 들어올 거다. 그때까지 정신 놓지 말고 숨 쉬어.”
갖은 노력 끝에 그녀의 호흡이 안정을 되찾아 갔다. 루이제는 이제 스스로 자일스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증상이 도질 때 루이제에게 가장 필요한 건 뭔가 붙잡을 만한 것이었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무엇이라도 붙들고 있다 보면 그나마 견딜 만해졌다. 이상하게도 그걸 제일 먼저 알아차려 준 건 자일스였다.
얼마 안 가 장내가 다시 환해졌다. 자일스는 루이제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상태를 제대로 살피기도 전에, 그는 강한 힘에 의해 떠밀려 바닥으로 쓰러졌다.
“씨발, 나한테서 떨어져!”
루이제는 얼굴이 벌겋게 물든 채로 일어나 자일스를 총으로 겨누고 있었다. 아직 호흡을 갈무리하지 못해 총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일스는 반항하지 않고 그 자세 그대로 루이제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총을 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살인자 죄수 따위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이 자존심을 건드렸겠지.
그는 루이제가 스스로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넌, 넌 네가 충분히 똑똑하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니까 이딴 짓거리를 하면서 날 속이려 드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네게 속아 넘어갈 정도로 덜떨어진 머저리인 줄 아는 건가? 허튼짓하지 마! 나는 네가 변했다는 걸 알아! 너는, 너는 배신자고 또…….”
“그래. 나는 사람을 죽였지. 친구들도, 내 하나뿐인 누이마저도 죽도록 내버려 뒀어. 예전 같았다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겠지.”
“잘 아네. 그럼 연기 따위 집어치우고 진짜 네 모습을 드러내. 이건 네 진짜 모습일 리가 없어. 내가 알던 자일스 헤센은 사라졌어.”
“난 연기 같은 건 하고 있지 않아.”
“개소리 집어치워!”
“루이제, 진정해. 넌 지금 많이 흥분했어.”
그 순간 루이제는 생도 시절의 자일스가 그의 모습에 겹쳐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예전과는 같지 않았지만, 반대로 루이제가 예전에 알았던 자일스 헤센 그대로이기도 했다. 그는 변한 게 없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루이제는 권총 머리로 자일스의 얼굴을 후려쳤다. 참고 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알던 자일스가 여기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사회가 선전하려 그리 애를 쓰는 희대의 악마가 아니라 ‘그’ 자일스 헤센이 그토록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니. 제정신으론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 눈앞에 있었다. 지금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 배신감? 절망?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루이제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과거의 친구는 완전무결하지 않았다.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고, 자일스 또한 마찬가지였을 뿐이다.
“널 이런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는 눈가를 붉게 물들인 채 이마가 찢어져 피를 흘리는 자일스를 노려보다 권총을 집어넣고 홱 몸을 돌렸다. 그 사이 돌아온 부하가 뭔가를 묻는 듯했으나 루이제는 그를 그대로 지나쳐 갔다.
자일스는 두 손이 결박된 채로 균형을 잡고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이제 훔친 휴대용 라이터가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