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73화 (73/93)

<73화>

나는 녹음실에서 거의 끌려 나오다시피 했다. 관계자들이 이 사태를 어떻게 무마해야 할지 긴급회의를 여는 동안 들이닥친 아렌트가 내 팔을 잡고 한산한 복도로 나를 끌어냈다.

나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벌인 짓이 그를 화나게 하기에는 충분하리라는 사실을 나도 모르진 않았으니까.

이건 전국에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생방송이었다. 아마 라디오를 듣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내 말들을 들었을 거다.

아렌트는 내게 다짜고짜 화를 내는 대신 안경을 벗고서 곤란하다는 듯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정보국 사람이라도 그가 앨버트 같은 부류는 아니라는 사실만은 알겠다. 앨버트였다면 자신을 거스른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을 테니까.

그는 내 머리채를 휘어잡는 대신에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엘로이즈 양, 방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인지하고 계십니까?”

“내가 쇼를 망쳐서 미안하네요.”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습니까?”

“그럼 내가 있지도 않은 일을 마이크에 대고 나불거릴 거라 생각했어요?”

“저와 약속을 했잖습니까. 당신에게도 그에 걸맞은 대가를 제시했고요.”

“그래요. 당신을 속인 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난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예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할 거라고요. 아까 내가 한 말 들었다면 당신도 이해해야만 해요. 난 내 삶 속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들을 내 손으로 먹칠하지는 않을 거예요. 절대로.”

물론 아렌트는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는 평소에도 냉랭해 보이는 남자였지만 나를 마주하고 있는 지금은 또 다른 의미로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엘로이즈 양……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는 알겠습니다만, 이런 행각을 벌이셔 봐야 당신에게 절대 좋은 영향이 되돌아오지는 않을 겁니다.”

“상관없어요.”

“이런 식으로 헤센의 편을 드시면 언론과 대중의 관심만 한 몸에 받게 될 뿐입니다. 자일스 헤센이 져야 할 몫을 함께 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거 괜찮네요. 애초에 나한텐 편하게 발 뻗고 살 생각 따위 없었거든요. 내가 당신들이 시키는 대로 자일스를 비난해도 말이죠, 온 나라가 나에 대해 쑥덕거리는 건 마찬가지예요. 어차피 모두의 관심을 받을 거라면, 난 차라리 자일스의 곁에 서는 쪽을 택하겠어요. 그는 내 목숨을 몇 번이나 살렸어요. 그런데 이깟 돌 따위 같이 못 맞아 주겠어요?”

“그는 어차피 죽을 사람입니다. 왜 미련을 버리지 못하시는 겁니까?”

“누가 자일스가 죽게 놔둔대요?”

아렌트는 나를 설득할 의지를 잃은 것 같았다. 그는 손목시계와 주변을 번갈아 보더니 중얼거렸다.

“……사저로 모셔다드리죠.”

인터뷰 방송은 이렇게 끝을 고했다. 아렌트와 나는 내가 보기 좋게 망쳐 놓은 프로그램을 뒷수습하기 위해 애를 쓰는 방송국 관계자들을 내버려 두고 건물을 나섰다.

나는 그가 몰고 온 승용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그가 손을 써 놓은 건지는 몰라도 이번에는 기자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운전하는 내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속이 뒤집어졌겠지. 그러고도 남을 거다. 하지만 이럴 거라 생각하지 못한 것 또한 아니기 때문에 나는 굳이 사과하지 않았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오로지 자일스뿐이었다.

아렌트가 말한 대로 나는 대중의 귀에 대고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도발을 했다. 사회는 그들만의 방식대로 내게 앙갚음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고분고분하게 군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단 말인가?

자일스와 나는 운명 공동체였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일스라는 존재에 묶여서 똑같이 손가락질 받을 거라면 나는 대중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굽신거리기보다는 차라리 끝까지 자일스를 놓지 않는 쪽을 택하고 싶었다.

“한 가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렌트가 말을 꺼냈다.

“헤센의 편을 드신다 한들 그를 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죽음은 예정된 일입니다. 그 결정을 무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만일 있다고 해도 그게 엘로이즈 양은 아닐 겁니다.”

“…….”

“헛수고로 돌아갈 일을 위해 사태를 더 악화시키는 게 과연 현명한 일일지, 잘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엘로이즈 양을 위해 말씀드리는 겁니다.”

“헛수고일지 아닐지는 나중에 밝혀지겠죠.”

“엘로이즈 양.”

“제발 그 이름 좀 그만 불러요! 그건 내 진짜 이름이 아니라고요. 내 이름은 안나 키팅이에요. 엘로이즈는 아주 오래전에 죽었어요. 내가 내 손으로 그 애를 죽였어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내가 화를 냈다.

“그리고 어쭙잖게 내 편인 척할 생각 마세요. 처음부터 당신은 내 편이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잖아요. 만약 정말 나를 생각했더라면, 당신은 이런 거지 같은 인터뷰 제안을 들이밀지도 않았겠죠. 당신이 정말로 내 편이 되고 싶었다면 내가 아니라 언론사 입을 막았어야죠. 나는 멍청이가 아니에요. 누가 진짜 내 편인지 아닌지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아요.”

승용차가 저택 앞에 서자마자 나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택 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가장 먼저 맞이한 건 아델레였다.

“안나! 괜찮아요?”

“물론이죠. 방송 들었어요?”

아델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본이랑은 조금 달랐죠, 안 그래요?”

“그건…… 어떻게 된 거예요?”

“내가 자일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한 것뿐이에요. 부디 그도 듣고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는 그녀가 뭔가를 더 묻기 전에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만이라도 좋으니 혼자 있고 싶었다.

*

너는 내가 살린 사람이야.

그러니까 네 삶을 포기하지 마.

안나가 했던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정말 당연한 말이었는데도, 그는 안나의 말을 듣는 순간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랬다. 그의 목숨은 온전히 그의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자일스는 안나에게 목숨을 빚졌다.

그러니 절대 마음대로 내버릴 수는 없으리라.

지금까지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오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그의 정신은 다시금 선명해졌다. 스스로 자책하면서 운명에 순응할 것이 아니라 그는 오히려 계속해서 맞서 싸워야만 했다. 잠시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안나가 그의 죽음을 바라지 않으며, 그 또한 안나를 위해 살아남아야 할 의무가 있음을.

자기 연민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안나를 지킬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오만이라 해도 좋았다. 적어도 그에게는 스스로가 만든 진창에서 안나를 빼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 전까지는 절대로 죽을 수 없었다.

안나는 그의 사랑이자 사명이었으며 먼 길을 돌고 돌아 끝내 마주하게 될 종착지, 세상의 끝이었다.

아직 끝에 서려면 한참 남지 않았는가.

그녀는 자일스의 엔진에 끝없이 연료를 던져 넣는 존재였다. 안나의 곁에 있는 한 자일스는 멈춰 설 수 없었다. 그녀가 그를 움직이게 하니까. 이번에도 그랬다. 안나는 불타오르던 엔진이 점점 식어 가고 있음을 알아차렸고, 다시금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래서 자일스는 안나를 놓을 수가 없었다. 그를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존재는 안나뿐이었다.

그러니 자일스는 그녀를 위해서라도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해야만 한다. 그녀의 노력이 헛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한편 루이제는 라디오의 전원을 껐다. 이제 실내는 다시 적막으로 가득 찼다. 잠시간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침묵을 먼저 깬 건 루이제였다.

“이런, 보란 듯이 망쳐 버렸네.”

“안나가 괜찮을까?”

“집으로 잘 돌아갔을 테니 걱정하지 마. 물론 그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나도 모르지. 아직은 말이야. 그나저나 너, 안나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뜻이지?”

“뭔 짓을 했기에 한 여자가 네게 그리도 맹목적으로 굴게 된 거냔 소리야. 네 행적을 살펴보자면 사랑을 한 몸에 받을 만한 사람은 절대 못 될 텐데.”

자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명백한 해답을 알고 있지는 못했던 까닭이었다.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자일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사랑은 분에 넘칠 정도였다.

“넌 살인자야, 자일스 헤센.”

“나도 알아.”

“살인자를 사랑할 여자는 이 세상에 없어. 미치지 않은 한 말이야.”

“…….”

“그래서 말인데, 안나의 인생을 생각해서라도 네 본모습을 이만 드러내는 게 어때? 네가 맨정신으로 그 많은 동향 사람들을 죽였을 리가 없어. 내가 아는 자일스 헤센이라면, 사관생도 시절의 그 자일스라면 친구들을 죽이느니 차라리 총으로 자살했을 거야. 하지만 넌 변했어. 네 과거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속일 수 있겠지만 나까지 속일 수는 없어. 난 네가 무결했던 시절을 아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점잖은 척은 그만하고 편하게 있으란 말이야. 응?”

루이제는 그가 연기를 하고 있다고 믿었다. 자일스는 그녀가 대놓고 의심을 드러낼 때마다 어떤 반응을 보여 줘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살인자의 얼굴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나?”

루이제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이만 솔직해져, 자일스.”

“네가 뭘 원하는 건지 모르겠어.”

“너, 지금 내 앞에서 생도 시절의 네 모습을 꾸며 내고 있잖아. 내 말이 틀려?”

자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그건 말이 되지 않는 추측이었다. 그는 이미 사관 학교를 다닐 적에 스스로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했는지조차 잊어버린 사람이었다.

“그래서 내가 아까도 말했잖아. 그 시절의 너라면 절대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없었을 거라고. 내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게 맞다면 말이야. 넌 분명히 뭔가 다른 사람으로 변했을 거야. 적어도 내 앞에 앉아 있는 자일스 헤센과는 다른 사람으로.”

“지금 무슨 소리를…….”

“나는 안나가 아니야. 그러니까 이만 진짜 네 목소리를 드러내, 자일스. 날 영원히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

차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사이, 갑자기 그들은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저택을 밝히고 있던 전등이 일제히 꺼졌다. 하필이면 창문까지 모조리 막아 놓은 탓에 제대로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군인이 손전등을 밝혔다.

“문제가 무엇인지 찾아보고 오겠습니다.”

“잠깐…….”

손전등 불빛이 멀어졌다. 이제 그들은 완연한 어둠 속에 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 자일스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돌아갔다. 정전이 일어난 틈을 타 도주를 시도할 수도 있었다. 군인들의 시야를 지금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차단시킬 기회는 없을 것이다.

도망쳐야 할까? 수갑이 채워져 있기는 했지만 체술을 제대로 활용만 한다면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일이었다.

그가 도주로를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을 때였다.

문득 그의 귀에 낯설고도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힘겹게 신음하며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