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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72화 (72/93)

<72화>

*

언제나 그랬듯이 식사 시간이 되었다. 그 말은 루이제와의 일종의 면담이 시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식사 메뉴는 매일 바뀌었다. 오늘은 베이컨과 감자를 주 재료로 해서 만든 요리가 특히 눈에 띄었다.

물론 자일스에게 이런 것들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는 그저 식사를 하라는 명령에 따를 뿐이었다. 자의가 아닌 복종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머리가 가벼워지고 뒤숭숭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요즈음 자일스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한계까지 치달아 오른 죄책감과 자기혐오였다. 루이제가 신문 기사들을 보여 준 이후로 그는 안나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물리적인 자유를 얻었다 한들, 안나는 평생 그가 저지른 죄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억지로 생명을 연장시키고자 하는 모든 일들이 그에게는 점차 버거워졌다. 그중 하나가 바로 매일 정해진 시각에 돌아오는 이 식사 시간이었다.

고위 장교가 합석하는 자리라 그런지 몰라도, 그들이 죄수에게 대접하는 것치고는 좋은 식사를 내온다는 점이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살아남는 데에 정신이 팔려 저지른 죄는 결국 무고한 사람을 집어삼키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는 아무것도 막을 수 없었다. 더 이상은.

자일스는 안나를 내버려 두고 사형대로 올라가야 했다. 무책임하고 비겁한 죽음이었다. 어쩌면 스스로 이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칠 수 있기를 바라 왔을지 모른다는 무의식 속의 속삭임은 그로 하여금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했다.

“오늘도 너에 대한 기사가 났어.”

루이제는 마치 평범한 친구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온 사람처럼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신문을 펼쳐 들고서 헤드라인을 읽었다.

“‘간신히 살아 나온 생존자의 인터뷰’. 입스윈에 수감되어 있다가 벨담으로 송환되어 돌아온 여성에 대한 인터뷰야. 혹시 미카엘라 라이너라고 기억나?”

“아니.”

“하긴, 그 안에서 마주친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어. 기억 못 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지.”

“안나에 대한 이야기는 없나?”

자일스의 물음에 루이제는 신문을 한두 장 넘겨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물론 있지. 네게 전해 줄 만한 별다른 얘기는 없어. 하지만 오늘 있을 방송으로 수많은 기사가 쏟아져 나올 거야. 기대해도 좋아.”

“방송이라고?”

“아, 내가 말 안 했던가? 오늘 안나가 라디오 방송국에서 인터뷰를 진행할 거야. 네가 듣고 싶어 할 것 같아서 특별히 라디오도 챙겨왔다고. 친구 좋다는 게 이런 거잖아, 그렇지?”

그제야 식탁 언저리에 못 보던 라디오가 놓여 있었던 연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뻔히 보이는 그림이었다. 자일스는 편두통이 도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가 항의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일 또한 없었다.

“……안나가 동의한 일인가?”

“그럼, 설마 우리가 억지로 붙들어다 방송국에 앉혀 놨겠어? 제 발로 들어간 거야. 강제성은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안나가 이런 일을 자처했다고?”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인 거지.”

루이제는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인터뷰를 잘 끝마치면 너를 만나 볼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거든.”

그러자 자일스는 입을 다물었다. 이제야 실마리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득 될 것도 없는 일을 순순히 하겠다고 했을 리가 없지. 안나를 만날 가능성이 생긴 것이었지만 자일스는 어쩐지 기쁘지 않았다.

“나를 만나러 올 수 있다는 건 정말인가?”

“우린 거짓말은 안 해.”

“하지만…….”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이지?

자일스는 목구멍 위까지 올라온 말을 간신히 삼키고는 이마를 문질렀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그는 간신히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안나의 얼굴을 마주 본다면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될 것 같아서 두려웠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다만 안나를 마주하고 나면 그를 둘러싼 이 모든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지지는 않을까, 스스로 더 깊은 곳으로 추락하게 되지는 않을까. 그런 것들이 자일스를 두렵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는 견뎌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내버려 두고 도망치듯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것은 바꿀 수 없는 미래였다.

원래대로라면 자일스는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벨담이라는 나라가 안나까지 집어삼키려 한다는 사실을 몰랐더라면 그럴 수 있었을 거다.

“뭐, 내게 별 의도가 있어서 들려주겠다는 건 아니야. 그냥 네가 궁금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만약 듣고 싶지 않으면 말해. 라디오는 도로 가져가면 되니까.”

“아니야. 듣게 해 줘.”

그의 요청에 루이제는 의외라는 듯이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되묻지 않고 라디오 주파수를 조정했다.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던 라디오는 곧 선명한 말소리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정오에 예정되어 있던 거니까 곧 시작할 거야. 정말 후회 안 하겠어? 너에 대해 좋은 얘기가 나오지는 않을 텐데.”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인터뷰 내용 따위는 그를 상처 주지 못할 것이다. 다만 자일스는 그들이 안나에게 무슨 짓을 하라고 시켰는지 알아야 했을 뿐이었다. 안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건 없겠지만, 적어도 모른 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윽고 라디오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저는 레오 슈미트입니다. 이번에는 조금 특별한 게스트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가장 뛰어난 명배우보다 더욱 유명하며, 벨담 역사상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연애사의 주인공이시기도 하죠. 매일 같이 신문 1면에 등장하는 바로 그분! 바로 엘로이즈 비스마르 양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비스마르 백작 영애님.”

“저도 반가워요.”

“인터뷰를 하시는 건 처음이신가요? 기분이 어떠세요?”

“무척 떨려요. 하지만 많은 분들이 듣고 계시다는 걸 알아요. 그러니 제 이야기를 빠짐없이 전해 드리려 노력할게요.”

“좋습니다, 비스마르 양. 편하게 엘로이즈라고 불러도 될까요?”

“네, 괜찮아요.”

“그럼 엘로이즈. 얼마 전에 조국인 벨담으로 돌아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소감이 어떠셨나요? 아무래도 입스윈과 벨담은 좀 다르죠?”

“아, 정말 아름다운 나라예요. 이제야 벨담 땅을 밟게 되었다는 게 억울할 정도였어요.”

“무사 귀환 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듣자 하니 벨담으로 돌아오실 때 동행인이 있었다고요.”

“맞아요. 저는 자일스와 함께 왔어요.”

“음, 그랬군요. 그때 정확히 어떤 상황이었는지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입스윈 혁명군이 우리 뒤를 쫓고 있었거든요. 가만히 있다간 우리 모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요. 자일스는 저를 데리고 벨담 국경을 넘겠다고 했어요. 물론 벨담으로 가면 그는 사형수가 되겠지만, 저는 살 수 있으리라 믿었으니까요. 그는 저를 살리기 위해 죽음을 불사한 거예요.”

자일스와 루이제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자일스는 뭔가가 엇나가고 있음을 알아챘다. 분명 대본이나 지시 사항이 있었을 텐데, 안나가 그것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진행자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기색이었다.

“그러니까, 입스윈 혁명군에게 쫓기고 계셨다고요.”

“네, 맞아요. 자일스가 저를 지키기 위해 제 신분을 숨겨 주었거든요. 그게 들통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도망쳐야만 했어요.”

“결국 자일스 헤센이 벌여 놓은 일에 말려든 게 아닌가요? 만약 그 남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엘로이즈 양은…….”

“간단해요. 저는 죽었을 거예요.”

침묵은 찰나였지만 아주 길게 느껴지기도 했다. 당장 이 방 안에 모인 세 사람마저도 긴장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 와중에 안나의 목소리만이 낭랑한 어조로 이어졌다.

“많은 분들이 저에 대한 이야기를 익히 들어 아실 거라고 믿어요. 하지만 그 수많은 이야기 중에 당사자가 직접 전한 이야기가 얼마나 있을까요? 아마 지금 제가 해 드릴 말이 그 최초가 아닐까요? 그래서 먼젓번 약속한 대로, 저는 제 이야기를 가감 없이 전해 드릴 거예요. 우선 저를 구한 건 자일스였어요. 그는 제 인생에서 일어난 최초의 행운이었어요.”

“왜 그렇게 말씀하시죠?”

“왜냐하면 그 전까지도 저는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했거든요.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요. 제 목숨을 이어 가기 위해 노력해야 했어요. 제 아버지 아시죠? 선대 백작님이요. 그 사람은 제가 요한 마이어와의 혼담을 성사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절 죽어라 팼거든요. 이런 이야기는 물론 신문에 나오지 않았겠죠?”

“엘로이즈 양, 지금 하시는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맹세할 수 있습니까?”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전부 다 진실이에요. 아버지는 매일같이 저를 불러다 때렸어요. 그리고 벽장이나 마루 밑에 가두곤 했죠. 제 몸에 난 흉터는 대부분 그가 만든 거예요. 난 그런 삶을 살아왔어요. 제가 행복한 아가씨였다는 얘기는 전부 다 지어낸 거짓말이에요. 저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어요. 앞으로도 계속 그런 삶을 살아야 할 줄로만 알았죠. 그런데 그거 알아요? 나는 결국 내게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 알려 준 사람을 만났어요. 그게 바로 자일스 헤센이에요.”

루이제의 시선이 그 쪽으로 옮겨 오는 것이 느껴졌다. 반면 자일스는 라디오에서 단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안나는 대본을 무시하고 온 벨담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오로지 그만을 위해…….

“물론 자일스가 죄를 지었다는 건 알아요. 사람을 죽였으니 벌을 받아 마땅하겠죠. 하지만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저는 자일스 때문에 행복했어요. 그건 사실이에요. 그건 우리 사이에 존재했던 떳떳한 감정이에요. 난 그걸 말하고 싶어요. 다른 이들이 나에 대해 무어라 말하든 상관없지만, 적어도 자일스에 대한 내 감정을 모욕하게 둘 수는 없어요. 자일스는 나를 사랑한다고, 내가 죽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한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이제 이 인터뷰는 한 사람의 일방적인 독백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놀랍게도 안나는 자일스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자일스, 거기 있어? 네가 듣고 있는 거 알아.”

“안나.”

그가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 물론 그의 목소리는 안나에게 닿지 않을 것이다.

안나가 말을 이었다.

“네가 그랬었지. 너는 나 때문에 살아갈 수 있었던 거라고. 나를 포기할 수 없어서 네 삶도 포기하지 않은 거라고. 나는 네가 앞으로도 계속 버텨 주었으면 해. 계속 버텨서, 내 옆에 있어. 나는 네가 죽기를 바라지 않아. 왜냐하면 너는 내가 살린 사람이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그녀의 목소리가 커졌다. 자일스는 굳어진 채 안나가 하는 말을 들었다.

“너는 내가 살린 사람이야! 그러니까 포기하지 말라고! 자일스, 네 삶을 포기하지 마!”

방송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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