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저택 본관으로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내 머리를 다시 검은색으로 물들이는 것이었다. 내겐 더 이상 내 진짜 머리색을 숨겨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금발을 유지하려면 계속해서 색을 빼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머리가 많이 상했다. 나는 태생적으로 검은 머리라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젠 내 머리카락을 자유롭게 놔줄 때가 되었다.
머리를 한 차례 감고 나서 거울을 보니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예전의 내가 거기에 있었다. 금발로 산 지 몇 개월은 되었는데 다시 돌아오니 어색하기는커녕 이제야 내 모습을 되찾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다.
그 모든 일들은 결국 나를 죽이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안나 키팅. 그것은 내 이름이자 정체성이다.
아델레는 이제 내 말동무나 다름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아렌트가 방문했다는 사실이나, 그가 내게 라디오 방송에서 그대로 읊어야 할 대본 서류를 주고 갔다는 사실 등을 다 알고 있었다.
아델레는 대본을 한 장 한 장 넘겨 보더니 기겁했다.
“이렇게나 많이 말해야 한단 말이에요?”
“자기들 딴에는 분량을 채워야 하니까 그렇겠죠.”
“안나, 이거 다 외울 수 있겠어요?”
“완벽하게 외울 필요 없을걸요? 보면서 말해도 아무도 모를 테니까. 물론 다 읽어 보기는 했어요.”
내가 뒤늦게 덧붙였다. 반면 아델레는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나를 보았다.
“괜찮겠어요, 안나?”
“뭐가요?”
“안나는 아직 자일스 헤센을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이건…… 오히려 그를 비난하는 내용이에요. 여기도 쓰여 있잖아요. ‘저는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요’라고요.”
아델레가 나를 걱정해 준다는 게 내심 고마웠다. 그녀는 이 방송 때문에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상할까 우려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정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고, 그래서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다.
“어쩌겠어요?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건 바로 그런 말들인데. 게다가 방송을 하면 자일스를 만날 수 있게 해 준다고 했어요. 거짓말 한 번 하고 그를 만날 수 있다면 나는 몇 번이고 거짓말을 할 거예요.”
“정말 괜찮은 것 맞죠?”
“괜찮다니까요. 정 걱정되면 직접 알아볼래요?”
나는 아델레를 마주 보고 앉아 그녀와 나 사이에 대본을 놓았다.
“예행연습이나 한번 해 보죠. 아델레가 진행자를 맡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말하는지 봐 줘요.”
“아, 네에…….”
그녀는 목을 몇 번 가다듬더니 대본을 따라 읽기 시작했다.
커다란 방 안에서, 우리 둘만의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이번에는 조금 특별한 게스트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가장 뛰어난 명배우보다 더욱 유명하며, 벨담 역사상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연애사의 주인공이시기도 하죠. 매일같이 신문 1면에 등장하는 바로 그분! 바로 엘로이즈 비스마르 양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비스마르 백작 영애님.”
“저도 반가워요.”
“인터뷰를 하시는 건 처음이신가요? 기분이 어떠세요?”
“무척 떨려요. 하지만 많은 분들이 듣고 계시다는 걸 알아요. 그러니 제 이야기를 빠짐없이 전해 드리려 노력할게요.”
“좋습니다, 비스마르 양. 편하게 엘로이즈라고 불러도 될까요?”
“네, 괜찮아요.”
“그럼 엘로이즈. 얼마 전에 조국인 벨담으로 돌아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소감이 어떠셨나요? 아무래도 입스윈과 벨담은 좀 다르죠?”
“정말 아름다운 나라예요. 이제야 벨담 땅을 밟게 되었다는 게 억울할 정도였어요.”
“무사 귀환 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듣자 하니 벨담으로 돌아오실 때 동행인이 있었다고요.”
“맞아요. 그는…… 제가 이 이름을 말해도 될지 모르겠어요.”
“말씀하세요. 괜찮아요. 다들 알고 있는 이름인데요, 뭘.”
“저는 자일스 헤센과 함께 벨담으로 왔어요. 정확히 말하면 그를 피해 달아나다가 국경까지 오게 된 거예요. 벨담이 저를 살린 거죠.”
“그때 상황이 어땠나요?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엘로이즈?”
“물론이에요. 우선 제 이야기부터 하는 게 낫겠네요. 입스윈에서 숨어 살 때, 저는 벨담 귀족 출신이라는 걸 숨기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어요. 하지만 자일스 헤센에게 정체를 들키고 말았죠. 그가 저를 죽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그는 저를 살려 두었어요. 아마도 제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에요. 거기서 끝났다면 좋았겠지만…… 자일스는 내 처지를 이용해 내가 사랑을 연기하도록 강요했어요. 난 어쩔 수 없었어요. 내가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그리고 뭐든 그가 시키는 일을 하지 않으면 그는 나를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으니까요.”
“혹시 그 요구 사항 중에 잠자리도 있었나요?”
“네, 맞아요. 그는 제게 잠자리를 강요했어요. 저를 비난하지는 말아 주세요. 죽지 않기 위해서 뭐든 해야 하는 그 심정을 여러분도 이해하시리라 믿어요.”
“물론 이해합니다. 정말 힘든 상황이셨겠군요.”
“언제까지고 그렇게 살 수만은 없었어요. 저는 자유를 뼈저리게 원했어요. 정체를 숨기고 사는 것도 힘든데, 한 남자의 호의에 매달려서 매일을 불안하게 사는 건 고문과도 같았죠. 그래서 도망친 거예요. 자일스 헤센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그리고 결국 성공하셨군요. 혹시 기억나시는 일화가 있나요? 그와 함께 있을 때 잊을 수 없는 사건들이 종종 있었을 것 같은데요.”
“저는…….”
“안나, 여기까지 해도 되겠어요. 정말 자연스러우셨어요! 방송국에 가셔서도 분명 잘하실 거예요.”
나는 아델레가 왜 멈추었는지 의아했다.
“왜 그래요, 아델레?”
“그다음 부분이 너무 잔인해서 도저히 제 귀로는 못 듣겠어요.”
그녀는 대본을 쳐다보기도 싫다는 듯 완강하게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나는 그다음에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 읽어 보았다.
“자일스가 제 앞에서 사람들을 처형하는 부분이요?”
“너무 디테일하게 나와 있잖아요! 제발 그 이상은 말하지 말아요. 저는 비위가 약해서 정육점 앞도 눈 감고 지나가는 사람이란 말이에요. 하물며 전쟁이 제게는 얼마나 가혹했을지 예상이 되시죠? 다시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요.”
나는 굳이 아델레의 뜻을 꺾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서 소리 없이 대본을 읽어 내려갔다. 자일스와 함께 지내며 겪었던 일화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물론 전부 다 거짓말이다. 이런 일들은 일어난 적조차 없었다.
그중에서도 정점은 마지막에 주고받아야 할 문답이었다.
‘엘로이즈 비스마르 양, 자일스 헤센을 사랑하십니까?’
‘아니요. 저는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향후에도 그를 사랑할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향후에도 그를 사랑할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내가 혼잣말처럼 마지막 부분을 읊자 아델레가 슬쩍 눈을 뜨고 나를 보았다.
“뭐가요? 뭐가 없다고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그렇게 쓰여 있다고요.”
나는 이만 대본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깥바람이나 쐬러 갈까요? 오늘 유독 날이 좋아요. 이런 잔인한 이야기들은 다 잊어버리자고요.”
뭔가 떠올린 내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제가 드라이브 태워 줄까요?”
그러나 아델레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아뇨.”
방송 당일은 금세 다가왔다. 나는 아침을 대충 때우고 나서 흰 블라우스와 붉은 스커트 차림으로 외출할 준비를 마쳤다. 아델레는 내가 더 화려한 옷을 입기를 원했지만, 나는 본래의 내 모습으로 바깥에 나가고 싶었다.
아렌트는 오전 11시경에 나를 데리러 왔다. 그가 나를 보더니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조금 달라지셨군요.”
“눈치챘어요?”
“장님이 아닌 이상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머리카락 색깔이 달라지셨잖습니까.”
“이게 본래 내 머리색이었어요. 더 나 같아 보이죠, 안 그래요?”
아렌트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승용차를 타고 방송국으로 향했다. 물론 나는 방송국에 대한 경험이 몇 번 있어서 별로 긴장되지는 않았다. 입스윈에서 지낼 적에 매주 방송국에 들러서 연주를 하곤 했으니까.
벨담의 방송국이라고 크게 달라 보이는 건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건물 안을 오갔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머리 위에서 밝은 빛을 비추고 있었다. 그 점은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입스윈 방송국에 샹들리에 같은 건 없었으니까.
아렌트와 나는 승강기에 올라탔다. 그가 격자로 된 철제문을 밀어 닫자 이내 승강기가 움직였다. 좁디좁은 공간 안에 몸을 밀어 넣었음에도 그는 불편한 기색 한 번 내지 않았다.
“대본은 읽어 보셨습니까?”
“충분할 만큼은요.”
“진행자가 잘 리드할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걱정 안 해요.”
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승강기는 우리를 방송이 진행될 녹음실로 데려다주었다. 벌써 많은 관계자들이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미리 지시라도 받은 건지 그들은 나를 보고 고개만 까닥였을 뿐 알은체를 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나는 진행자와 악수를 나누었다. 낙관주의자처럼 밝은 인상을 지닌 그는 아렌트와 엇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반갑습니다, 비스마르 양. 레오 슈미트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저에 대해서는 이미 아시겠죠.”
“그럼요, 워낙 유명 인사이시지 않습니까.”
그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나를 녹음실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들은 내가 첫 번째 프로그램에서 인터뷰를 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
레오가 손목시계와 녹음실에 달린 시계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앞으로 10분 정도 남았군요.”
그 정도는 길다고 말할 수도 없는 시간이었다. 나는 차분히 기다렸다. 연주를 시작하기 전, 피아노 앞에서 마음을 가다듬듯이.
“너무 긴장하시진 마세요. 생각보다 별거 아닐 겁니다.”
그가 내게 속삭여 말했다. 레오는 내가 방송국에 아무런 경험이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굳이 해명하는 대신 얌전히 고개만 끄덕였다.
녹음실 바깥에서 프로듀서가 손가락으로 숫자를 셌다.
셋, 둘, 하나…….
그가 손가락으로 빨간 전구를 가리켰다. 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방송이 시작되었다는 뜻이었다.
나는 진행자를 마주 보며 선량하고 순진한 여자처럼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