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우리는 응접실에 와 있었다. 이름 모를 사용인들이 간단한 티 세트를 내어 주고는 말없이 사라졌다. 이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는 건 나와 아렌트뿐이었다.
차나 한 잔 할 만한 주제도 아니었고,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기 때문에 누구도 다과나 찻잔에 입을 대지 않았다. 레몬그라스의 상큼한 향만이 그나마 분위기를 산뜻하게 띄우려 애를 쓰고 있는 형국이었다.
“라디오 방송에 참여해 달라고요?”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제안이었던 만큼 내 목소리는 어쩔 수 없이 날이 서 있었다.
“그렇습니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해 봐요. 당신이 내건 그 조건도 같이.”
“아마 긴 이야기가 될 겁니다. 설명드려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상관없어요. 내겐 남는 게 시간이에요.”
“엘로이즈 양, 벨담에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지만 그럼에도 이 나라의 현 상황이 어떤지는 대충 알고 계시겠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명 세계 대전이라는 대전쟁에서 패했으니 벨담이라는 나라가 어디까지 추락했을지는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뻔했다. 내게도 사용인들에게서 대충 전해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지금부터 전해 드릴 말들은 다른 누구에게도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부디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무슨 이야기이기에 그러죠?”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어 좋을 것 없는 일들이라는 것만 아시면 됩니다.”
“……알겠어요. 말씀해 보시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자일스 헤센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죄인입니다. 물론 그가 자국민을 살해했다는 건 사실입니다만, 그의 죄가 더욱 부풀려지고 가히 악마적인 형태로 변질된 건 모두 국가의 공익을 위해서였습니다. 사람들은 시궁창만도 못한 현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현실을 잊게 만들 만한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을 겁니다.”
“당신들이 자일스를 제물로 이용하고 있다는 건 알아요.”
“엘로이즈 양도 이해하셔야만 합니다. 눈길을 끌 만한 이슈가 없이는 사회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위험한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마른 가지에 작은 불티가 옮겨붙으면 온 숲이 화마에 집어삼켜질 수 있는 법이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가 식어 가고 있었지만 입을 댔다간 그대로 뱉어 내고 말 것 같아서 내버려 두었다. 그의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 이해하라는 말인가? 그건 불가능한 요구였다.
“엘로이즈 양도 이젠 벨담의 일원이 되셨으니 아시겠죠. 매일 약탈과 범죄가 일어나는 나라에 살고 싶지는 않으실 것 아닙니까.”
“그렇다 해도 그건 패망한 국가가 져야 할 책임이에요. 전쟁을 막지 못한 데다 패배하기까지 했으면 그만한 책임이 따라오는 법이잖아요. 이건 벨담이 고스란히 져야 할 무게예요.”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또다시 희생될 겁니다.”
“벌써 당신들은 한 사람을 희생하고 있잖아요. 이 커다란 국가가 져야 할 죄를 단 한 사람의 등에 짊어지우고 있잖아요. 그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당신들이야말로 이해해야 할 거예요.”
“불특정 다수의 국민들이 피해를 입느니 차라리 한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현명한 판단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의 말을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잔인했다.
나는 벨담보다는 자일스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벨담은 내게 멀고도 희끄무레한 존재였지만, 자일스는 한때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남자였다.
그는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있어서 제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고, 살아갈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또…….
“국가의 존재 의의는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이 견고하고도 거대한 울타리는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러한 과업을 한 차례 실패한 전적이 있습니다. 또다시 실패한다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비록 벨담은 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가족을 잃었죠. 하지만 아직 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뿐입니다. 국가가 또다시 혼란에 빠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혼란을 막기 위한 희생양이 되는 것이 자일스 헤센이 할 일이라면, 오히려 그는 영웅으로 불려야 할 사람이기도 하죠.”
“영웅이라고요?”
“말씀드렸다시피 그는 사람들의 눈길을 돌려서 앞으로 일어날지 모를 대혼란을 늦추고 있는 존재입니다. 어쩌면 국가에 가장 충성스런 군인으로서 제 할 일을 다하고 있는 것이죠. 그는 훈장을 받아 마땅합니다. 물론 공개적으로 영웅 대접을 받을 일은 없겠지만, 우리는 마음 깊이 그에게 경의를 표할 겁니다.”
“지금 말이 되는 소리를…….”
나는 혼란스러웠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거대한 국가의 실패를 한 사람이 떠안아서 만들어진 평화에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요?”
“영웅이란 본디 그런 존재가 아니던가요?”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일스라면 어땠을까? 그라면 이런 말들을 듣고서 어떻게 반응했을까.
평소의 그 담담한 눈빛으로, 표정에 한 치의 변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을까? 벨담이라는 국가를 위해 필요악이 되겠다고 자처했을까?
“……자일스도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나요?”
“지금 당장은 모르더라도 곧 알게 될 겁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처한 운명이 어떤 것인지도 알려 주지 않을 만큼 매정하지는 않습니다.”
아렌트는 다음 말을 이었다. 아주 확고한 어조로.
“그리고 그는 받아들일 겁니다.”
“어떻게 그리 확신하시는 거예요?”
“그는 군인이니까요. 군인들은 국가를 대신해 팔다리를 잃어도 아무 불평도 하지 않습니다. 그건 뼛속까지 깊이 새겨진 본능입니다. 사냥개가 죽는 순간까지도 주인을 원망하지 않는 것과도 같은 이치입니다.”
“그건…… 너무 가혹해요.”
“하지만 그뿐이겠습니까.”
아렌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조롱이나 비웃음과는 거리가 먼 미소였다.
“자일스 헤센은 무엇보다 당신을 위해 받아들일 겁니다. 벨담의 안위 속에는 당신의 삶이 포함되어 있는 거니까요. 당신이 안전하게 삶을 영위할 수만 있다면, 그는 뭐든지 할 겁니다. 그러니 그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이미 당신을 위해 삶을 포기하고 벨담 국경을 넘은 사내가 아닙니까.”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자일스는 어느 시점 이후로 자신의 안위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대신 그에게는 맹목적으로 굴 만한 누군가가 필요했고, 그게 바로 나였다.
끝없는 자기혐오는 누군가 그를 진창에 처박아도 무감하게 반응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스스로를 조금이라도 덜 혐오하고 싶어서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불사르고자 했다.
과거에 자신의 생존을 위해 그랬듯이.
“이 모든 사정들을 이해하셨다면, 제 제안을 받아들이십시오. 물론 자일스 헤센을 사랑하신다는 걸 압니다. 이 거대한 작전에 손을 보탠다는 게 그를 배신하는 것처럼 느껴지시겠지요. 라디오 방송을 하시는 대신 그와 한 차례 만남을 주선하겠다는 건 바로 그래서입니다. 엘로이즈 양이 라디오 방송에서 하게 될 말들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게 아니더라도, 헤센 또한 엘로이즈 양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도록 만들어 드리겠다고 제안하는 겁니다.”
“결국 저를 깊숙이 끌어들이셔야만 하겠다는 거군요.”
“엘로이즈 양은 이미 자일스 헤센과 깊은 관계를 맺으신 시점에서부터 스스로 걸어 들어오신 겁니다. 물론 이런 결말을 원하신 적은 없으셨겠지요. 유감을 표합니다.”
아렌트는 각이 진 새까만 가방 안에서 끈으로 묶인 종이 다발을 꺼냈다. 나는 그것을 테이블 위로 건네받았다. 타이핑 기계로 인쇄한 그 문서는 내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읊어야 할 대본인 것 같았다.
나는 대본을 천천히 훑던 끝에 내 마음을 정했다.
“생각할 시간을 드릴 테니 결단이 서시면 제게 연락하십시오.”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드릴 테니까요.”
대본에서 눈을 떼고서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제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을 마주한 사람처럼 확고했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명료해서 주저할 필요조차 없었다.
“할게요. 라디오 방송에서 이대로 읊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렇죠? 할 수 있어요.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일게요.”
“받아들이시겠다고요.”
“저 또한 자일스의 일에 휘말려든 이상, 벨담의 영속을 위해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해 달라고 부탁하시는 거잖아요. 할게요. 어차피 모든 절차가 정해졌을 테고, 제가 바꿀 수 있는 건 없을 게 뻔하잖아요. 그가 죽는 걸 막을 수 없다면, 그의 죽음을 더욱 명예롭게 만들어 주고 싶어요. 자일스가 오해할 일도 없게 해 주신다니 더할 나위 없네요.”
내 머릿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이 나를 잠시 바라보던 아렌트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승낙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좋아요. 방송은 언제 하는 거죠?”
“이번 주 목요일 정오입니다. 때가 되면 제가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때까지 대본을 잘 숙지하신다면 좋겠군요.”
그가 가방을 닫고서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모자를 눌러쓴 그가 챙을 한 손으로 잡고 살짝 내리며 말했다.
“국가는 당신의 헌신에 경의를 표할 겁니다.”
나는 그를 굳이 배웅하지 않았다. 멀어지는 발소리 끝에 문이 닫혔다. 대신 나는 아렌트가 주고 간 대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내가 대놓고 자일스를 비판해야 할 라디오 방송은 정확히 사흘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