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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69화 (69/93)
  • <69화>

    나는 또 악몽을 꿨다. 첫 번째는 자일스가 죽는 걸 보는 꿈이었다.

    새벽에 땀을 뻘뻘 흘리며 일어난 나는 그대로 다시 잠들었고, 이번에 나는 꿈속에서 과거로 돌아갔다. 어릴 적, 솔즈부르 사유지의 저택에서 지내던 그때로 말이다.

    꿈속에서 아버지는 내 입 속에 구슬을 잔뜩 물려 놓고는 내 머리를 툭툭 치며 욕을 했다. 제대로 말할 줄 아는 게 뭐냐면서 말이다. 이래서는 거렁뱅이의 신부가 되기 딱 좋겠다고 나를 모욕하려 들었다.

    물론 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꿈속의 나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었고, 그래서 백작에게 너랑 거렁뱅이랑 바꿔치기를 해도 그 천박함은 아무도 분간 못 할 거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구슬이 입 안을 잔뜩 채우고 있어서 그러지 못했다.

    꿈에서 깨어난 지금까지도 분한 일이었다. 나는 내 방에 딸린 작은 욕실에서 대충 세수만 하고 저택 바깥으로 나갔다.

    바깥으로 나오니까 확실히 숨이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이 저택은 아무래도 내게 그리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우선 내가 악몽 같은 시절을 보냈던 옛 저택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꼭 그때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기시감이 들어서 가끔은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했다.

    저택을 관리하는 몇몇 사용인들이 내게 목례를 했다. 나는 그들에게 마주 인사하며 저택 주변을 마음껏 돌아다니다 익숙한 얼굴을 마주쳤다.

    나를 병원에서 저택까지 데리고 와 준 사용인, 요제프였다. 그는 내가 타고 왔던 바로 그 승용차를 광내고 있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까닥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그냥 안나라고 불러요.”

    “아델레한테 그리 하라고 시키셨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요제프가 슬쩍 웃으며 말했다. 마치 별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난 내 결정에 특별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게 뭐 어때서요?”

    “보통 귀족 아가씨들이 하실 법할 말씀은 아니거든요.”

    “난 귀족 아니에요.”

    그러나 내 선언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같았다.

    “정말인데요. 난 내가 귀족이라고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어요.”

    “아가씨는 비스마르 백작가의 후계자십니다.”

    “아버지가 은행원이라고 해서 그 딸도 은행원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

    “그럼 아가씨는 스스로를 뭐라고 정의하시는 건가요?”

    간단한 것 아닌가? 나는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내뱉었다.

    “상속녀요.”

    “그냥 그뿐인가요?”

    “네. 난 그냥 재산을 상속받았을 뿐이에요.”

    “곧 작위를 이어 받으실지도 모르는데도요?”

    “한 나라의 우두머리를 투표로 뽑는 세상에 작위는 무슨 작위예요? 왕좌는 그저 화려한 의자에 불과한 시대잖아요. 난 시대에 뒤처지고 싶지 않아요. 귀족 행세하는 작자들이랑 같이 지내보고 나니까 그게 어릿광대만도 못한 짓이라는 걸 더욱 잘 알겠더라고요.”

    요제프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그는 내가 곧 마음을 바꾸게 될 거라 생각하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나는 내 결정을 번복하지 않을 것이다. 시대착오적인 행보를 보이다가 결국 그들이 어떤 파국에 치달았는지 보라.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면 결국 그렇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내게는 귀족 행세를 하면서 마음 편히 눌러앉아 살 생각 따윈 없었다. 애초에 이 땅 위에서만큼은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모두가 엘로이즈 비스마르에 대해 알고 있었다. 지금도 어디선가 신문에 실린 내 얘기를 읽고 무어라 첨언하는 무리가 있을지도 몰랐다.

    자일스가 보고 싶었다. 그가 내 옆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지금 곁에서 승용차를 닦고 있는 남자가 사용인이 아니라 자일스였다면.

    나는 잠시 내가 물려받은 이 저택에서 자일스와 함께 지내는 상상을 했다.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으며, 신문에 그와 내 이름이 사이좋게 실리는 일도 없는 세상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영영 일어나지 않겠지. 현실을 무시하려 해선 안 된다. 자일스는 곧 사형 선고를 받을 것이고, 나는 평생 언론의 관심과 그 후유증에 시달리며 살아야 할 거다. 그게 현실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요.”

    “벌써 이곳으로 도망쳐 오셨잖아요. 벨담 안에서라면 안전하실 겁니다.”

    “그냥…… 더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음이 갑갑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나는 승용차에 몸을 기대고는 농을 던졌다.

    “혹시 알아요?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다 보면 달나라까지 갈 수 있을지.”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요?”

    “답답하니까 그렇죠. 마음 한구석이 꽉 막힌 것 같단 말이에요. 이걸 어떻게든 해소할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듯 보여서 더 그랬다. 어떻게 하면 자일스와 내가 함께 이 난관을 벗어날 수 있을까? 내겐 아무런 힘도 없었다. 가진 건 재산뿐인데, 이건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차라리 내가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거라면 좋을 텐데. 그랬다면 결말에서 우리는 결국 드라마틱하게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날 수 있었을 거다. 진부한 영화가 다 그렇듯이 말이다.

    자일스는 나를 몇 번이나 죽음의 위협 속에서 구해 줬는데 나는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할 일 없이 가만히 있는 것조차 참을 수가 없어졌다. 뭐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아서, 나는 다짜고짜 요제프가 닦고 있던 승용차에 올라탔다. 그것도 운전석에 말이다.

    “아가씨, 뭐 하세요?”

    나는 나를 얼떨떨하게 바라보는 요제프에게 대고 요구했다.

    “운전하는 법 가르쳐 주세요.”

    “네?”

    “운전 말이에요. 가르쳐 달라고요. 나도 차를 운전해 보고 싶어요.”

    “운전…… 말씀이신가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감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요제프는 결국 내 부탁을 거절하지는 못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긴 하죠.”

    그는 내 옆자리, 그러니까 조수석에 탔다. 정적 속에 새들이 우는 소리만이 귀를 간질였다.

    “안전벨트…….”

    “했어요.”

    “네, 좋아요. 그럼…….”

    그가 내게 차 키를 건넸다. 나도 승용차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건 아니었다. 자일스가 종종 나를 태우고 다니곤 했으니까. 적어도 곁눈으로 본 건 있었다. 나는 자일스가 했던 것처럼 차키를 꽂고 시동을 거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자 요제프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다음부턴 나도 몰라요. 뭘 해야 하죠?”

    “아가씨, 한 번도 운전대를 잡아 본 적이 없으시죠?”

    당연한 소릴.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내 추측일 뿐이지만, 내 생각에 요제프 또한 다른 사람에게 운전을 가르쳐 주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

    긴장한 기색이 뚜렷해 보이는 그는 내게 기어를 바꾸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뒤로 젖히면 차가 앞으로 나갑니다. 자…… 보이시죠. 기어를 바꾸니까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너무 느린데요. 더 빨리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엑셀을 밟으면 됩니다. 그건 두 번째 발판…… 아가씨!”

    나는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엑셀을 힘껏 밟았다. 그러자 승용차가 무서운 기세로 앞으로 튀어나갔다. 다행히 우리는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넓은 공터에 있었기 때문에 어딘가에 부딪치는 사고는 피할 수 있었다.

    요제프는 사용인으로서의 위치와 예의범절 따위는 완전히 까먹었는지 미친 듯이 내 어깨를 때리기 시작했다.

    “아가씨, 너무 빨라요! 엑셀은 그렇게 밟는 거 아니에요! 발! 발 떼세요!”

    “뭐라고요? 잘 안 들려요!”

    “엑셀에서 발 떼라고요!”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승용차는 더 이상 가속하지 않을 뿐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그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아서 핸들을 돌리며 넓은 공터 위를 자유롭게 질주했다.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물론 망할 현실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나는 조금이나마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반쯤 열린 창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물론 요제프 또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는 별로 즐거워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이대로 모든 것을 무시하고 멀리 떠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잠깐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마침내 승용차가 멈춰 섰을 땐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제프는 마치 불곰과의 격전 속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처럼 초췌한 얼굴로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그는 도저히 손님을 맞을 수 있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요제프가 조금 쉬도록 하고 혼자서 방문객을 맞으러 나갔다.

    나를 찾아온 건 아렌트였다. 정보국에서 일한다던 그 작자 말이다. 그는 반쯤 시체가 된 요제프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혼란스럽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운전을 좀 배웠어요.”

    “운전은 갑자기 왜죠?”

    “불현듯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문제 있나요?”

    “아닙니다.”

    안쓰러운 눈길로 사용인 쪽을 바라보던 그가 표정을 가다듬고는 말을 꺼냈다.

    “다름이 아니라, 제안 드릴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무슨 제안인데요?”

    “간략히 말씀드리자면 라디오 방송국에서 인터뷰 프로그램을 진행할 겁니다. 엘로이즈 양께서 참여해 주신다면 좋겠다는 전보를 보내오더군요.”

    “난 싫어요.”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난 아렌트가 이 멍청한 제안을 왜 받아들이기로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미 온갖 신문에서 내 이야기를 떠벌리고 다니는 형국에 한술 더 뜰 이유가 뭐란 말이지?

    그러나 아렌트가 다음에 건넨 말은 내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잘만 하시면, 자일스 헤센과 잠시 만나실 수도 있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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