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엘로이즈는 가족의 사랑과 인정을 받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로만 알았다. 애초에 내가 뺨을 맞는 것도, 마음에 상처가 되는 말을 듣는 것도 다 내가 부족한 탓인 줄만 알았다.
모든 문제의 근본이 내 잘못에서 우러나온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해 준 게 바로 요한이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가 내 옷을 벗기려 들었지만 나는 그 사건 덕에 알껍데기를 깨고 나올 수 있었던 거니까.
“안나,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아델레가 조심스레 물어 왔다. 물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지요.”
“자일스 헤센 말이에요.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안나가 생각하는 자일스 말이에요. 신문의 의견 말고요. 안나는 그 사람이랑 오랫동안 함께 있었으니까 어쩌면 그를 더 잘 알 수도 있잖아요.”
“아델레는 어떨 거라 생각하는데요?”
“저야 잘 모르죠. 그 사람을 만난 적도 없고, 신문에서 떠들어 대는 것만 읽었을 뿐이니까요. 저는 안나에게 헤센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해요. 안나가 말했던 것처럼, 이런 건 신문에 한 번도 나오지 않은 내용이잖아요.”
자일스라는 사람.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 나 또한 처음에는 벨담의 여론과 똑같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었다. 두려움. 끝없는 공포. 그리고 밑바닥에서 숨죽이고 있던 증오. 하지만 이제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확연했다.
나라고 그를 완전히 꿰뚫어 본 건 아니다. 우리는 고작 몇 개월 동안 함께 있었을 뿐이니까.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스스로의 내면을 활짝 열어서 나를 그 안으로 초대했다. 내가 그라는 사람을 충분히 돌아볼 수 있도록…….
“그는 외로운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그 넓고도 좁은 세상 속에 홀로 고립되어 있었거든요. 알잖아요, 아무리 투항했다지만 그도 결국 벨담에 악감정을 가진 입스윈 사람들 사이에 끼어든 벨담 출신이니까. 나는 끝없이 겉도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아요. 그래서 그를 이해할 수 있었어요. 물론 살아남고 싶은 열망도 이해했죠. 자일스는 나라는 존재를 찾게 되어서 기뻐했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대할 때마다 두려워했던 것 같아요. 제 주변을 모조리 불살라 버린 것처럼 나도 불사르고 말까 봐.”
“그 사람이 안나를 무척 잘 대해 주었나 봐요.”
“나는 자일스에게 남은 마지막 도피처 같은 존재였어요.”
자일스는 나를 잃을까 봐 항상 노심초사했다. 그래서 항상 내 뒤를 쫓아다녔다. 스스로의 안위를 챙기기보다는 차라리 제 몸을 던져 나를 구하기를 택했다.
“나는 당연히 그가 더 높은 위치에 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상대편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진 건 바로 나였어요.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는 게 우습죠. 이제 알아 봐야 무슨 소용이에요? 그는 감옥에 있고, 곧 죽을 텐데…….”
나와 아델레의 눈이 마주쳤다. 아델레가 내 말에 공감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머뭇거리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아델레, 자일스가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네? 그럴 리가요. 그 사람은 무조건 사형 선고를 받을 거예요. 아주 오래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이니까요.”
“하지만 난 그가 살아남기를 원해요.”
나는 아델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자일스가 살았으면 좋겠어요.”
아델레는 무어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머뭇거리다 테이블 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녀가 내게 동의할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다. 애초에 동의를 구하려고 한 말도 아니었고. 다만 나는 내 마음속을 맴돌던 소망을 입 밖으로 꺼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이해해요.”
“아니에요, 당사자가 그렇다는데 제가 뭐라고 첨언하겠어요? 물론 잘 와닿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안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잖아요.”
아델레가 두 손을 뻗어 내 오른손을 꼭 잡았다. 그녀는 나를 위로하듯 미소 짓고 있었다.
“물론 제가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아요. 저는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고, 단지 이야기만 전해 들었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제게 얘기하세요. 저는 듣는 것 하나는 잘하거든요. 정말 듣는 것만이요. 멋대로 넘겨짚거나 오해하지는 않을게요. 그러니까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저를 찾으세요. 안나는 우리 아가씨니까요.”
“……고마워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뭘. 그럼 안나, 제가 다음 질문을 할게요. 신중히 대답해 주셔야 해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델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게 장난스레 질문을 던졌다.
“후식은 뭘로 하시겠어요?”
*
아렌트 홀츠만은 루이제를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루이제 고틀리프 소령. 커다란 전쟁은 그녀의 가슴팍에 소령 계급장을 달아 주었지만 그 대가로 루이제가 누렸어야 할 젊은 시절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
이건 과거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전쟁은 청년들을 나이 들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떠오르는 여명처럼 희끄무레한 과거의 날들을 평생토록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루이제는 자일스 헤센을 맡게 되어 상당히 불만스럽다는 듯이 굴었다. 그녀는 아렌트와 대화를 나누는 내내 줄담배를 피워 댔다.
“왜 하필 나였는지 모르겠어.”
그녀가 말했다.
“물론 나여야만 하니까 그랬겠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그래도 난 여전히 불쾌하단 말이야.”
“뭐가 그리 불쾌합니까?”
“난 자일스 헤센이랑 기수가 같았을 뿐이야! 단지 사관 학교를 함께 다녔다고 해서 내가 그놈이랑 관련지어졌다는 게 짜증 난다고. 실제로 나는 헤센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단 말이야. 우리가 동기였던 건 오래전 이야기야. 설령 우리가 조금 친했던 건 사실이라 쳐도, 이건 여전히 말이 안 돼. 그놈은 이미 예전의 그놈이 아니잖아.”
“당신 임무는 적절한 시기에 재판이 내려질 때까지만 자일스 헤센을 관리하는 겁니다. 별로 어려운 임무도 아닐 텐데 너무 불평하진 마십시오. 상부에서도 당신 의견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을 텐데요.”
“뭐야, 위에다 꼰지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루이제가 피식 웃으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갓 임관할 시절에만 해도 초롱초롱하게 빛났을 게 분명한 눈동자 밑에는 오래 묵은 피로와 불면증의 흔적이 검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생도 시절의 루이제가 아니었다. 자일스 헤센 또한 그러했다. 루이제가 말하고 싶은 건 바로 그 지점이었다.
“나는 사실 그놈 만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최대한 이 임무랑 멀찍이 떨어져 있고 싶었던 건데. 도리어 이게 내 발치로 굴러왔네.”
“헤센이 만나고 싶을 법한 부류는 아니긴 합니다.”
“그놈의 전적이 화려해서만은 아니야. 그냥…… 에이, 씨발. 이걸 뭐라 말해야 하지?”
한 손에 담배를 끼우고 다른 한 손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던 루이제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전쟁이란 게 말이야, 한번 그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고 나면 영혼 곳곳에 찌꺼기가 끼거든. 같은 풍경이나 사물을 봐도 다시는 옛날과 같은 시선으로 볼 수가 없는 거야. 예를 들어서 말이야, 나는 하늘을 정말 좋아했어. 시간이 조금만 흘러도 그 빛깔이 바뀌는 게 정말 매력적이라고 생각했거든. 마치 사람 마음이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그녀는 담배를 한 차례 더 피우느라 잠시 공백을 두었다. 아렌트는 루이제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이젠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힘들어. 너도 알겠지만 적국 공군의 활약이 참 대단했잖아. 위를 올려다보기만 하면 금세 귓가에 굉음이 울리는 것 같아. 비행대가 하늘에 뜰 때 내는 그 굉음 말이야. 물론 전쟁 끝난 건 나도 알아. 더 이상 공습당할 일은 없다는 것도 알고. 하지만 머리로는 그럴 리 없다는 걸 알아도 신경이 먼저 반응하더라고. 이제 나는 팔자 편하게 드러누워서 노을 진 하늘을 감상할 수도 없는 인간이 된 거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난 오염됐어. 눈에 보이는 걸 있는 그대로 보질 못한다고. 단지 깨끗했던 시절의 기억만을 붙든 채로 살아갈 뿐이야. 생도 시절에만 해도 나는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지. 자일스 헤센도 그리 될 줄 몰랐고.”
자조적으로 숨죽여 웃던 루이제는 어느덧 짧아져 버린 담배꽁초를 군홧발로 밟아 꺼 버렸다.
“그래서 그 시절은 내게 정말 소중해.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가장 선명하면서도 깨끗한 시절이니까. 난 그 시절을 온전하게 유지하고 싶었어. 나도, 그때 함께 공부하고 훈련했던 동기들도 그리고…….”
“자일스 헤센도 말이죠.”
“만약 그놈 얼굴을 다시 보게 되면…… 자일스가 변해 버린 모습을 내 눈으로 확인한다면 내가 사랑하는 그 시절을 떠올리는 게 힘겨워질까 봐, 그게 두려웠던 것 같아.”
본의 아니게 가장 소중한 기억의 파편 속 일부가 되어 버린 사내는 국가가 공인한 악마가 되어 돌아왔다. 물론 아직 아무도 확답할 수 없는 함정 같은 의문점은 남아 있었다.
과연 그는 벨담이 주도한 이미지만큼 악인일까?
그는 정말로 누이의 시체를 앞에 두고 휘파람을 불었으며, 어린아이를 죽일 때 가장 만족스러워했을까?
그 이야기들은 정말 진실이었을까?
“그래서 만나 보니 어땠습니까? 생각했던 대로던가요?”
루이제는 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버렸다.
“몰라, 나는 잘 모르겠어.”
그녀는 왜 대답을 회피했을까? 물론 중요한 질문은 아니었다. 루이제의 의견은 자일스 헤센을 둘러싼 거대한 작전에 반영되지 않을 테니까.
아렌트는 회상을 그만두고 시내와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 숄을 두른 한 여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렌트가 창을 내리자 그녀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비스마르가의 사용인으로 일하는 그녀의 이름은 아델레였다.
“진전이 있었습니까?”
“……아직 많은 걸 듣지는 못했어요. 이제 막 저택에 들어오신 분이니까요.”
“하지만 몇 마디 중요한 이야기를 흘렸겠지요. 안 그럽니까?”
아델레는 망설였다. 분명 안나를 배신하는 기분이 들어서 꺼림칙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은 벨담을 위한 일이었다.
“아가씨는 자일스 헤센을 너무나도 사랑하세요.”
그녀가 소리 죽여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그가 살아남기를 바란다고 하셨어요. 자신이 꼭 그렇게 만들 거라는 말씀을 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