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모든 걸 바로잡고 싶었을 뿐이다.”
“내 앞에서 하는 고해 성사가 아무 의미 없다는 사실은 알지?”
“의미 있기를 바라면서 하는 말이 아니야.”
자일스는 그를 황망히 바라보는 루이제를 내버려 두고 다시 음식을 기계적으로 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가 철저히 망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을 애써 증명해 내려고 하지 마. 네가 그러지 않아도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고, 내겐 도망칠 생각이 없으니까.”
“몇 년 동안 알고 지내던 귀족들을 처죽이다가 이제 와서 네 죄를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게 이해가 안 가. 사람이 갑자기 그리 변할 수 있는 건가?”
“그럼 넌 내가 무슨 말을 하길 바랐던 거지?”
“난 널 믿지 않아, 자일스 헤센. 네가 정말로 속죄하고 싶어서 이 자리에 걸어 들어왔다는 건 말이 안 돼. 분명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거야. 말해 봐,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전 국민이 네 본모습에 대해 알아, 자일스. 굳이 착한 사람을 연기할 필요 없어.”
“내가 널 속이고 있다고 생각해?”
한편 자일스는 루이제가 왜 그를 도발하려 안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그를 심문하기 시작하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루이제 또한 신문을 통해 그를 알아 간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인 것이다.
뭘 기대하고 있었을까? 한마디로 그녀는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가장 위험한 짐승을 잡아 케이지에 넣는 데에 성공했는데, 막상 그 짐승은 얌전한 애완견처럼 가만히 배를 깔고 누워 있었다.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공포감을 느끼곤 한다. 포악한 맹수가 다른 사람을 물어뜯고 사지를 찢으려 달려들 때보다 더욱 그 사람을 궁지에 몰리게 하는 건, 그 맹수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들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루이제는 자일스가 뭐라도 하길 바라는 것 같았다. 그녀가 예상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부터 자일스는 이미 루이제의 통제권을 벗어나고 있었다.
“네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라서 당황스러운가?”
“이건 네 진짜 모습이 아닐 거야.”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우린 7년 만에 처음 만나는 사이야. 물론 네겐 그렇지 않겠지. 신문을 통해 내 소식을 계속해서 접하고 있었을 테니까.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넌 나를 정말 알았던 게 아니야. 누군가 나에 대해 쓴 글을 읽었을 뿐이지.”
“하지만 그건 진실이었잖아, 안 그래?”
“네 눈으로 직접 보고 듣지 않은 건 밀봉된 상자와도 같아. 그 안에 무엇이 들었을지 알 수 없지.”
“그들이 온 벨담을 대상으로 거짓 기사를 냈다고 주장하는 거야?”
“네 앞에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는데 굳이 활자로 이루어진 기사에 의존할 필요가 있느냐는 소리였어.”
자일스는 역으로 질문했다.
“나에 대해 뭘 알지, 루이제? 라디오를 통해 듣고 신문에서 읽은 걸 제외하고 말이야. 네가 진짜 보고 겪은 나는 어떤 인간이지?”
그러나 루이제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서로가 이미 아는 대로 그들 사이의 공백은 너무나도 길었으며, 그마저도 커다란 전쟁이 그 사이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구멍을 뚫어 놓았다.
“식탁 위에 사과 잼이 있군.”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지?”
“넌 사과를 못 먹잖아.”
그러자 도자기 인형처럼 한 표정만을 유지하던 루이제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옛날 일일 뿐이야.”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건가?”
“그딴 건 내게 아무 영향도 못 끼쳐.”
“사과 향만 맡아도 팔에 두드러기가 나곤 했잖아.”
“헛수작 부리지 마. 네가 나에 대해 안다고 생각해?”
“그럼 너는 나를 아나?”
루이제는 입을 다물고 얼마간 자일스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곧 그들 사이의 신경전은 끝을 고했다. 그녀는 곧 한층 누그러진 얼굴로 토스트에 사과 잼을 발랐다.
“네가 허튼수작을 부린다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 그것만 알아 둔다면 모두가 편할 거야.”
“아무 짓도 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
“그리고 아까 안나 얘기 말인데.”
그녀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거짓말이었어. 난 아직 그녀를 방문하지도 않았거든. 다른 남자를 만났다느니 둘이 함께 뒹굴었다느니…… 그냥 지어낸 말이야. 분명히 네가 반응할 거라 생각했지.”
“그럴 줄 알고 있었어.”
“왜? 안나가 널 배신하지 않을 이유라도 있나?”
“내 문제가 아니야. 안나는 다른 사람을 쉽게 믿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아. 경계심이 많은 사람이니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
“그래?”
가볍게 그의 말을 넘기는 듯하던 루이제가 무심코 혼잣말을 흘렸다.
“그런 여자가 왜 하필 너를 받아들인 거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내가 샌드위치를 달라고 했을 때 기대한 것은 그야말로 평범한 샌드위치였다. 길가 상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것 말이다.
하지만 내 앞에 펼쳐진 건 계란으로 묘기를 부린 것 같은 온갖 샌드위치였다. 접시 위에 놓인 음식들은 마치 ‘이렇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건 몰랐겠지’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아델레는 얼떨떨한 눈길로 샌드위치를 바라보는 나를 향해 뿌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때요? 주방에서 최선을 다한 거예요. 비스마르 가문의 유일한 상속녀께서 드실 건데 평범한 샌드위치를 내오긴 좀 그렇잖아요.”
“저는 정말 샌드위치면 괜찮다고 말하려던 건데…….”
“그럼 자존심이 상하잖아요! 자, 보세요. 이건 삶은 계란을 특제 소스에 버무린 후에 야채랑 함께 돌돌 만 거고요. 이건 햄을 두껍게 올리고 중간중간에 오이랑 파프리카를 넣어서 식감이 살도록 한 거래요. 그리고 저건 싱싱하고 탱글탱글한 새우가 든 거고…….”
“고마워요. 정말로.”
내가 평소에 먹던 얇디얇은 샌드위치와는 다르게 두꺼운 부피를 자랑하는 ‘주방의 자존심’ 샌드위치를 바라보던 나는 대충 아무거나 집어서 입에 넣었다.
괜히 요리사를 고용하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는 맛이었다. 이런 걸 매일 독차지하고 먹었으니 혁명이 일어나고도 남지…….
“그런데요, 아가씨…… 아니, 안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왜 송아지 요리를 마다하시고 샌드위치를 달라고 하신 거예요? 저희는 아가씨께서 벨담의 저택에 처음 오신 거니까 당연히 촛대 놓을 자리만 빼고 식탁 위에 빈 곳이 없게 하라고 하실 줄 알았어요. 그래서 단단히 긴장하고 있었거든요.”
“설마 나 혼자인데 그럴 리야 있겠어요?”
“그래도요. 안나는 이제 가주가 되신 거잖아요. 보통 가주 자리를 물려받은 아가씨나 도련님들은 연회를 열라고 하시거든요.”
연회라는 말을 들은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저 혼자 연회를 열어도 될 뻔했네요. 나 빼고 다 죽었으니까. 그건 정말 축하할 만한 일이거든요. 예전 같았다면 더 그랬겠죠.”
“저, 그런데…… 선대 백작님이 안나를 때렸다는 게 정말이에요? 원래 백작님은 그런 분이 아니신 걸로 알고 있었거든요. 그분은 자식들을 어여삐 여기셨어요. 특히 엘리자베트 아가씨는 더욱이요. 절대 맨발로는 걷지 못하게 하실 정도였다니까요.”
“그거야 요한 마이어한테 팔아넘겨야 하니까 그랬겠죠.”
내가 정제되지 않은 말을 그대로 내뱉자 놀란 아델레가 순간적으로 입을 가리며 주변 눈치를 보았다. 백작가를 모셔 왔던 사용인으로서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괜찮아요, 이제 가문의 일원은 나밖에 없잖아요.”
“그래도 저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단 말이에요! 아직도 백작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게 실감되지 않는다고요. 저희 등 뒤에서 다 지켜보고 계실 것 같고…….”
“하지만 저는 진실을 말한 거예요. 그 작자에게 딸이란 존재는 공작가에 바쳐야 할 진상품이나 다름없었을 거예요. 적어도 저는 그랬거든요. 엘리자베트 양이 괜히 다른 남자 손 잡고 도망쳤겠어요?”
“그건 그렇지만…….”
몇 개 먹지도 않았는데 벌써 포만감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성의를 무시하기가 싫어서 최대한 남기지 않으려 식탁 위로 손을 뻗었다.
다이닝룸에 앉아 있으니까 옛날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드레스를 입고 걸으며 치맛자락을 밟지 않으려고 용을 쓰는 단계였는데, 온갖 식기의 종류와 용도 그리고 음식을 먹는 순서까지 외워야만 했었다.
그리고 만약 내가 배운 대로 행동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내가 왜 샌드위치를 달라고 했는지 알아요?”
“아뇨.”
“샌드위치는 식기를 쓸 필요가 없잖아요. 그냥 손으로 집어 먹어도 되니까 그런 거예요. 난 그런 음식들이 좋아요. 거추장스럽지 않은 음식들이요.”
“식기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이 있으시군요.”
“포크 하나 잘못 집었다가는 그대로 뺨을 맞았어요. 그때 먹었던 음식들은 그 맛이 하나도 기억나질 않아요. 올바른 식기가 뭔지 생각하느라 바빴거든요. 매일매일 긴장 속에 식사하느라 맛을 음미할 새도 없었고요.”
“어쩌면 그럴 수가. 그때 몇 살이셨어요?”
“난 그때 어렸어요. 열다섯인가, 그쯤 됐었어요. 식사 예절을 처음 배우기에는 많은 나이긴 했죠, 사실. 하지만 어쩌겠어요? 난 그동안 다락방에 갇혀 살아야 했다고요. 내가 포크와 나이프에 대해 뭘 알았겠어요?”
사실은 이 만찬장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속이 조금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물론 이젠 아무도 날 때릴 수 없지만, 익숙한 공간에서 우러나오는 잔상은 아주 잠깐이나마 옛 시절의 나를 이 자리에 되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