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66화 (66/93)
  • <66화>

    10. 라디오 방송

    루이제는 궁금했다.

    왜 상부에선 그녀에게 자일스 헤센을 맡겼는가?

    이 일을 맡을 수 있는 장교들은 많았다. 자일스와 아무런 인연도 가지지 않은 인물을 택할 수 있었을 텐데, 특이하게도 그들은 사관 학교 시절 자일스 헤센과 친한 동기였던 루이제를 택했다.

    물론 어린 시절에 자일스와 조금 친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빛바랜 우정이 무엇을 바꿔 놓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루이제는 간혹 생각하곤 했다. 그녀만이 가질 수 있는 이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어쩌면 자일스가 루이제 앞에서는 경계심을 어느 정도 풀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상부에서는 다트 판의 중심을 정확하게 맞힌 셈이다.

    다른 군인들은 루이제를 깍듯하게 대했지만, 자일스 헤센에게 그녀는 루이제 고틀리프 소령이 아닌 그냥 사관 학교 동기 루이제였다. 벨담군에 더 이상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그에게는 루이제의 가슴팍에 달린 계급장조차 별 의미를 행사하지 못했다.

    정보국을 통해 자일스를 감시하고, 언론을 통해 그에 대한 이야기들을 실컷 떠들어 댔지만 사실 상부조차도 자일스를 잘 몰랐다.

    그들은 자일스가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몰라 노심초사했다. 마음만 먹으면 그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자일스였다. 그는 자신이 아끼던 누이조차도 제 손으로 죽인 사내였으니까.

    그들은 자일스가 자살 시도를 하거나 감시병을 해치는 등 위험한 행동을 저지르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자일스를 적당히 달래서 얌전히 만들 수 있는지 아무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야기로는 자주 접해 들었으나 그를 직접 대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근소하게나마 자일스 헤센을 다루는 법을 알고 있는 군인이 바로 그녀라는 결론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자일스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모르는 건 루이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만나고 거의 7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게다가 자일스가 비열한 인간 말종이라는 사실을 어찌나 주입해 댔는지 루이제는 원래 자일스가 어떤 인간이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자일스가 그녀의 눈앞에 버젓이 자리 잡은 지금은 슬슬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확실한 건 그는 악마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루이제의 눈에 비치는 건 그냥 자일스 헤센이었다. 온갖 불명예로 뒤덮여 제 색깔을 잃어버린 사내. 그는 시한폭탄 같지도 않았고 분노에 차 있지도 않았다. 루이제가 딱히 뭘 하지 않아도 자일스는 얌전하게 굴었다.

    단, 안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를 제외하고서.

    루이제는 오늘도 자일스와 함께 식사를 했다. 굳이 그와 식사 시간을 가지는 이유는 간단했다. 우선 루이제에게는 자일스의 건강을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식사를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게 되곤 하니까.

    자일스는 양 손목에 무거운 수갑을 찬 채로 영혼 없는 나이프질을 하고 있었다. 좋은 음식을 갖다주는데도 그는 마치 스스로의 생명을 연장하는 행위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 소극적이었다.

    “입맛이 없어?”

    그녀가 물었다. 자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식사 시간이 그를 진절머리 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뭐가 문제인지 말해 봐.”

    “아무것도 아니야.”

    “만일 몸이 안 좋거나 하면 나에게 말해야 해. 의료진을 보내 줄 테니까.”

    “그럴 필요 없어.”

    “안나가 보고 싶어서 그래?”

    그를 슬며시 자극하자 자일스가 움직임을 일순 멈추었다. 그러나 그는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런 말은 하지 마.”

    “왜, 너는 그녀를 사랑하잖아. 지금 안나가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아?”

    “안전하다는 것만 보장되면 그걸로 충분해.”

    “정말 그럴까? 그래도 소식 정도는 듣고 싶을 것 같은데. 예를 들면 말이야, 내가 너와 대면할 때마다 몇 가지를 알려 주는 거지. 안나가 다른 남자를 만나기 시작했다거나, 뭐 그런 거.”

    예민한 곳을 긁어 내리자 자일스에게서 바로 반응이 돌아왔다. 그는 손을 멈추고 루이제를 노려보았다. 화가 난 기색이었다.

    “그런 말을 하는 저의가 대체 뭐지?”

    “그냥 예를 든 것뿐이야.”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내가 상관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진짜로 안나가 다른 놈을 만나도 상관없다는 거야?”

    “…….”

    그는 차마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체념한 얼굴로 다시 접시 위를 내려다보았다. 루이제는 그가 동요한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어차피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야. 죽은 사람보단 산 사람이 낫겠지. 안나를 위해서도.”

    “말 나온 김에 말이야, 내가 어제 안나를 살피러 방문했는데 뭘 봤는지 알아? 방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더라고. 분명 안나가 아픈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문을 따고 들어갔는데 새 애인 밑에 깔려서 소리를 지르고 있더라. 물론 좋은 쪽으로 말이야. 기술이 너보다 훨씬 좋다던데.”

    자일스는 결국 식기를 내려놓았다. 루이제는 웃는 얼굴 뒤로 은밀하게 그의 행동을 관찰했다. 그녀는 자일스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었다. 지금 그가 얌전하게 구는 건 본색을 숨기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자일스는 폭력에 절여져 살아온 사내였다. 전쟁을 겪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랬지만 전시에 내던져진 군인들과 그 사이에도 차이점은 있었다.

    자일스는 폭력의 집행자였다. 칼을 어떻게 휘둘러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묶어 놓고 마음껏 고문하는 게 그가 하던 일 아니던가.

    그는 웃으며 악수를 나누던 사람들을 죽였다. 가장 친했던 친구들을 죽이고 심지어 가족의 몸에 칼을 꽂아 넣기까지 했다. 그런 짓을 하면서도 용케 정신을 제대로 붙들고 있었다.

    루이제는 신문에서 떠드는 것처럼 그의 내면에 어두운 본성이 자리하고 있을 거라 믿었다.

    적어도 사관 학교를 같이 다니던 생도라면 그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다. 자일스는 변했다. 더 이상 그녀가 알던 자일스 헤센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가 스스로 증명하는 꼴을 보고 싶었다.

    만약 그가 그래 준다면, 루이제는 그녀의 머릿속에 약점처럼 잔존하는 옛 시절의 잔상을 완전히 지워 버릴 수 있으리라.

    화를 내, 자일스. 식탁을 뒤집어엎고 달려들어 멱살을 잡아. 주먹을 휘둘러도 좋고. 그동안 네가 많이 변했다는 사실을 내게 직접 보여 줘.

    “너 같은 건 금방 잊어버렸대.”

    “그만.”

    “좋다고 막 소리를 지르더라니까.”

    “루이제, 그만해.”

    이제 그는 고개를 돌리고 한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고 있었다. 루이제는 자일스가 애써 화를 참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얼굴에서 분노나 증오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도 없었다.

    “다음부터는 그녀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줘.”

    “할 말이 그게 다야?”

    “너는 내가 어떤 반응을 하길 원하는 거지? 안나는 자기 삶을 살고 있을 뿐이야. 내가 말했듯이, 나는 곧 죽을 사람이고. 안나의 인생에서 빠져 주는 게 내 일이야. 나랑 더는 엮이지 않는 게 안나에게도 좋을 거야.”

    이유가 무엇일까? 곧 사형을 당할 거라는 사실이 그를 초연하게 만든 걸까?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루이제는 여전히 그를 의심했다. 그는 이렇게 이성적이고 조용한 인물이 아니다. 그래선 안 되는 일이다.

    지금 루이제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모두가 증오하는 자일스 헤센과 너무나도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래서 루이제는 자일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속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건 아주 불쾌한 감정이었다. 이 감정을 어떻게든 해소해야만 했다.

    “안나는 널 버렸어.”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너는 안나를 위해 네 목숨을 바쳤는데 정작 그녀는 다른 남자랑 뒹굴기 시작했어.”

    “그러라고 해.”

    “화가 안 나? 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거지? 이런 식으로 날 계속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자일스 헤센. 평소엔 이런 식으로 굴지 않잖아. 내 앞에서 순한 양인 척해 봤자 네가 받을 판결을 바꿀 수는 없어.”

    “내가 네 기대를 저버렸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오히려 자일스는 이제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있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건가? 루이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살인자가 맞아. 내 한 몸 살리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 입스윈 사람도 아닌 주제에 말이야. 증오받아 마땅한 사람이니까 굳이 근거를 찾으려고 할 필요 없어. 내가 네게 행패를 부리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혐오스러운 짓을 많이 했어. 너도 그걸 알잖아. 내가 벨담으로 넘어온 건 안나를 살리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이제 멈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어.”

    “멈춘다니, 뭘?”

    “그냥…… 언제부턴가 내가 멀쩡히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견딜 수 없어지기 시작했거든.”

    자일스는 웃었지만 루이제에게 그건 스스로의 진짜 표정을 숨기기 위해 급하게 쓴 가면처럼 느껴졌다. 그는 루이제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있었다.

    “내가 하는 일들은 항상 재앙이 되어 나타나. 누군가를 돕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어. 아무리 옳은 일을 하려고 발버둥을 쳐 봐도 내 오염된 본질을 숨길 수는 없는 모양이지. 안나는 나 때문에 크게 울었어. 상처 받고 스스로를 학대했지. 그건 다 나 때문이었고. 내가 그녀를 구렁텅이 속에 떠밀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모든 걸 그만두고 싶어졌어. 이젠 인정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지. 내가 도망치면 도망칠수록, 내가 청산하지 못한 죄가 주변을 해칠 뿐이라는 걸.”

    “그래서 자살하러 왔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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