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그럼 자일스 헤센은요? 그 사람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했을까요?”
자일스. 그의 이름을 떠올리자 유쾌한 순간은 지나가고 다시 내 앞에 닥친 현실이 떠올랐다. 나는 사형대에 오른 그를 상상하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뭐가 알고 싶은데요?”
“그냥, 세간에서 그 남자에 대해 떠드는 말들이 많잖아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온갖 극악무도한 짓들은 다 했다고 하던데. 안나 얘기를 들으니까 그것도 전부 다 옳은 얘기는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물론 그가 나쁜 짓을 했다는 건 진실이겠지요! 그는 사람을 죽였으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일스는 사람들을 죽이고 고문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벌을 받아 마땅했다. 단지 나까지 그가 죽는 모습을 편안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을 뿐이었다.
“아가씨는, 아니, 안나는 정말 그를 사랑하세요?”
누군가는 신중하게 답하라고 조언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진실을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 않은 척 에둘러 말하기도 싫었다. 그가 죄를 지었든 짓지 않았든,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들만큼은 떳떳하고 결백했다.
“나는 그를 사랑해요. 물론 그 때문에 악몽에 시달린 적도 있었어요. 죽을 만큼 운 적도 있었고요. 하지만 그에 대한 마음이 변하질 않는 걸 보면 내가 그를 사랑하나 봐요. 그래서 사랑이라고 하는 걸 수도 있겠죠. 쉽게 변하기에는 너무 깊은 감정이니까.”
“하지만…… 자일스 헤센은 입스윈에 있던 귀족들을 전부 다 죽였어요. 어쩌면, 안나도 죽이려 했을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자일스는 나를 죽이지 않았어요. 죽일 수 있었는데도 살렸어요. 자기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는데도.”
아델레의 기색을 살펴보니 이 또한 처음 듣는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이것도 신문에 안 나온 이야기죠?”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다른 귀족들은 전부 죽이고 안나만 살려 주다니…… 혹시 두 분이 원래 아는 사이였나요?”
“아니에요. 난 그날 자일스를 처음 봤어요.”
“그럼 대체 어떻게…….”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는…… 내가 살렸으니까. 그 사실 하나만으로 넌 내게 유일무이한 단 한 사람이야. 너는 내가 본래 어떤 사람인지 잊게 해 주니까. 네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나를 둘러싼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너는…… 내가 유일하게 내린 옳은 선택이었으니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나는 이내 머릿속에서 그의 모습이 흐려질 즈음 말을 꺼냈다.
“제 생각엔 그에게도 붙잡아야 할 뭔가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변덕을 부린 거겠죠.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걸 스스로도 느낀 거예요.”
나도 그가 무슨 생각으로 나를 살려 주기로 결정한 건지 정확히 아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분명히 변덕이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설명할 길이 없었다.
다만 그는 남은 삶을 한순간 부렸던 변덕에 매달려 살게 되었다. 자일스도 나를 살렸던 그 순간엔 스스로가 그리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
그는 스스로가 내렸던 선택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아델레는 내가 사용할 방을 보여 주었다. 내 감상을 말하자면, 정말이지 아름다운 방이었지만 그만큼 무식하게 큰 방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이제는 내가 비스마르 백작 가문의 가주로서 제일 좋은 방을 가지게 된 것이 틀림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차마 관리되지 못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백작 부부가 사용하던 방은 아니죠?”
다행히 아델레는 고개를 저었다.
“그분들께서 쓰셨던 방은 따로 있어요. 꼭대기 층에 있는 방이지요. 지금은 모든 가구를 치우고 걸어 잠가 놓았어요.”
그래, 설마하니 사용인들이 내게 죽어 나자빠진 사람들이 쓰던 방을 주지는 않았을 거다. 만약 이곳이 백작 부부가 쓰던 방이 맞다고 했다면 나는 당장 방을 옮겨 달라고 할 셈이었다. 그것만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내가 입스윈에서 짐을 거의 들고 오지 않은 바람에 새 옷가지들이 커다란 옷장을 차지하고 있었다. 백작이 내게 그랬듯이 불편할 정도로 화려한 드레스를 들이밀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이 옷들은 입을 만해 보였다.
“식사는 무엇으로 하시겠어요? 메인 디시로 송아지 요리와 구운 가리비를 내오라고 할까요?”
“아뇨.”
내가 생각해도 이건 너무 단칼의 거절이었다. 무어라 변명할 말을 찾고 있는데 아델레가 다시 물어 왔다.
“그럼 소스를 곁들인 닭고기 요리를…….”
“간단한 걸로도 괜찮아요. 계란이 든 샌드위치가 좋겠어요.”
“샌드위치요?”
“네.”
아델레는 내게 피크닉 계획이라도 있는지 묻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얌전히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알겠어요. 그렇게 전할게요. 계란이 든 샌드위치 말이죠.”
그녀는 창문을 열어 공기가 통하게 한 뒤 주방으로 떠났다. 이제 커다란 방 안에 남은 건 나 혼자였다.
나는 역시나 사치스러울 정도로 푹신한 침대 시트 위에 앉아서―구름 위에 앉은 기분이었다―바깥에서 들려오는 새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한편으론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이 커다란 저택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졌던 모든 재산이 내 것이 되었다는 게 말이다. 심지어 나는 가문의 일원조차 아니었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백작의 딸이 맞았지만, 가족보다는 재산의 의미에 더 가까웠다. 제 몫을 다하기 위해 거두어진 말 잘 듣는 인형이 바로 나였다.
이제 나를 핍박하고 괴롭히던 가족들은 전부 죽었다. 백작가의 가주는 나다. 하지만 나는 가주가 되기를 바란 적이 없었다. 자일스가 말했던 대로, 나는 평범한 피아니스트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많은 재산을 상속받은 게 불만스럽다는 건 아니지만…….
화려하고 커다란 방을 혼자 독차지하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편이 텅 빈 듯 공허하게 느껴지는 건 어째서였을까?
나는 외톨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방이 넓다는 사실이 더욱 그런 기분을 부추겼다. 마치 나무판자에 매달려 망망대해 위에 홀로 떠 있는 기분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곁에 누군가가 있었는데 이젠 아무도 없다. 나는 새로운 세상에 혼자 내던져졌고, 그만큼 외로웠다.
‘그들이 널 지켜 줄 거야.’ 자일스는 그렇게 믿고 나를 벨담으로 내보냈다. 하지만 그가 상상한 안전한 미래라는 게 과연 이런 것이었을까?
나는 가방 안에서 신문 뭉치를 꺼내 들었다. 식사 시간이 될 때까지는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자일스와 내가 등장하는 신문들을 침대 위에 펼쳐 놓고서 그것들을 꼼꼼하게 읽었다.
「살인자 헤센이 행복한 커플을 비극으로 갈라놓다 ― 엘로이즈 비스마르 백작 영애는 요한 마이어 공작과 약혼한 사이로, 곧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으나 자일스 헤센의 극악무도한 동족 학살이 둘의 사랑을 비참하게 짓밟은 것으로 알려졌다…….」
개소리. 애초에 나는 그의 약혼녀조차 아니었다. 약혼녀를 대체할 대용품에 불과했지. 알고도 모른 척한 건지 아니면 정말 몰랐던 건지, 기사에는 그 부분만 쏙 빠져 있었다. 게다가 혁명의 바람이 불기도 전에 혼담을 파투낸 건 오히려 나였다.
나에 대한 기사들은 대부분이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복하게 자란 순진하고 선량했던 소녀’ — 난 유복하게 자라지도 않았고 순진해 빠졌던 건 맞지만 선량한 건 절대 아니었다.
‘백작 부인이 난산으로 어렵게 얻은 귀한 막내딸’ ― 내 어머니는 하녀였다. 아마도 백작이 어머니를 강간했을 것이다.
‘가족을 사랑하는’ ― 단 한 순간도 그들을 사랑한 적 없다.
‘몸이 아파서 따뜻하게 감싸 안아 줄 남편이 나타나기를 바랐던 소녀’ ― 대체 둘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거지?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나에 대해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내 오른쪽 귀 밑에 반점이 있다는 사실부터 긴장할 때면 검지손가락을 까닥이는 습관이 있다는 것까지.
조금 더 저질스런 황색신문은 자일스가 내 어떤 신체적 특징을 보고 나를 쫓아다녔을지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었다. 즉, 대놓고 내 몸을 파헤쳤다는 거다.
자일스는 벨담이 나를 보호해 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는 보호의 대상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오히려 나는 익숙한 기시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나를 결백한 피해자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내 손톱마저도 이용하고자 하는 악의가 느껴졌다.
아렌트가 왜 저택 바깥으로 나가지 말라고 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나에 대해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 지독한 관심은 아직까지도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나는 이곳에서 자일스와 똑같은 신세였다.
사형 판결을 받을 일도 없고, 증오의 대상도 아니지만 씹고 뜯기 아주 좋은 추잉 검이 아닌가.
피로감이 몰려왔다. 나는 자일스에 대한 기사로 눈길을 돌렸다.
그들이 나를 해부한 개구리처럼 신문 위에 박제했다면, 자일스는 용광로 같은 존재였다. 끝없이 타들어 가는 그는 온갖 추잡하고 더러운 감정들이 모이는 집합소였다.
‘살아남기 위해 국가를 배신한 반역자’.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모두가 똑같다 ― 다만 대부분은 살인을 저지르지 않을 뿐’. ‘입스윈 혁명군에 목숨을 구걸한 자일스 헤센’. ‘헤픈 창부나 다름없는 남자’. ‘그에게 중요한 가치는 오직 생존뿐이었다’…….
개중에도 내 눈길을 끈 헤드라인이 있었다. 큼지막한 볼드체로 인쇄된 헤드라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자일스 헤센이 자진해서 귀환하다
—죽음을 피해 달아났던 남자는 왜 사형대로 올라왔나?」
나는 본문을 읽지 않았다. 다만 아주 당연한 사실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사람처럼 충격을 받았을 뿐이었다.
자일스는 죽음을 두려워했다. 살아남기 위해 국가의 배신자가 된 것도 전부 사실이었다. 그는 온 국민의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 죽음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그가 제 발로 기요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던 남자가 삶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나는 그 이유를 알았다. 그건 전부 나 때문이었다. 그는 나 때문에 죽음을 받아들였다.
자일스가 나를 안전 가옥에 가두었던 때를 떠올렸다. 창문에 판자를 덧대어 못질하고,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밀실에 갇힌 채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이 나를 절망스럽게 했었다.
나는 그가 나를 물건 취급한다고 믿었다. 잃어버리기 싫은 장신구를 대하듯 내 의사도 묻지 않고 나를 꽁꽁 숨겨 두기로 작정했다고 말이다.
나는 물건 취급 받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자일스까지 나를 그리 취급했다고 생각하니 끝이 없는 절벽 밑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던 거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모든 결정권의 중심이 자일스에게 쏠려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권력이 있었고, 나는 쫓기는 입장이었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나를 시궁창 속으로 내던질 수 있는 게 바로 그였다.
그러나 나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주도권을 쥔 쪽은 자일스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가 나를 살리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저울의 기울기는 반대로 기울었다.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건 바로 나였다.
나는 자일스를 살게 만들 수도, 혹은 죽게 만들 수도 있는 존재였던 거다.
최초의 순간에도 그랬고,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