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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64화 (64/93)
  • <64화>

    운전수는 이 지긋지긋한 기자들 틈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급하지만 능숙하게 엑셀을 밟았다. 순식간에 나를 둘러쌌던 기자들과 병원의 모습이 백미러 너머로 멀어져 갔다.

    우리는 벨담의 수도, 홀슈타인의 시내를 가로질렀다. 나는 생전 처음 보는 모국의 풍경을 차창 너머로 구경했다.

    자일스가 말한 대로 입스윈과 크게 다를 것 없는 풍경이었다. 커다란 성당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건물들과 광장이 분포해 있었다.

    사람들은 언제 커다란 전쟁을 겪었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길가를 걸었다. 전쟁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어서 나는 의아해졌다.

    “홀슈타인은 많은 피해를 입지 않았나 봐요.”

    “수도는 마지막 보루여야 했으니까요. 벨담에서는 홀슈타인을 지키기 위해 아주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 대가로 일부 도시들을 어느 정도 희생해야 했죠.”

    “살아남지 못한 도시들이 많은가요?”

    “홀슈타인을 비롯한 인접 지역에 모여든 피난민들이 아직 돌아가지 못했을 정도입니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벨담의 상황은 내 생각보다 더 처참한 게 분명했다. 그냥 전쟁도 아니고 세계 대전이라고 명명한 대전쟁에서 패배했으니 놀랄 만한 일도 아니기는 했다.

    괜히 자일스 헤센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어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기 급급한 게 아니었다. 패전국이 치러야 할 대가는 상당했다. 만일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하나둘씩 국가를 향해 손가락을 돌리기 시작한다면 몰락하는 건 벨담 귀족만이 아니게 될지도 몰랐다.

    파괴된 건물들과 사람들의 삶을 회복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동안 분노를 쏟아 낼 대상은 반드시 필요했을 거다.

    지금쯤 자일스는 뭘 하고 있을까? 그도 수도에 있을까? 혹시 지금쯤, 철창 안에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지는 않을까?

    사용인들이 그런 걸 알 리 없었다. 뭔가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렌트뿐인데, 내가 물어본다고 그가 흔쾌히 대답해 줄지도 미지수였다.

    침묵을 견딜 수 없었던 내가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요제프입니다.”

    “요제프, 내 아버지가 벨담에 자주 들르는 편이었나요?”

    “전쟁이 나기 전에는 몇 번씩 방문하셨지만, 대부분 사업차 방문이셨습니다. 그분은 벨담에 있는 본가보다 입스윈에 머무르는 것을 더욱 선호하셨습니다.”

    “그는 벨담의 귀족인데, 왜 남의 땅에 눌러앉은 거죠?”

    “제가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아마 많은 회사와 공장들이 입스윈으로 옮겨 가던 시절이라 그곳에 머무르시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벨담에 좀 더 자주 들렀다면 좋을 뻔했어요. 그럼 나도 며칠 정도는 쉴 수 있었을 텐데.”

    요제프는 내 말을 알아먹지 못한 기색이었다. 나는 그를 위해 친절히 덧붙여 주었다.

    “아버지는 나를 죽어라 때렸거든요. 나에게도 쉴 시간 정도는 필요했어요.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지만.”

    “어…….”

    내 말을 들은 운전수와 요제프 모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몰라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백작이 거느렸던 사용인들 앞에서 그의 치부를 까발리는 일이 퍽 즐거웠던 내가 말했다.

    “왜요, 이런 건 신문에 실려 있지 않았나요?”

    “그게…… 저희는 줄곧 벨담에서 지내 왔기 때문에, 입스윈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도 나에 대해선 다 알고 있을 거 아니에요. 간호사가 내게 날짜 지난 신문을 건네줘서 읽어 봤는데, 대놓고 내 인생사를 떠벌리고 다니던데요. 설마 안 읽은 거예요?”

    요제프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아마 내 말을 무시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로 대답할 말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나는 불쌍한 사용인에게 더 이상 못되게 굴고 싶지 않아서 이만 입을 다물었다. 하긴, 그가 백작이랑 무슨 상관인가. 그는 그저 피고용인일 뿐이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저희는 아가씨께서 돌아오신 걸 진심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아시다시피, 저희가 관리하던 저택의 주인이셨던 분들께서 대부분 돌아가셨으니까요. 만약 마땅한 상속인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저택은 경매에 붙여졌을 겁니다. 저희는 일자리를 잃고 말았겠지요.”

    “그러고 보니 그동안 급여는 누가 주고 있었던 거예요?”

    “사실은 그 일 때문에 저희가 소송을 걸었던 바가 있습니다. 지금은 백작님이 남겨 두신 재산에서 차감되고 있습니다.”

    “잘된 일이네요.”

    내게 상속된 재산이 얼마일지 따위는 사실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아마 생각보다 많지도 않을 것이다.

    비스마르 백작가는 가세가 기울어 가는 귀족 가문이었다. 그래서 마이어 공작가와의 혼약을 어떻게든 이어 가려 안달복달했던 거다. 또한 백작은 가문을 되살릴 사업거리를 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는 했다.

    그래도 그 미친 작자가 저승까지 가져가지 못한 재산은 이제 내 것이었다. 나는 코웃음을 흘렸다. 보라, 결국 나는 승리했다.

    나를 말려 죽이려 했던 작자들은 시체가 되어 버린 반면 나는 살아남아서 그들의 전유물을 모두 빼앗았다. 그들이 내게서 빼앗아 간 게 얼만지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승용차는 어느덧 시내를 벗어나 달리고 있었다. 요제프는 비록 백작이 도시 내의 타운하우스를 가지고 있었지만, 언론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내 상황을 고려해 외곽 지역에 숨겨진 다른 저택으로 안내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울창한 숲을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그가 말했다.

    “다 왔습니다.”

    나는 몸을 기울여 앞을 보았다. 솔즈부르의 사유지에 지어진 저택과 비슷한 고풍스러운 저택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승용차가 진입을 시도하자 누군가가 거대한 철문을 열었다. 이제 우리는 저택 내부에 들어와 있었다.

    주인이 방문하지 않은 지 아주 오래된 곳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누군가 이곳에 눌러살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저택이었다.

    잘 가꾸어진 정원과 사치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황갈색 건물은 백작 가문이 소유했던 재산이라 할 만했다. 나는 다시 입스윈에 돌아온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이곳에 오니까 백작의 취향이 얼마나 확고했는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나는 승용차에서 내렸다. 평범한 블라우스와 스커트 차림을 하고서 귀족 아가씨 대접을 받으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몇몇 사용인들이 바깥으로 나와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요제프는 나를 저택 안쪽으로 에스코트했다. 두 계단으로 이어지는 메인 홀과 크리스털 샹들리에까지 모든 것이 솔즈부르의 저택과 유사했다. 비록 백작은 죽어 없어졌다지만…… 내 기분은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피곤하실 테니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이르겠습니다.”

    “괜찮아요. 목욕 정도는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하녀들이 도와드릴 텐데요.”

    나 또한 엘로이즈로 살던 시절 하녀들로부터 목욕 시중을 받았던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난 더 이상 귀족 아가씨가 아니었다. 그냥 혈족으로써 재산을 물려받은 상속인일 뿐이지.

    그 지독한 비스마르 일가를 조금이라도 흉내 내다가는 구역질이 먼저 올라올 게 틀림없었다.

    “정말 괜찮아요. 내가 알아서 할게요.”

    요제프는 내게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써야 할 욕실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만 알려 주고는 떠났다.

    나는 욕실 안을 둘러보았다. 요제프는 백작 부인이 마지막으로 사용한 이후 아무도 쓰지 않았다고 했지만, 사용인들이 꾸준히 관리한 덕인지 바로 어제도 이곳에서 목욕을 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나는 옷을 벗기 전에 욕조에 따뜻한 물부터 받았다. 손을 넣어 가며 온도를 재고 있는데, 누군가 욕실 문을 두드렸다.

    “뭐죠?”

    “아가씨, 정말 시중이 필요 없으세요?”

    듣자 하니 하녀가 올라온 것 같았다. 나는 곤란함에 뒷머리를 긁적이며 문을 열었다. 키가 작달막한 갈색 머리 하녀가 옷가지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가 알아서 할 수 있다고 요제프한테 말했어요.”

    “아니, 그게. 믿기지가 않아서요. 혹시라도 요제프가 제게 잘못 전달한 거면 어떡해요? 그러니까 제 말은, 백작 부인이나 엘리자베트 아가씨는 절대 시중이 필요 없다고 하신 적이 없었거든요.”

    “그 사람들은 귀족이니까 그렇겠죠.”

    하녀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아…… 모든 걸 처음부터 설명해야 하는 이 기분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나는 우선 하녀를 욕실로 들여보냈다.

    이름 모를 하녀는 ‘역시 내가 옳을 줄 알았지’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목욕 시중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 옷을 벗기려 들어서 나는 정중하게 그녀를 물렸다.

    “옷은 제가 벗을게요.”

    “하지만…….”

    “저는 지금껏 당신이 경험해 봤던 귀족 무리랑은 좀 달라요. 성인이라면 옷 정도는 혼자 벗을 줄 알아야죠.”

    그녀는 뭘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 보였다. 고용주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난생처음 목격한다는 식이었다.

    “이름이 뭐예요?”

    “아델레예요.”

    “아델레, 그 사람들 옷을 하나하나 입혀 주면서 그런 생각 안 했나요? 지금이 어느 땐데 아직도 과거 흉내를 내면서, 높으신 귀족 각하 행세를 하냔 말이에요. 시대가 변했잖아요. 이제 진짜 권력을 쥔 건 시민들인데. 옷을 입히고 벗겨 달라니, 현실 부정도 정도껏 해야지. 안 그래요?”

    “진심으로 하는 말씀은 아니시죠?”

    “진심인데요. 내 생각에 백작 부인은 다시 요람에 들어가고 싶었나 봐요.”

    아델레는 몇 번 눈을 깜박이더니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즐겁게 웃어서 내가 다 놀랄 지경이었다.

    “세상에, 정말 한 가문에서 같이 자란 백작 영애님이 맞으세요? 다른 사람으로 바꿔치기 된 게 아니고?”

    “솔직히 말하자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죠. 저는 하녀의 딸이기도 하거든요.”

    “뭐라고요?”

    나는 몸을 씻는 내내 아델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내가 사생아라는 사실부터 나이를 먹기 전까지는 아버지의 얼굴도 보지 못했으며 도망친 엘리자베트의 대용품으로 길러졌다는 사실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 겪었던 모든 일들을 말했다. 그러나 자일스가 등장하는 부분은 슬쩍 뺐다. 아델레가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어서였다.

    아델레는 욕조 옆에 앉은 채 내 이야기에 흠뻑 빠져 있었다.

    “그게 사실이에요? 엘리자베트 아가씨가 도망쳤다는 게?”

    “마이어 공작이랑 결혼하기 싫었대요.”

    “그럼 도대체 누구랑 결혼해요? 공작 정도나 되는 남자를 내팽개칠 정도면?”

    “어느 남작가의 셋째 아들이랑…….”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숨을 들이켜며 입을 가렸다.

    “말도 안 돼!”

    “말 될걸요? 그 새끼가 쓰레기 같은 짓을 했으니까 마음속에서 내친 거겠죠. 저도 당했는걸요. 그 남자는 대놓고 제 옷을 벗기고 가슴을 만지려고 했어요.”

    “여느 남자들은 다 그래요.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지고 싶어 하지 않는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까 신분제가 무너진 거죠. 허영심만 가득 찼지 여느 사람들이랑 다를 게 뭐냔 말이에요. 아랫도리 휘두르고 싶어 하는 것도 전혀 다를 바가 없던데.”

    아델레는 내 입에서 그런 저속한 표현이 쏟아져 나오자 놀라면서도 손뼉을 치면서 웃어 댔다.

    “아가씨!”

    “내 이름은 안나예요. 아가씨가 아니라.”

    “저는 아가씨를 엘로이즈 아가씨라고 불러야 해요.”

    “고용주는 제가 아니던가요? 그냥 안나라고 불러요. 상관없으니까. 전 귀족 흉내 낼 생각 따윈 추호도 없어요.”

    “정말 그래도 돼요?”

    “저도 당신을 그냥 아델레라고 부르잖아요.”

    “하지만…….”

    아델레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내가 내려다봐야 할 하녀가 아니라 동등한 친구나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나는 시중 들 하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머리를 빗는 것도, 옷을 입는 것도 전부 다 혼자서 할 수 있었으니까.

    “믿기지가 않아요.”

    “뭐가요?”

    “아가씨, 아니, 안나가 해 준 이야기들이 신문에서 읽은 거랑 너무나도 달라서요. 신문에서는 안나가 백작 가문에서 행복하게 지내던 평범한 아가씨였다고 했거든요.”

    “그럼 그 사람들이 거짓말을 지어낸 거예요.”

    “신문이 왜 거짓말을 지어내요?”

    “글쎄요. 결국 돈이 되는 건 담백한 진실보다 자극적인 거짓말이니까 그렇겠죠.”

    “그럼 앞으론 신문도 못 믿겠네요?”

    “그냥 모든 걸 곧이곧대로 믿지만 말아요.”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자일스와 나에 대한 기사들을 읽고, 그 안에 온전한 진실의 비중이 얼마 정도 되는지 가늠하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이 진실이든 거짓말이든 그건 중요치 않다. 진실은 너무나도 주관적인 것이라서, 아무리 거짓말이라도 사람들이 그걸 진실이라고 믿고 싶어 하면 그것이 바로 진실이 되었다.

    명백한 진실이 있다 한들, 아무도 듣지 않으려 하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

    그래서 진실을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항상 목이 아프다. 외면하는 세상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야만 하니까.

    그렇지만 나는 충분히 그럴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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