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이건 뭐지?”
“뭐긴 뭐야, 신문 기사지.”
“안나는 벨담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어. 그녀는 평범한 피아니스트일 뿐이야.”
“네가 그리도 열렬하게 쫓아다니지만 않았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야. 자일스 헤센의 사랑을 받는 여자를 세상이 가만뒀을 것 같아?”
“돌을 맞아야 할 사람은 나로 충분한 것 아니었나?”
“안나를 사랑하기는 하는구나. 너를 깎아내리는 기사에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으면서, 안나의 이름이 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화를 내다니 말이야.”
그녀는 자일스가 실험 대상이라도 되는 듯 그의 반응 하나하나를 흥미로워했다. 이미 사관 학교 시절에 사귀었던 동기로서의 자일스는 머릿속에서 퇴색된 지 오래였다. 오직 국가에서 언론을 통해 주입한 악마로서의 그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 루이제는 한 여자의 안위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자일스가 정말 볼만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언론에서 물어뜯어 대던 것과는 달리, 정말 평범한 사람처럼 보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괜찮아. 걱정할 것 없어. 벨담은 안나를 미워하지 않아. 다만 그녀에게 지대한 궁금증을 갖게 된 것뿐이지.”
“신문에서 안나의 삶을 하나하나 해부하고 있어. 나더러 이걸 괜찮다고 생각하라는 건가?”
자일스가 화를 내며 벌떡 몸을 일으키자 구석에 서 있던 군인이 잽싸게 다가와 그의 머리에 총을 들이밀었다. 그러나 자일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분명 안나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서라면 원하던 자유를 찾으리라 생각했지만 그의 오판이었다.
안나는 이미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멋대로 평가하거나 동정할 것이다. 혹은,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현상들은 쉬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루이제는 감흥 없는 눈길로 자일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자리에 앉아.”
그는 마지못해 루이제의 말에 따랐다. 안나를 또 다른 종류의 지옥에 데려왔다는 사실이 그를 다시 한번 무너뜨렸다.
자일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부탁했다.
“안나가 조용히 살도록 내버려 둬.”
“나에게 부탁해 봤자 아무 소용없어. 나는 일개 장교일 뿐이야. 아니, 총리 각하가 직접 나서도 이미 벌어진 일을 막을 수는 없을걸.”
“안나가 도마 위에 오르게 된 것도 다 벨담이 주도한 것 아닌가? 이 모든 사실들을 고작 언론사의 힘으로 알아냈을 리 없잖아.”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너는 반역자가 아니라고. 오히려 그 많은 귀족들을 죽여 놓고도 여전히 제일 충성스러운 군인이라고 말이야. 벨담은 네가 필요해. 너도 알다시피 우린 세계 대전에서 졌어. 온 국가가 막심한 피해를 입었지. 사람들의 삶은 망가졌어. 본래대로라면 우리 정부가 온 국민의 분노를 다 받아 줘야 했겠지. 네가 입스윈에 투항해 귀족들을 모조리 쓸어버리지 않았다면 말이야. 아주 좋은 화젯거리가 생긴 거야, 자일스. 사람들의 분노를 우회할 이야깃거리 말이야.”
“괜찮아. 나를 어떻게 해도 좋아. 나는 내 죗값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어. 여기에 안나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어.”
“아직도 모르겠어? 우리에겐 이야깃거리가 필요하다니까. 너는 죄인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솔직히 말해서, 우린 네가 귀족들을 살해한 사실에 대해선 전혀 관심 없어. 다만 자극적인 이야기를 마련해야만 했을 뿐이야. 우리가 안나를 일부러 끌어들인 것 같아, 자일스? 너는 하나의 커다란 화제야. 네가 안나를 사랑한 이상 그녀도 휘말리는 걸 피할 수 없어진 것뿐이야.”
결국 안나를 이런 운명 속에 처박은 건 자일스였다. 안나를 놓아주지 못한 것이 이런 식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실의에 빠진 자일스가 물었다.
“내가 죽으면…… 국가에서 나를 처형한다면, 안나는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루이제가 곧 위로하듯이 미소 지었다.
그러곤 대답했다.
“아니.”
보이지 않는 꼬리표가 영영 그녀를 따라다닐 거야.
비록 안나는 목숨을 구했지만, 여전히 자유롭지 않았다.
그리고 안나를 그렇게 만든 건 자일스였다.
자일스는 안나를 돕고 싶었다. 그녀가 소중했으니까. 그녀를 사랑하니까. 하지만 그가 안나와의 사이를 더욱 좁힐수록, 오히려 온갖 악재가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지게 되었다.
밀려오는 두통 때문에 자일스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는 루이제와 나누었던 대화를 잠시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뭔가를 하려 하면, 그것이 또 다른 악재가 되어 나타나지는 않을까.
죽는 건 괜찮았다. 언젠가는 반드시 일어날 일이었으니까. 다만 그는 비로소 안나에게 그녀가 원하던 삶을 되찾아 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위안을 얻고 있었다. 그 사실이 죽음조차 아무것도 아닌 일로 치부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마지막까지도 모든 것을 망쳤다.
자일스는 신문에 실린 안나의 사진을 바라보다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얼굴이 인쇄된 부분을 엄지로 쓸어 보았다. 허나 뻣뻣한 종이의 감촉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
“퇴원시켜 주세요.”
내가 의사를 향해 요구했다. 그는 내 요구가 적잖이 당황스러웠는지 몇 초간 안경을 고쳐 쓰길 반복했다.
“퇴원 말입니까?”
“네. 퇴원시켜 주세요.”
의사는 옆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간호사와 시선을 교환했다.
“병원에 입원하신 지 채 사흘이 지나지 않았습니다. 뭔가 마음에 드시지 않는 것이라도 있었나요?”
“난 그렇게 아프지 않아요. 물론 치료가 필요하다는 건 알지만, 난 충분히 내 저택에서도 회복할 수 있어요.”
“레이디께서는 전문적인 시설에서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사저에서 왕진 의사를 불러 치료 받으면 될 것 아니에요?”
“그건…….”
의사는 확신을 내릴 수 없는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이미 내 마음을 확고하게 굳혔기에 단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안 되겠다 싶으면 다시 병원으로 올게요. 내 몸 상태가 어떤지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잘 아는 법이 아니겠어요? 그 정도는 알아서 할 수 있어요.”
“레이디께서 정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결국 의사는 승복의 뜻을 표했다. 애초에 그는 내게 아무것도 강요할 수 없었다. 실제로도 나는 간호사가 항상 옆에 있어야 할 만큼 아프지 않았다. 난 그저 요양하면서 회복해야 할 단계에 있었고, 그게 꼭 병원에서만 이루어지라는 법은 없었다.
그는 마지못해 말하며 일말의 한숨을 쉬었다.
“활동적인 일은 최대한 자제하시고 쉬는 데에 집중하십시오.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 때까지는 바깥 활동을 하지 않으시는 것을 권고드립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붕대와 거즈를 갈아 달라고 하십시오. 상처 부위를 소독하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네, 네.”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곧바로 떠날 채비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옷들은 깔끔히 세탁된 채로 옷장 안에 가지런히 개어져 있었다.
“모셔다드릴 사용인은 부르셨습니까?”
“이미 오고 있을 거예요.”
내가 칸막이 뒤로 들어가자 의사는 더 묻지 않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이제 병실에 남은 건 나 혼자였다.
의사가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가능성은 적었다. 한시라도 빨리 병원을 떠나고 싶었던 나는 의사의 허락을 받기도 전에 아렌트에게 퇴원하겠다고 선언한 참이었다.
어쩐지 나를 찜찜하게 만드는 특유의 차가운 인상 때문에 그를 자주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연락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아직 내 것이 된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조차 모르고 있었으니까.
나는 로테가 준 신문들을 모두 챙겼다. 맨 정신으로 견디기 힘든 내용이 가득했지만, 분명 내가 알아야 하는 것들이기도 했다.
자일스의 비인간적인 면에 대해 다루는 내용뿐만 아니라, 나를 조각내어 지면 위에 전시한 기사들까지 전부. 벨담에서 내가 얼마나 취약한 존재인지 외면할 수는 없는 법이다.
곧 말끔한 옷을 입은 남자가 병실로 찾아왔다. 아마 아버지가 거느리던 사용인들 중 하나가 분명했다. 그는 새 고용인을 대하면서도 마치 나를 대하는 것이 아주 익숙하다는 듯 자연스레 목례했다.
“레이디 엘로이즈. 모셔다드릴 차가 병원 앞에 도착했습니다.”
“와 줘서 고마워요.”
그는 앞장서서 나를 병원 밖까지 데리고 나갔다. 병원을 나가는 동안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간호사나 환자들은 제 할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는 그냥 퇴원 수속 절차를 밟은 평범한 환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병원 바깥으로 나서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졌다.
병원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나를 보자마자 앞으로 튀어나와 플래시를 터뜨려 댔다. 강렬한 플래시 불빛 때문에 나는 반사적으로 눈앞을 가렸다.
“비스마르 양! 벨담으로 다시 돌아오신 소감은 어떻습니까?”
“자일스 헤센 때문에 죽을 뻔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아직도 자일스 헤센을 사랑하십니까?”
기자들이 나를 향해 외쳐 댔지만 무어라 대답할 정신조차 없었다. 나를 데리러 왔던 사용인은 내게 카메라를 들이대려는 기자들을 거칠게 밀어 내며 으름장을 놓았다.
“저리 꺼져! 아가씨께 손이라도 대면 법적으로 해결할 줄 알아라!”
나는 사용인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기자들은 내가 차에 올라탄 이후에도 계속해서 차창에 대고 찰칵찰칵 소리를 내며 사진을 찍어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