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그 남자 때문에 그러시는 건 아니죠?”
“무슨 남자요?”
“자일스 헤센 말이에요. 제가 주제넘은 소릴 하는 거라면 용서해 주세요. 만일 아가씨께서 그 남자를 사랑하셨다면…… 아직까지 그 사랑이 유효한가 싶어서요. 그래서 이렇게 식사도 잘 안 드시는 건가 해서…….”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벨담 간호사에게 자일스 얘기를 해 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어차피 그녀도, 나도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로테는 내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해석했는지 자세를 고쳐 앉고는 더욱 힘이 실린 목소리로 열변하기 시작했다.
“보세요, 아가씨. 아가씨는 지금껏 그 남자에게 속고 계셨던 거예요. 자일스 헤센이 얼마나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사람인지 잘 모르셔서 그런 거예요. 아마 아가씨의 마음을 이용하려고 실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꾸며 냈겠죠. 이젠 아가씨도 헤센의 진짜 본모습이 뭔지 아실 권리가 있으세요.”
“로테, 지금은 그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도 자일스 헤센 때문에 우울해하고 계시잖아요. 그 남자 걱정하시는 것 아니에요? 저는 절대 그럴 필요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우리 군인들이 헤센을 아가씨로부터 떼어 놓지 않았다면 그는 아가씨마저도 죽이고 말았을 거예요. 무슨 짓인들 못 하겠어요? 자신의 유일한 누이마저도 제 손으로 살해한 사람인데.”
“……뭐라고요?”
자일스에게 누이가 있었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가 직접 말해 준 사실이니까. 셀레스트 헤센, 그녀는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어 자일스와 생이별을 하게 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셀레스트를 자일스가 직접 죽였다는 건 처음 듣는 일이었다.
드디어 내 관심을 끄는 데에 성공한 로테는 더욱 신이 나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모르고 계셨어요? 자일스 헤센은 그의 누이를 죽였어요. 그는 사람 가죽을 뒤집어쓴 짐승이에요.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함께 자란 가족을…….”
“그 이야기는 누구한테서 들은 거예요?”
“특별히 전해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벨담 사람들이라면 다 알 만한 사실이에요. 며칠마다 신문에 그에 대한 이야기가 실리는 걸요.”
“신문에서 자일스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어 댄다고요?”
“네, 그건 잘못된 게 아니에요. 그는 우리 국가의 가장 치명적인 오점이니까요. 모두가 알 권리를 갖고 있어요. 벨담 역사상 최악의 살인자가 나타났는데 그가 뭘 하고 있는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잘못된 게 아니겠어요?”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이미 벨담이 자일스를 패전으로 인해 터져 나오는 분노와 슬픔의 분출구로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앨버트로부터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아마 사람들이 벨담의 현실에 대해 떠올리기 시작할라치면 신문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자일스의 이야기를 해 댔을 것이다.
알 권리는 나에게도 있었다. 나는 벨담에서 정확히 어떤 이야기들로 자일스를 물고 뜯기 바빴는지 알고 싶었다.
“그 신문, 저도 좀 볼 수 있을까요?”
로테는 내 요청을 흔쾌히 승낙했다. 그녀는 드디어 내 마음을 돌릴 기회를 찾았다고 생각했는지 몇 년 치는 되어 보이는 양의 신문 뭉치를 구해다 주었다.
“읽어 보시면 아가씨도 그 남자가 얼마나 악마 같은 사람인지 아실 거예요. 벨담군이 아가씨를 구하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정말. 신문은 나중에 사저로 가져가셔도 좋아요. 어차피 날짜가 지난 거라 폐기할 예정이었거든요.”
로테는 간호사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금방 내 곁을 떠났다. 여전히 식사는 내 곁에서 천천히 식어 가고 있었지만 나는 빵과 수프 같은 것에 관심을 잃은 지 오래였다.
나는 신문을 펼쳐 읽었다. 자일스의 이름이 등장하는 부분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다. 그의 이름과 사진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다른 신문들을 살펴보아도 그랬다. 자일스는 이목을 끌어야만 하는 존재였다.
나는 신문에 실린 자일스의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분명 이목구비는 자일스의 것이 분명했지만, 나는 어쩐지 그가 낯설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신문 속의 그는 실제보다 훨씬 더 냉혹하고 교활해보였다.
그의 사진 옆에 큼지막한 헤드라인이 있었다.
‘헤센의 끔찍한 가족 살해’. ‘신은 정녕 그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기사 본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시작했다. 벨담 정보국은 일주일 전, 자일스 헤센이 입스윈에 대한 충성심을 부각하기 위해 본인의 누이인 셀레스트 헤센을 살해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나는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기사에 의하면 자일스는 마인헤바흐라는 곳에서 벨담으로 도피하려는 사람들을 뒤쫓았다.
그중에는 자일스의 누이인 셀레스트가 있었고, 자일스는 그녀를 무자비하게 칼로 찔러 살해해 입스윈에 바쳤다.
기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입스윈의 충성스러운 혁명군임을 보여 주기 위해 셀레스트를 살해한 그가 셀레스트의 발목에 끈을 매달아 질질 끌고 다녔다거나, 살해 직후 그녀에 대한 음담패설을 늘어놓았다는 등의 끔찍한 부가 내용이 지면을 채우고 있었다.
자일스의 악행이 미처 채우지 못한 공간은 셀레스트 헤센이라는 인물에 대한 토막글이 마저 채웠다. 그녀는 자일스와 반대로 아름답고 선한 인물이었으며 자일스를 올바른 길로 이끌려고 노력하다가 그의 분노를 사 죽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건 사실일 리가 없었다. 적어도 그가 셀레스트의 죽음을 모욕했다는 내용은 더더욱 진실과는 멀어 보였다. 아직도 누이와 함께했던 추억을 나열하며 설핏 미소 짓던 자일스의 모습이 선연한데.
하지만 그가 셀레스트를 죽였다는 건 사실일까?
기사가 나온 일자를 살피자면, 내가 아직 저택에서 근근이 살아남던 겨울 초입의 일이 분명했다.
그때 자일스는…… 유독 초췌한 얼굴을 하고서 나타난 적이 있었다. 그가 내게 충동적으로 입을 맞춘 것도 그날의 일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셀레스트를 죽이고 나서, 온전치 못한 상태로 나를 찾아온 탓에 그랬던 걸까.
그는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뭐가 진실이고 거짓인지조차 분간하기 힘들었다. 명백한 악의를 담아 쓰인 대목만을 짚어 낼 수 있을 뿐이었다.
로테는 내가 이 많은 신문들을 다 읽기를 바랐을까. 그녀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이들은 자일스를 너무나도 증오하고 미워했다. 그 증오가 내 기억 속 자일스에게 영향을 미칠까 봐 두려웠다.
적어도 이건 내가 아는 자일스가 아니었다. 벨담과 나는 그를 보는 시선 자체가 달랐다. 나는 채 절반도 다 읽지 못하고 신문을 덮어 버리려 했다.
그때, 나는 신문에 실려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인물을 발견했다. 그건 바로 나였다. 내 이름이 거기 있었다. 순식간에 내 시선이 다시 신문 위로 고정되었다.
엘로이즈 비스마르, 그녀는 누구인가?
<자일스 헤센의 뒤틀린 사랑을 받는 불행한 여인>
신문에는 나에 대한 모든 것이 실려 있었다. 내가 태어날 적에 받았던 이름부터 내가 살던 솔즈부르의 사유지와 저택, 비스마르 백작, 그리고 한때 내 약혼자였던 요한 마이어까지…….
내가 피아노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고 피아니스트로 활약하고 싶어 했으나, 자일스 헤센의 추적을 받을 것이 두려워서 가명을 썼다는 사실까지도. 전부 여기에 적혀 있었다.
기사에 따르면 나는 입스윈 혁명의 불길에서 간신히 살아났으나 자일스에게 발견되었고, 그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몇 번을 노력했으나 결국 그의 손아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불행하고 불쌍한 여인이었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그들은 다 알고 있었다. 벨담 정보국뿐만 아니라 온 벨담 사람들이 내 신상부터 사생활까지 다 꿰고 있었다. 손이 떨려 왔다. 이런 게 내가 찾던 자유인가? 나는 분명 안전해졌지만, 이건 내가 배워 온 자유와는 확연히 달랐다.
벨담으로 오면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착각이었다.
이미 이곳에서도 나는 자유롭지 않았다.
자일스는 죽게 될 것이고, 나는 살아남는 대신 평생 동안 언론의 관심을 피해 다니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 이름도 유명한 자일스 헤센의 연인이었으니까.
그런 삶을 위해 자일스의 목숨을 바쳤단 말인가?
나는 병원 바깥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대신 이성을 되찾기 위해 숨을 골랐다. 적어도 나는 신문에 박제된 채로 살고 싶지 않았다. 이런 건 나를 위한 삶이 아니었다.
이제 나는 다시 생각해야 했다.
지금부터 내가 무얼 해야 할지에 대해서.
*
자일스는 수갑에 구속된 채로 신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이제 다시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평범한 방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를 위한 철창 안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지금도 군인 한 명이 문가에 서서 곁눈으로 그를 감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임무는 자일스가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지켜보는 것일 게 분명했다. 탈출 시도를 하거나, 혹은…… 자살을 감행하려 하거나. 하지만 자일스는 쓸데없는 반항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그가 관심을 두는 것은 안나의 이야기를 실은 신문이었다.
자일스만큼이나 안나는 좋은 기삿거리였다. 역사상 최악의 살인자와 로맨스를 나눈 여인의 이야기…….물론 온 벨담의 증오를 받는 대상은 자일스였지만, 그는 신문을 읽으면서 어쩐지 대중의 관심이 더욱 쏠려 있는 쪽은 안나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몇 시간 전, 루이제는 신문 위에서 안나의 이름을 발견하고 사색이 되어 가는 그를 바라보며 흥미롭다는 얼굴을 했다. 마치 그에게서 인간적인 모습을 다시 발견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고개를 들고 루이제를 대하는 자일스의 눈빛은 더 이상 공허감에 빠져 있지 않았다. 분노와 절망감이 한데 뒤섞여 그 안의 잿더미를 다시금 불태우고 있었다.